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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식 Jun 09. 2024

감정의 세계 #6

평온함과 불안의 전쟁 1

저 자신만만한 꼬맹이는 아직 대장 밖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이렇게 살아남았는데 저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 때문에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하기사 저 어린 녀석이 뭘 알겠나? 항생제 한알로 온 세상이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것도, 병원균의 침공과 면역군과 전쟁 그 속에서 점액이 모두 마르고 장벽에서 피가 솟구치고, 지옥같은 그 광경을 저 어린 녀석은 한번도 겪어보지 않았으니 저리 망둥이 마냥 날뛸수 있는 것이지. 만일 그 중에 하나라도 경험해봤다면, 지금쯤 오줌을 질질 지리고 있을 녀석이... 무슨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나대서 날 이 사지로 내몰고 있냐는 말이다!


헌들 어찌하겠는가? 저 녀석의 말 한마디에 입 한번 뻥긋 못하고 끌려나온게 내 신세인걸. 지난 2번의 항생제 투하에서 모두 살아남은 기적의 미생물은 오직 나뿐이다. 그래서 이제 나에게는 어떠한 운도 남아있지 않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건 허무한 죽음 뿐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들처럼, 불구덩이 속의 날파리처럼, 가늘게 연명해오던 내 남은 희망은 이제 한 줌 연기도 남기지 않고 소멸할 것이다. 난 아제 죽은 목숨이다!




길고 긴 대장을 거슬러 오르는 길은 멀고도 지루했다. 얼마나 온 것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울만큼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저 멀리 소장으로 니가는 출구가 보였다. 드디어 첫번째 목적지인 소장에 당도했다. 


소장! 

우리가 사는 대장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장기이지만, 대장이 워낙 길어서 소장에 사는 미생물과 왕래할 일은 거의 없다. 간혹 소장 근처에 살던 미생물들이 음식물에 쓸려 내려와 그 곳의 소식을 전해준바 있는데, 그들에 의하면 그곳에는 '평온함'이 산다고 한다. 그들은 아름다운 융털의 숲에서 사는데 그 곳은 대장만큼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적은 없고, 그건 아주 오래 전 들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소장에 당도했을 때, 난 그게 거짓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렸디.

융털의 숲!

그곳은 정말 듣던데로 아름답고 경이로운 곳이었다. 빼곡히 솟아난 융털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었고, 융털 아래 흐르는 축축한 점액들에는 풍부한 양분들이 뿜어내는 향긋한 내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름다운 푸른 융털의 숲에서 '평온함'을 찾아 감정의 나무들의 상태를 확인한 뒤, 이 곳에서도 우리처럼 감정의 나무들이 모두 봉인 상태가 되어버린 것인지, 혹시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 했기에 융털의 숲의 아름다움에 취해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봐! 너희는 뭐야!"

정신없이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던 우리를 날카로운 목소리를 누군가가 멈춰세웠다. 그리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한 무리의 미생물들이었다. 그들은 같은 미생물이었지만, 우리보다 훨씬 거대했다. 키는 거의 3배에 달했고, 날카롭고 거대한 편모가 몸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공포스러웠다. 더욱이 말뽐새 역시 이들의 우락부락한 외모를 딱 닮았는데 딱 봐도 '평온함'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이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안녕하세요. 저희는 대장에서 올라온 '기쁨'이라고 합니다."

"뭐야. 왜 '기쁨'이들이 여기까지 와서 걸리적 거리는거야? 여긴 우리 '평온함'이 점령한 구역이야. 여기서 함부로 얼씬 거리다가는 줘터지기 딱 좋은거 몰라?"

의외다. 이런 깡패같은 미생물들이 '평온함'이었다니!


"아! 죄송합니다. 사실 저희 마을의 감정의 나무가 갑자기 이상해져서, 급하게 원인을 찾아야 되서..."

"그걸 왜 여기와서 찾는건데! 아주 팔짜 좋은 소리들 하시는군! 우리는 감정의 나무는 '불안' 이 새끼들한테 뺏겨서 벌써 달째 구경도 못하고 있다고!"


완전히 헛짚었다. 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나무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턱이 없다. 


"이 '불안' 좀만한 새끼들! 다음에 걸리면 아주 아작을 내서 씹어 먹어버려야지! 원래 우리가 정면으로 싸우면 절대 질수가 없단 말이야. 그래서 융털의 숲이 스스로 빛을 발하던 시절에는 이 좀만한 새끼들은 우리한테 걸릴까봐 무서워서 도망다니기 바빴지! 그런데 말이야 몇 달전부터 융털의 숲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고! 이게 너희들이 말하는 감정의 나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융털의 숲도 몇 달전부터 이상해지기는 했어. 근데 이 좀만한 것들이 그 때부터 우리 뒤통수를 치고 다니기 시작한거야. 몰래 숨어있다가 치고 빠지는데 미꾸라지처럼 도망가는걸 잡을 수가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지!.

근데 말이야 모르긴 몰라도 니네 나무가 이상해진게 '불안' 이 새끼들 때문은 아닐걸. 이 새끼들이 비열하기는 해도 감정의 나무는 꽤 애지중지하는 편이거든. 그런 새끼들이 감정의 나무한테 해코지를 했을리는 없잖아! 안 그래? 아마 저 위에 사는 '분노' 새끼들이 또 지랄병을 하는게 틀림없어! 

저 새끼들이 한번씩 지랄병을 하는데 그럼 위액이 흘러넘쳐서 여기까지 넘어온단 말이야. 그럼 그 때는 '불안' 이 새끼들이 깐죽거리는거 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융털이고 뭐고 싹 다 녹여버린다고. 한마디로 싹 다 뒤지는거지!"


그 때, 뒤에 있던 대장처럼 보이는 미생물이 냅따 소리를 질렀다.


"야! 거기서 언제까지 노닥거리고 있을거야! 저딴 새끼들 감정의 나무가 뭐가 중요하다고! 어서 '불안' 이 씹새끼들을 잡아서 좆칠 궁리나 하라고! 그리고 너희들 뒤지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 여기가 무슨 놀이터인줄 알아! 니네 나무가 말라죽던가 말든가 우리랑은 상관없으니깐 씹어먹어버리기 전에 당장 꺼지라고!"


잔뜩 섬모를 세우고 고함을 질러대는 모습에 우리는 화들짝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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