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장은 30년째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런 김부장의 출근길이 어색하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의 공백의 탓으로 돌리기에 그 날따라 김부장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느낀 낯선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위화감을 그에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곧 그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거짓말처럼 그의 책상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김부장이 사용하던 물품은 온데간데 없고, 그의 자리에는 빽빽한 사무실의 공간과 어울리지 않게 텅 비어있었다. 김부장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파악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달라진 것은 오직 그의 자리뿐이다. 모든 것이 일주일전 그대로인데 말이다.
"김대리, 혹시 여기 있던 내 컴퓨터하고 짐들은 어디간거지?"
김부장은 이 해괴한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파악하려고, 평소에는 지나다니며 눈인사조차 거르던 김대리에게 말을 걸었다.
"어... 그게... 자세한건 서부장님한테 직접 들으시면 될거에요.. 저도 자세한건 몰라요."
괜히 김부장과 엮여서 좋을게 없다고 생각한 김대리는 대충 얼버무리는 말로 상황을 벗어나려 했다.
"아 그래. 알았어. 서부장 출근하면 물어보지뭐."
그래도 다행이다. 비록 지금은 김부장의 상사이지만, 서부장이라면 그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부터 김부장이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알려주고 했던 사이라서, 편하게 자초지종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서부장이 올때까지가 문제이다. 오갈 곳 없는 김부장은 황망한 도시에 내던져진 고아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언제올지도 모르는 서부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일단 김부장은 황급히 화장실로 몸을 숨겼다. 화장실 좌변기 칸에 들어가 몸을 걸어 잠근 뒤에야, 김부장은 자신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침착하자. 별 일 아닐거야.'
김부장은 스스로를 달래보려 했지만,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27년 회사생활 동안 겪어보지 못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김부장은 이 낯선 경험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 단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좁은 좌변기 위에 앉아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바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마친 잔뜩 겁에 질린 어린 아이처럼.
'시간이 얼마나 흐른거지? 이제 서부장이 자리에 왔을까?'
김부장은 화장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밖을 먼저 살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마주치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김부장이 잘못한 일은 없었지만, 그는 한없이 움츠러들어서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벌거벗은 사람마냥 수치심으로 가득한 그의 마음은 투명인간이 되어 모든 이들의 눈을 피하고 싶어했다.
회사의 복도 끝. 서부장의 정수리가 살짝 보였다. 다행히 서부장이 출근했다. 김부장은 빠른 걸음으로 서부장에게 돌진했다.
"서부장. 나 좀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서부장은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김부장을 보고 흠칫 놀랐지만, 잠시 찌푸려졌던 그의 미간을 정돈하고 김부장을 응대했다.
"아! 부장님. 오셨네요. 휴가는 어떠셨어요? 안 그래도 오시면 제가 좀 드릴 말이 있었는데.."
역시 서부장이다. 다른 쌀쌀한 후배사원들과 달리 김부장에게 일주일간의 안부를 건내며 말을 시작한다.
김부장은 잔뜩 굳어있던 마음이 삽시간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제야 깊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어. 그래.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건지 모르겠지만, 서부장의 짧은 안부인사가 지금 이 순간 김부장에게는 주님의 은총보다 따사롭게 느껴졌다.
"부장님 아침에 커피 드셨어요? 같이 한잔 하러 나가실래요?"
"어. 좋지. 고마워. 서부장. 정말 고마워."
커피 한잔마시자고 했을 뿐인데, 김부장은 서부장을 거의 전생의 은인을 만난 것처럼 대하고 있다.
"부장님. 사실 일주일 사이에 저희가 작게 조직개편이 좀 있었어요."
서부장은 거두절미하고 김부장의 자리를 비운 일주일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부장도 서부장의 첫마디를 듣는 순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뭐 대충 눈치채셨겠지만, 부장님이 자리를 좀 옮기게 됐네요."
담담한 서부장의 말투에는 김부장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상사로서의 의무감이 더 강하게 배어있었다. 그런 서부장의 말을 김부장은 담담히 바닥을 응시하며 듣고 있었다.
"부장님이 외주관리 쪽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이제 출근은 본사 쪽이 아니라 저희 협력업체 쪽으로 하셔야 될거에요. 부장님 짐은 일단 협력업체 쪽으로 미리 옮겨두었고요. 그 쪽 주소는 문자로 알려드릴게요. 거기 박사장이라고 있는데, 그쪽에도 다 통보된 사항이니깐. 오늘부터 이동하셔서 업무를 보시면 되요. 자세한 업무사항은 차차 알려드릴게요. 그러니깐 오늘은 먼저 그쪽 자리로 가서 짐정리만 좀 하시고요. 일찍 집에 들어가세요."
김부장은 시선은 어디서 굴러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돌멩이 하나에 고정된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김부장은 항명도 승복도 하지 않은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사실 김부장은 그 순간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불안한 미래도 그 동안 몸 담았던 회사에 대한 배신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뇌를 움직였다가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그를 삽시간에 휘감고 그를 가장 깊숙한 바닥까지 끌어내릴 것이 분명했다. 김부장은 지금 최선의 방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미동조차 없는 김부장을 잠시 바라보던 서부장은 이내 답답함을 느꼈는지, 짧게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입을 떼었다.
"부장님이 좀 힘드실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좀 마음을 추스리실 시간이 필요하실테니 커피마저 드시고 오세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한잔의 커피를 마시는게 지금 김부장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마는 서부장은 그 말만 남긴채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서부장이 떠난 자리에 혼자 남은 김부장은 아주 천천히 생각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회사에서 시키는대로 해야지."
짧게 중얼거리듯 내뱉은 그의 말은 어쩌면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을지도.
몇분을 더 머문 김부장은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들어온 회사를 다시 나와 그의 차로 돌아왔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핸드폰에는 새메세지를 알리는 '1"이라는 숫자가 있었다. 김부장은 메세지를 확인한 뒤 기계처럼 내비게이션에 협력업체 주소를 입력하고 운전을 시작했다.
김부장은 분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감정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김부장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벌써 회사를 30년이나 다닌 베테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