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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성동 Oct 27. 2024

피의 잉크, 만화 덩어리

H의 추억

 꼬박 31년간의 교사 생활을 돌아보면 기억나는 얼굴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H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만화 반 동아리 담당 교사로 H가 2학년이던 1998년 일반 인문계 남학교인 G고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당시는 문화 콘텐츠로서 만화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크게 부각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학교사회도 예외 없이 불어닥쳤습니다. 대입이 지상과제인 ㄱ고등학교도 음성 서클이던 만화 모임 ‘펜들(pendle)’이 존재하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넘치는 끼를 주체 못 하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노트인 ‘돌림장’을 공유하며 자생적으로 만화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직접 만화를 그려 몇 군데 마이너 잡지 등에 연재하고 동호인 활동 중이던 저는 그 아이들 속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되어 담당 교사가 되었습니다. 학교에 정식 동아리로 등록하여 예산을 지원받고 회지 등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어설프나마 기성 만화작가 흉내를 내며 장, 단편의 ‘코믹스’를 창작했고 나 또한 아이들 세계 속의 만화에 눈을 뜨는 발전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널찍한 미술실 2곳을 한쪽은 미술반, 한쪽은 만화 반으로 나누어 쓰고 학교에 건의해 두 동아리 모두의 지도교사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일반 인문계고의 형편상 시간, 예산의 부족과 만화에 대한 편견에서 오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이었습니다. 두 개의 미술실 중 한 곳을 전국대회 우승을 하던 농구부의 체력단련장, 교사 헬스장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종종 들렸었고 몇몇 부장들이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이죽거려 크게 부딪친 기억도 있습니다.

 

아이 중에는 그림을 잘 그리거나, 스토리 쓰기와 콘티 연출에 특출 나거나 나름대로 만화에 일가견이 있는 아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H가 있었습니다. H는 절판된 희귀본 만화나 내 연령대나 알만한 고전, 일본 애니시디도 꽤 많이 소장하고 있는 마니아였습니다. 만화 그리기를 무엇보다 좋아하여 본인을 ‘피의 잉크’라는 캐릭터로 만들어 학원만화를 꽤 여럿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H와 특별히 허물없이 지내며 비디오, 만화책 등을 빌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쯤은 저도 교사 경력이 좀 쌓여 여유롭게 수업에 임하게 되었고, 과목의 특성상 한껏 자유분방하여 때로 친구처럼 격의 없이 아이들과 함께하곤 했습니다. 그와 같은 환경에 서로 만화에 대한 관심이 한결같아 어떤 때는 만화책을 매개로 입씨름하거나 죽이 맞아 길게 토론하고 비평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H는 180 넘는 큰 키에 매우 거대한 몸집을 갖고 있었습니다. 교실 맨 뒤에 앉아 있으면 마치 유치원 의자에 앉은 코끼리 같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둥근 얼굴에 살집이 유난한 모습이었습니다. 반 아이들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았고 동아리 부원들과의 소통은 활발했습니다. 교실에서는 주로 잠을 잤고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그저 망연자실 지켜보곤 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동아리방으로 가기 위해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이 보이면, 주변의 급우들은 “어! 살아있어, 움직여! ” , “꿈틀대고 있어”라며 농담을 주고받았습니다. 교실 수업을 하다 운동장을 내다보면 체육 시간에 뒤쪽에 멀찌감치 혼자 동떨어져 있던 H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동아리 활동은 누구보다 활발했습니다. 교실에서와는 다르게 시끄러웠고 동기와 후배들에게 다정다감하고 적극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은 H와는 다르게 유난히 작고 연약했으나 학과 공부는 팽개치고 미술반 활동에만 치중했던 저의 학창 시절과 비슷했습니다. 성격 또한 거대한 몸집과는 다르게 예민하고 날카롭고 매사 비판적으로 문제 제기를 일삼기도 했습니다. 동아리 회지에 혼자 너무 많은 쪽수의 만화를 실어 나한테 꾸중을 듣기도 했고 매사에 비판적이라 부침도 많았던 아이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컴퓨터 관련 대학에 들어가 지방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끔 단짝인 K, J와 함께 제 작업실에 놀러 오기도 했고 그림 운반, 설치를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그 큰 덩치에 요란한 피어싱과 빨간 선글라스, 까만 가죽 롱코트를 걸치고 오토바이를 끌고 나타나 놀랐습니다. 분명한 기억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렇듯이 마치 ‘코스프레’한 듯한,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모습도 꽤 여러 번 있지 않았나 합니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틈나는 대로 혼자되신 어머니가 하시는 치킨집을 돕고 있고 휴학도 빈번하다고 하더군요. 돌아보니 H는 선생인 내게 뭔가 자랑스럽고 의젓한 모습을 은연중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내심 짐작해 봅니다. 그때 몸집만큼이나 여유롭고 새로운 ‘피의 잉크’ 만화를 그려내라고 격려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러다가 몇 년 소식이 끊겼고, 가을 어느 날, 느닷없이 불현듯 제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지난 일기를 뒤적이니 2011년 9월 20일입니다. H 본인의 부고였습니다. 9월 21에 강북 삼성병원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영정사진 속 아이에게 멍하니 절하고 H 동기와 선, 후배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날 처음 알았는데 어려서부터 지병이 있었고 몇 달을 아파 힘들어했으며 입·퇴원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병명과 구체적인 병상 기록 등은 누군가 이야기해서 듣기는 했으나 그저 먹먹하니 경청했을 뿐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경황없이 오랜만에 만난 만화 동아리 아이들의 소식을 주고받았습니다. 이제 삼십 문턱에 들어선 아이들은 활기찼고, 사회와 세상에 거침없어 보였습니다. 장례식장을 먹먹한 답답함으로 빠르게 나왔습니다. 


제 책장에는 낡고 퇴색해 바스러질 것 같은 어설프게 제본된 책이 십여 권 꽂혀 있습니다. 내게는 금보다 더 값진 보물입니다. 중학교 시절, 매일 같이 밤을 새우며 그렸던 만화들입니다. 그때의 나는 만화에 미쳐 있었고, 종이 위에 나의 꿈을 그려 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만화는 제게 추억이고 향수입니다. 그 시절의 열정을 다시 피워 만화를 새로 시작하던 무렵 ‘피의 잉크, 만화 덩어리’ H가 있었고 함께했습니다.     

 

 손꼽히는 성장영화인 ‘마르셀의 추억’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짧은 환희의 순간들은 지울 수 없는 슬픔에 덮인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것을 미리 말해 줄 필요는 없다!”

엄마와 동생, 지인 등의 죽음을 회상하며 중년의 마르셀이 내뱉는 독백입니다.

추억은 고즈넉한 행복으로 미소 짓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H가 그렇습니다.     

                                                       2024.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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