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대신 피를
‘크리스마스이브에 응급실 당직이라니.’
2차 병원 응급실 파견 근무 때였다.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쉬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근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한 달 연속 쉬지 않고 일하는 과도 있었기에, 몸과 마음은 힘들지만 그래도 쉬는 시간이 확실한 응급실 근무를 나는 좋아했다. 공중보건의를 하는 동안 1년간 의료원 응급실을 맡기도 해서 응급실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라서 그런지 응급실은 조용했다.
‘다들 가족 아니면 연인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당시 결혼을 한 달 앞둔 나는 더욱 여자친구가 그리웠다.
환자가 없자 생각이 많아지던 그때, 병원 문 앞에서 붉은 불빛이 뻔쩍였다. 119였다. 곧 문이 열리며 20대 젊은 여자 환자가 카트에 실려왔다.
“모텔에서 넘어져 머리가 찢어진 20대 여자 환자입니다. 의식은 스투퍼(혼미)입니다.”
당시만 해도 119가 사전 통보 없이 무조건 응급실로 왔다.
붉은 피를 보면 공포에 질리기에 언제나 실제보다 많아 보인다. 거기다 이 환자는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피가 뒤엉켜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피비린내와 함께 술냄새가 풍겼다. 생리식염수로 세수는 물론이고 환자 머리를 감겨 상처를 확인했다. 출혈 부위는 뒤통수가 수직으로 10cm가 찢어져 있었다.
모텔. 과음으로 의식이 쳐진 20대 여자. 두부 10cm 열상.
나는 의사인 동시에 형사가 되어 성범죄의 가능성까지 염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보호자로 온 젊은 남자에게 물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한 여자와 달리 남자는 얼굴이 약간 붉긴 했지만 비교적 멀쩡했다.
“어떻게 하다 다친 거예요?”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뒤로 넘어졌어요.”
자신감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더욱 의심스러웠다.
'어떻게 하려고 술을 강제로 먹인 건 아닐까?’ ‘혹시나 모르니까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내 머릿속은 복잡해져 갔다.
그때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가 옆에 있던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빠, 오빠가 왜 날 안 잡아 줬어? 응.”
술에 잔뜩 취한 여자는 혀까지 잔뜩 꼬인 채로 술주정인지, 투정을 부렸다.
‘음..... 남자 친구가 맞군.’
경찰에 신고할 필요는 없어졌으니, 의사의 임무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의사인 나는 환자의 정확한 상태를 평가해야 했는데, 여자는 말뿐 아니라 몸까지 흐느적거려 정확한 의식 평가가 어려웠다. 뇌 CT부터 촬영했다. 다행히 골절이나 출혈은 없어, 상처만 봉합하면 되는 케이스였다.
상처는 흉터가 보이지 않는 머리였기에 봉합용 스테이플러로 찍으면 10cm라도 1분도 채 안 걸린다. 하지만 20대 젊은 여자라는 점이 마음에 걸려, 직접 한 땀 한 땀 열 바늘 넘게 정성스레 최대한 선을 맞춰가며 꿰매주었다. 봉합이 끝나자 수액을 달고 술에 깰 때까지 침대에 눕혀 놓았다. 그러자 몇 시간 후, 술이 깨서 멀쩡해진 여자와 머쓱해진 남자 친구는 두 손을 꼭 잡고 119에 실려 들어온 병원 응급실을 두 발로 걸어서 나갔다.
한 커플은 크리스마스이브를 모텔에서 땀이 아니라, 응급실에서 피를 흘리며 보냈다. 그렇게 커플은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이브의 추억을 남겼으며, 의사인 나에게도 안겨주었다.
한 정치인이 이마가 8cm 찢어져, 응급실 22곳에서 거절당했다는 뉴스를 듣고 1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시간이 흐르면 기술은 발전하고, 세상은 나아지며, 힘들었던 기억마저 추억이 된다. 그런데 한국 의료는 어떻게 된 것인지 10년 전에 비해 더욱 나빠졌다. 과거의 추억마저 씁쓸해지는 현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