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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Jun 11. 2024

남편의 말에는 다섯 가지가 없다

말없는 남편과 사는 법

휴일 오후. 남편은 TV로 야구경기를 틀어놓고 소파에 기대어 반 누워 있다.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나는 소파 한 칸 간격을 두고 앉아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신랑.”

“응.” (시선은 핸드폰에 고정한 채)

“승리 오늘 시합 뛰러 아침부터 나갔어요.”

“안타다.” (시선이 핸드폰에서 TV로 이동)

“오늘 저녁 뭐 맛있는 거 해줄까요?”

“맛있는 거. … 아, 아깝네.” (점수 못 내고 아웃당하는 걸 보며) 

“신랑.”

“네, 듣고 있습니다.” (시선은 다시 핸드폰 화면으로)

나는 폭발했다. 내 몸은 불덩어리를 품은 활화산이 되었고, 뜨거운 용암이 얼굴에서 목을 타고 흘러내리다 김치국물이 튄 흰 티셔츠를 적셨다. 


“사람이 말을 하면 눈을 쳐다보고 들어주려는 자세를 취해야지. 눈은 핸드폰 아니면 TV에 있고.”

“다 듣고 있었어.”

“듣는 게 다야? 내가 지니야?”


말을 하고 보니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는데, 승리가 점심 먹으러 들어온다. 참 신기하게도 터진 화산처럼 속에 있는 걸 다 쏟아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용암이 아들의 등장으로 수도꼭지처럼 잠겨진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아들을 반기고, 승리는 잠시 엄마 눈을 쳐다보다가 모른 척 식탁에 앉는다. 남편은 쭈뼛거리며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나는 서재로 들어와 앉았다. 내가 왜 갑자기 눈물을 쏟았나. 상황으로 봐서는 ‘갑자기’가 맞지만 언제고 터질 일이었다. 시간문제였을 뿐.

 



남편의 과묵함은 내가 그를 선택했던 제일의 미덕이었다. 다만 그 미덕이 지지고 볶는 일상을 살 때는 모시기 힘든 부처님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는 자기에 대한 이야기도, 남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이야기도, 내가 하는 남에 대한 이야기도 듣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시선이 내가 아닌 기계를 향하고 있어서다. 이쯤 되면 가족애는 있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한번 미운 마음이 들면 그 마음은 계속 크고 깊어진다. 내가 마음지옥을 헤매는데, 거실에서는 승리와 승리 아빠가 야구 얘기를 하며 이야기하는 게 들린다. 나는 잠시 놓아버린 정신줄을 다잡아 본다. 


말을 뱉고, 그 뱉은 말에 이불킥을 하며 후회했던 경우가 내게는 얼마나 많았나. 늘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는 나였다. 그럴 때마다 말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남편이 존경스러웠다. 어째서일까. 나는 남편의 말에 이 다섯 가지가 없어서라는 걸 정리해 낼 수 있었다. 


첫째, 자랑

가진 것, 아는 것, 이룬 것에 대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없다. 심지어 생긴 것도. 

둘째, 험담

남이 못한 것, 잘못한 것, 안 한 것을 말한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한 걸 들은 적은 있다.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구나, 그냥 그렇게 생각해.”

셋째, 허풍

과한 칭찬도 과한 힐난도 하지 않는다. 넘치는 것보다 부족한 게 낫다를 실천한다.

넷째, 변명

할 수 있는 것만 한다고 하고, 일단 하기로 했으면 무조건 한다. 하지 못했으면 사과한다.  

다섯째, 생색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서 한 일에 대해 남에게 알리려고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칭찬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렇다. 내 남편의 말은 이렇다. 이 다섯 가지가 없다. 

이걸 실천하자고 이 악물고 노력해야 할 일들인데 그걸 하고 있는 사람이니 대단하다. 


나는 대화가 없어서 외롭고 서럽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나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확대 해석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방법을 몰라서라는 걸 알기에. 나는 거실로 다시 나왔다.


“신랑.”

“응.”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본다.)

“대화할 때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봐 줘요.”

“알겠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과장되지 않은 자세로 내가 한 말의 뜻을 알아차리고 나의 요구에 응답해 준 남편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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