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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gbok Mar 19. 2024

5. 문케부 이슈

2021년 9월 10일 목요일

2021년 9월 10일 목요일, 춥지만 맑음.



로포텐 섬에 도착한 기쁨에 취한 것도 잠시, 버스가 다닐 리 없는 새벽 네시에 발이 묶인 우리는 일단 눈 앞에 보이는 대합실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별 다른 수가 없었다. 사실 우리의 목적지가 버스로 고작 5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라 어쩐지 버스비가 아까운 것 같기도 하고, 백패킹 정신을 살려 어둠을 헤치고 걸어가 볼까? 하는 패기있는 생각의 언저리까지도 가 보았지만… 절레절레. 걸어서는 40분 이상 걸리는 곳이다. 백번 양보해 그곳에 도착만 하면 '하루 끝!’인 일정인 것도 아니니 얌전히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은 날이 무척 좋을려나 보다. 당일 뜨는 예보는 꽤 들어 맞는다. 언제 또 갑자기 흐려질지 모르니 이런 날엔 무조건 하이킹을 해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3시간 쪽잠을 자고, 오전 7시 무렵 첫 차를 타 문케부 헛Munkebu hut을 향해 간다면 놀랍게도 짜온 계획과 조금도 어긋남이 없을 테였다. 


짙은 초록빛 봉우리들이 사방으로 올려다 보이는 산턱, 그 위에 살짝 올려 둔 장난감 같은 빨간 오두막이 있다. 그 옆에 구불구불 자연스럽게 들어 찬 호수들에선 꿈결같은 분위기가 피어오른다. 사진으로 본 문케부 헛 주변의 풍경은 마치 천국을 상상해 그려놓은 그림 같았다. 근처 봉우리에 오르기 위한 베이스 캠프로 삼기 좋다는 그곳은 특히 곳곳에 평지가 있어 수많은 백패커들이 역대급 텐풍(텐트 풍경) 사진을 남기는 곳이기도 하다.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 텐트 지퍼를 내렸는데 펼쳐지는 풍경이 천국의 그것이라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남편은 바로 그 텐풍 사진에 반해 이곳을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하는 곳 1순위로 점 찍어 두었다. 나라고 왜 상상만해도 붕 날아 오를 것만 같은 그런 곳에 가고 싶지 않겠는가. 


문케부 헛 © 2012 Cody Duncan


현실은 녹록치 않다. 들머리부터 문케부 헛까지는 5km 이상 떨어져 있고, 가는데에만 일반적으로 3 - 5시간 걸린다고 적혀있었다. 즉 걸음이 느린 우리는 최소 6 - 8시간은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도 못한 채로, 난생 처음 2 -30 키로 박배낭을 진 초짜 백패커들이 그 곳을 오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 죽으러 가겠소’라는 굳은 의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특히 체인을 잡고 오르는 미끄럽고 가파른 구간이 있다는 설명을 읽는 순간 나는 단호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놉. 저는 절대 못갑니다. 백번천번 타협해서 들머리 근처에 텐트를 쳐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얼른 당일치기로 다녀 올 수 있다면 모를까. 2020년 처음 텐트를 장만 할 때는 우리가 백패킹에 도전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모든 장비가 무겁고 컸다. 그렇다고 새로 장만하자니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은 탓에 그대로 들고왔고. 그러니까 내말은 문케부 캠핑 이거 미친 짓이라고. 


그리하여 일단은 계획표에 "문.케.부." 세 글자를 적어 두면서도 계속해서 


정말 갈꺼야? 정말 이 가방 지고 올라갈 수 있겠어?


하며 틈만나면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해온 나였다. 그때마다 남편은 나를 겁쟁이 취급하며,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더랬다. 쉬엄쉬엄 천천히 가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이라며 나를 설득했다. 제발 시도라도 해보자며. 하지만 기나긴 여정으로 낡고 지칠대로 지쳐버린 이 새벽, 나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갈 수 있겠어?? 이 상태로?? 


입은 애써 그러엄 이라고 대답하고 있었지만 남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는 것을 나는 봤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페리 안 의자에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다 화들짝 깬 순간 부터 컨디션이 최악이었단다. 무조건 몸살에 걸리고 말것 이라는 불길한 기운이 마구 몰려왔었단다. 



어둠이 고요하게 내려앉은 깊은 밤. 전후면이 통창으로 시원하게 트여있어 바깥 풍경이 훤히 내다 보이는 네모난 방 한가운데, 앞 뒤로 팔걸이 없이 쭉 이어진 벤치덩어리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배에서 내릴 때부터 인연이 닿은 대구포 아저씨와 졸지에 남은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우린 베개 대용으로 챙겨온 단열매트를 펼쳐 깔고 그 위에 최대한 몸을 구겨 넣어 제대로 노숙인 포스를 풍겼는데, 반대편 끝에 자리를 잡고 앉으신 아저씨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시더니 내내 무언가 열심히 들여다 보고 계셨다. 길다란 매트를 반으로 잘라 왔던지라 몸통엔 온기가 돌았지만 다리 부분은 차가운 금속성 의자에 계속해서 체온을 빼앗겼다. 가만히 누워있으려니 등받이에서도 찬기가 스멀스멀 다가왔다. 이 극심한 온도차가 자꾸만 신경이 쓰여 피곤한 가운데도 쉬이 잠에 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정적 속에 간간히 들리는 노트북 자판 소리와 옆에서 부스럭 부스럭 짐을 다시 정리하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첫날 숙소 > 대합실


또 다시 기분 나쁜 한기에 번쩍 눈을 떴을 땐 날이 환히 밝아오고 있었다. 컴컴한 어둠이 물러가고 난 자리에그림같은 이국적인 바닷가 풍경이 또렷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 찍은 사진을 후에 다시보니 이후에 본 다른 풍광들에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그저 작은 선착장의 뒷편일 뿐이었는데도 그 땐 그 모습이 그리도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어느새 나갔는지 창 너머로 열심히 분홍빛이 번지는 구름과 그 아래 바위산의 능선, 지난밤 어둠속에 가려져 있던 거대한 페리의 기세등등한 외견과 잔잔히 물결치는 바다를 향해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얼른 털모자를 고쳐쓰고 따라 나가자마자 딱딱딱 이가 절로 부딫히는 추위가 몰려왔다. 춥고, 배고프고, 졸렸다. 남편은 아예 한 숨도 자지 못했다며 신나게 코까지 골면서 자는 나를 밤새 부러워했다고 했다. 짐을 다시 차곡차곡 챙겨 등에 매고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앉아 다시 한 번 물었다. 


문케부 헛... 정말 갈 수 있겠어???


이내 처음으로 만족스런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보면 비교적 수수하지만 첫 눈엔 감탄사를 연발했던 모스케네스 선착장 뒷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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