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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Jun 14. 2024

건강검진센터 한가운데서

‘줄자’의 후덕함을 닮고 싶어라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만든 줄 

맨 뒤에 선다.


시력도 재고

청력도 재고

혈당 수치 확인하라고 피도 뽑는다.


마지막 방에 들어가니 체중계에 오르라 한다.

내려오니 간호사 한 명이 자기 앞으로 서라 한다.

양팔을 어깨선까지 올리고 쭉 뻗고 있으라 한다.


무뚝뚝한 손가락들이

내 옆구리 아래 어딘가에서 엉덩이 위 어딘가를 짚더니 

줄자로 내 허리를 한 바퀴 감싼다.

바짝 조이지 않고 헐겁게 감싸더니

나에게 말도 없이 무지막지한 숫자를 종이에 적는다.

“다음 분요.”

쇠막대기 잣대 같은 목소리가 줄자를 들고 다음 사람을 호명한다.


내가 만약 ‘자’라면 

딱딱하고 차가운 쇠막대기 잣대가 아니라,

낭창낭창 휘어지고 부드러운 ‘줄자’가 되고 싶다.


삐쩍 말라 걱정인 마른 배라면 

살에 닿을 듯 말 듯 배 둘레를 살포시 감싸 넉넉한 수치를 안겨주고,

두툼한 비곗살이 그득해 1센티미터라도 줄이고 싶은 배라면

그 비계를 바짝 조여 3인치는 적게 말해줄 것이다.


재고, 확인하고, 군더더기 없이

1밀리미터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쇠막대기 잣대 말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조이고 푸는 

푸근하고 여유로운 줄자.


내가 만약 ‘자’라면 

후덕한 줄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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