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조각을 제공하라!
내가 브랜딩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NFT의 폭발적인 가격 상승이었다. 이더리움이 30만 원 하던 시절, 크립토펑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크립토펑크 NFT를 단돈 2 ETH에 구매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는 "에이, 이 그림쪼가리를 왜 60만 원에 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그 크립토펑크가 수억~수백억 원에 거래가 될 줄이야.. (지금도 55 ETH, 1.65억 원쯤 한다) 엄청난 부자가 될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다음에는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에 쓸데없이 비싼 사치품들에 대해서 공부해 보기 시작했다.
NFT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쓸데없이 비싼 것들이 굉장히 많다. 작게는 옷이나 가방, 신발과 시계부터 시작해서 자동차나 가구같이 부피가 큰 것들도 있고 그림이나 골동품처럼 실용성과 거리가 먼 것들도 있다. 그렇다면, 왜 같은 기능을 하는 물건인데 어떤 것은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어떤 것은 엄두도 안 날 정도로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보관도 어렵고 사용하기 불편한데도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들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이런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 비싼 물건들을 구매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코인 가격 폭등으로 인해 금전적인 여유가 생겼던 때라 난생처음 구찌 매장에 들어가서 눈을 딱 감고 정장 풀세트를 구입해 봤다. 또, 크림에 들어가서 나이키의 한정판 스니커즈와 슈프림 같은 스트릿웨어들도 구매해 봤다. 막상 물건을 받아보니 내가 홍대에서 사 입던 동대문 출신의 보세 옷들과 비교해서 딱히 품질이 더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침에 입고 나갈 옷을 고를 때면 비싸게 산 옷에 자꾸만 손이 가는 게 아닌가?
그러던 중, ETHDenver라는 이더리움 행사에 연사로 초청되어 미국 덴버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누가 봐도 BAYC 홀더로 보이는, BAYC 후드티를 사람을 만났다. BAYC를 주제로 말을 걸어보니 예상대로 BAYC 홀더가 맞았고 BAYC 홀더들만 참석 가능한 요트 파티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도대체 왜 이 옷을 입고 홀더임을 티 내고 다니는지 물어보았더니 자신이 BAYC 홀더라는 것을 이용하면 네트워킹을 하기 훨씬 쉽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굳이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나처럼 BAYC를 주제로 말을 걸어주기 때문이다. 행사장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내가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열심히 어필하던 나에게 그건 엄청난 효용으로 느껴졌다.
저것만 있으면 나도 쉽게 네트워킹을 할 수 있겠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당장 BAYC를 구매하고 싶었으나, 그때 당시에 최저 가격이 약 3억 원 정도라서 쉽게 구매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크림(KREAM)에서 다양한 옷들을 계속 구매해서 입어봤고, 어떤 옷을 사면 좋을지 판단하기 위해서 브랜드에 대한 공부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옷 브랜드들에게는 각자만의 역경을 극복해 온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풀세트로 정장을 구매했던 구찌는 다음과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구찌오 구찌(Guccio Gucci)가 1921년에 설립한 구찌는 가죽 가방 회사로 시작해서 귀족들의 사랑을 받는 회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 이후 가죽 공급이 어려워졌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에서 대나무를 수입해서 '뱀부 백'을 만들었는데, 이게 큰 인기를 끌면서 다시 부흥기를 맞았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가족 간에 갈등이 발생하면서 경영 상황이 악화되었고, 심지어 1995년에는 가족 간 살인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브랜드 이미지가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톰 포드가 브랜드 이미지를 탈바꿈시키며 구찌는 다시 부흥하게 된다. 그 이후로도 다시 침체기를 겪었으나, 2015년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새롭게 임명된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뱀을 그려 넣거나 스트릿 패션과 결합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구찌의 브랜드를 현대적으로 탈바꿈시키며 구찌는 다시 한번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역사와 스토리를 알고 브랜드를 다시 보니 옷이 다르게 보였고, 이 브랜드는 다음에 어떤 난관이 찾아와도 극복해 내고 영속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어디서든 뱀 모양이 그려진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굳이 구찌 같은 비싼 명품이 아니라 슈프림이나 스투시 같은 스트릿 패션 브랜드들이라고 해도 그 역사와 스토리를 알고 있으면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 주제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통점을 찾는 것이다. 국적, 고향, 학교, 직업, 소속, 관심사, 고민거리, 연애관, MBTI 등 탐색을 통해 공감대를 찾으면 즐겁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 브랜드 역시 우리의 공감대가 될 수 있다. 물성이 있는 브랜드가 더 좋은 점은 대화를 눈에 확실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브랜드에 대한 공감대가 있는 사람들을 빠르게 인식할 수 있고, 나의 취향과 관심사 또한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브랜드의 의미가 단순히 대화의 주제를 제공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브랜드가 대화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브랜드가 우리 정체성의 조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브랜드를 소비함으로써 각자의 정체성을 조립할 수 있다. 구찌를 입고 아이폰을 사용하며 파인다이닝에 가는 나는 클래식을 중시하지만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제약을 통해 발현되는 창의력을 믿으며, 미세한 맛의 차이를 음미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취향 있는 사람임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조립된 정체성은 사진을 통해 저장되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유된다.
따라서, 브랜딩이란 인식될 수 있고 저장될 수 있는 정체성의 조각을 제공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정체성의 조각은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쉽게 인식될 수 있도록 뚜렷하고 선명한 것이어야 한다. 나이키의 도전, 애플의 창의성, 슈프림의 반항, 테슬라의 사명감 등이 그것이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국적이나 고향 등 주어진 것보다는 각자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정의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브랜드를 소비하는 행위가 나의 정체성을 완성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브랜드를 소비한다고 해서 과연 그 브랜드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 될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나이키를 신는다고 도전적인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아이폰을 쓴다고 창의적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브랜드를 소비하는 행위는 "내가 가진 정체성"이 아니라 "내가 갖고 싶어 하는 정체성"의 조각을 획득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리고 브랜드를 소비함으로써 그 조각을 "돈"을 주고 "노력 없이" 쉽게 획득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브랜딩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사람들이 바라고 열망하는, 결핍되어 있는 매력적인 정체성을 구체화하여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용기가 필요할 때 나이키를, 새로움이 필요할 때 애플을, 일탈을 원할 때 슈프림을, 커다란 무브먼트에 동참하고 싶을 때 테슬라를 구매하는 것처럼 우리의 브랜드를 소비하게 될 것이다. 거기다 사람들이 "정말로" 그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사람들은 더욱더 그 브랜드를 열망하게 될 것이다.
다시 NFT 얘기로 돌아가서, 크립토펑크가 제공했던 정체성은 무엇이었을까? 크립토펑크는 최초의 NFT이기 때문에 크립토펑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블록체인 업계의 OG(Old Generation), 즉 원로라는 것을 상징했다. BAYC는 요트 파티 등을 주최함으로써 블록체인 업계에 새로 들어온 YG(Young Generation)들에게 없는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어주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 예쁘게만 만든 NFT들은 지속되지 못하고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내가 만들고 있는 블록체인 메인넷은 사람들에게 어떤 정체성의 조각을 제공해야 할까? 나의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