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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Feb 11. 2024

[미식일기] 스모크하우스 앤 펍, 서울

훈연 가득 돼지, 꿀렁이는 한잔, 이(異)세계 펍이 따로 있나

신림동의 원조민속순대타운에서 Y형과 백순대철판볶음으로 오래간만에 만난 회포를 맛있게 풀 수 있었던 김고로는 신림의 별빛거리를 별 헤는 밤처럼 헤매고 있었다.


"형, 저는 이거 다 먹고도 조금 양이 아쉬운데요."


"그래? 나는 이제 공부하러 가봐야 해서 같이 어울릴 수는 없는데."


"괜찮아요, 저는 숙소 들어가는 길에 하이볼에다가 반주 간단히 해서 또 먹고 들어가려고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래도 미안하네."


김고로는 구미가 당기는 안주와 주류를 찾아서 그리 길지 않은 신림의 별빛거리를 수어번을 왕복했다, 일본식 주류와 안주들, 혹은 소주에 전골이나 고기를 곁들이는 식당들, 어떠한 식당이 되었든지 이미 21시가 넘어간 시간이라 밥집보다는 식사 같은 안주와 술을 곁들이는 주점을 찾는 것이 더 쉬운 시간. 이쁜 그녀와 같이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서 숙소에 일찍 들어가도 반겨주는 사람 하나 없는 김고로였기에 그는 더더욱 아쉽게 차지 못한 배로 혼자 잠을 청하러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흐음... 하이볼이나 라거 같은 것이면 좋겠는데, 그래도 혼자서 거나하게 일본식 전골이나 닭튀김을 먹고 싶지는 않아."


어찌어찌 찾아낸 동네 닭꼬치 집을 잠시 기웃거렸지만 만석이라서 입장을 하지 못한 김고로는 숙소가 있는 어느 행정복지센터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숙소 근처의 식당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오, 식사 종류를 먹으면서 한 잔 할 수 있는 한식집이네?'


숙소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서 동네의 작은 술집 겸 식당을 하는 곳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걸음을 옮겨 가봤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임시 휴업합니다-


"아.... 아쉽네, 진짜 근처에 뭐 없을까."


지도앱으로 찾아보니 치킨집이나 족발집, 거기에 편의점 등이 있었지만 치킨이나 족발에 맥주는 너무 거나하고 편의점 안주를 먹고 싶지는 않은 그런 상황.


"어쩔 수 없나, 숙소에 가야 하나.."


그렇게 실망한 고개와 50% 정도는 더 채워야 편하게 잘 수 있는 아쉬운 위장을 부여잡고서 숙소로 걸어가고 있던 중 그의 후각 세포들을 일어나게 하는 그릴과 바비큐의 냄새, 그리고 갈색 벽돌로 된 외관에 하얀색으로 'SMOKE HOUSE AND PUB'이라고 쓰인 식당, 통유리로는 까만 요리사복을 입은 키 크고 훤칠한 식당의 사장이자 요리사로 보이는 분께서 튼튼하고 큼직한 전완근을 내보이는, 소매를 걷어올린 차림으로 커다란 검은색 바비큐 그릴 위에서 짙은 적갈색으로 훈연된 삼겹삽을 진지한 얼굴로 뒤집고 있었다.


'와... 냄새 죽이네. 바비큐를 굽는 모습도 기품이 느껴질 정도야.'


한 번에 많은 양의 고기를 굽는 것이 아닌지라 기름이 타는 검은 연기는 많이 피어오르지 않았지만 내가 그를 보고 있는 가게 외벽의 통유리에 먹구름처럼 묻은 그을림 들을 보면서 이 가게가 생각보다는 오랫동안 이 자리를 유지해 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는 김고로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가게 앞에 나와 있는 메뉴판을 뒤적거리며 가격대를 본다.


"스테이크 세트.... 단품... 어, 가격을 이렇게 저렴하게 받는다고? 와!"


물론 돼지고기였으니 저렴한 가격일지라도 납득이 되는 가격이었지만, 아무리 돼지고기라고 해도 순식간에 환호성이 나올 정도의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가격이라니, 그것도 물가 높은 서울에서. 나는 주변을 돌면서 마지막으로 괜찮은 곳이 더 없는지 확인하고, 가게 안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있는지 확인했다, 다 2인석으로 구성된 식탁에 4팀 정도가 앉아있었다.


'좋아, 믿어볼 만한 상황이군. 간다.'


김고로는 통유리로 된 여닫이 문을 열고는 그 틈으로


"사장님, 한 명인데 식사될까요?"


"잠시만요"


고기를 구우시던 사장님이 홀을 보시던, 아내로 추측이 되는 사장님께 물어보신다. 홀의 상황을 금방 보고 돌아오신 아내사장님께서는


"들어오세요, 저쪽으로 가시면 되어요."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자리를 안내받고는 식당의 벽 쪽을 등지고 가게의 입구와 주방을 바라보면서 앉은 김고로, 메뉴판을 받고는 쓱 둘러본다. 가게 입구에는 바로 그릴과 주방, 바가 함께 있고 그 뒤로 원목으로 된 의자와 탁자들, 갈색 벽돌과 네온사인과 영화 포스터로 꾸며진 벽들, 가게 안쪽은 각종 주류가 가득 담긴 냉장고의 형광등 빛이 뿜어져 나오고 나는 노란 조명 아래 나의 그림자가 맞은편에 앉은 식탁에 함께 앉아 주문을 한다. 강릉이라는 다른 차원에서 '서울'이라는 이(異)세계의 술집으로 잠시 끼니를 해결하러 온 미식가 김고로가 된 기분이다.


메뉴판을 보아하니 주력 메뉴는 그릴에 구워낸 훈제 돼지고기, 그 외에 소고기 스테이크와 감자를 튀겨낸 안주 등.


"좋았어, 목살스테이크를 샐러드랑 감자튀김을 곁들인 세트로 먹고 거기에 삼겹살스테이크를 단품으로 추가해야지."


돼지고기로 된 훈제스테이크를 주문한 김고로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와 와인에 눈이 돌아간다.


"오, 레드와인이 있네! 고기에는 레드와인이지. 저렴한 잔와인이라서 가격도 착하네."


평소에는 잡곡과 물, 두부로 된 식물성의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는 김고로이기 때문에 술은 거의 마시질 않지만 그릴과 훈연이 가득한 적갈색 벽돌 펍의 분위기와 휘말려 훈제 돼지고기 스테이크에 적와인까지 잔으로 시켜버리는 엄청난 사치를 즐긴다. 훈제 돈육, 와인, 이건 김고로의 생일날인 것이 분명하다. 김고로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주문을 시작했다.


"선생님, 여기 목살스테이크 세트에 삼겹살 단품 추가 가능할까요?"


"그럼요, 그렇게 드릴까요?"


"네네, 그리고 거기에다가 레드와인도 잔으로 추가해 주세요."


"네, 잠시만요. 와인이랑 기본 샐러드부터 먼저 갖다 드릴게요."



주문이 접수되고 잠시 후 유리 와인잔의 아래쪽을 가득 채운 빛나는 레드와인과 양배추와 옥수수가 새콤달콤한 유지방에 버무려진 코울슬로가 하얀 자기 그릇에 조금 담겨 나온다. 나와 함께 와인잔을 부딪칠 사람은 없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짠'을 외친 후 입을 헹구듯이 후루루룩 와인을 들이키며 김고로는 서울 신림이라는 이(異)세계에 있는 스모크하우스 앤 펍에서 만찬을 시작한다. 그릴이 있는 곳에서 약간의 연기와 고기를 굽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매끈하고 어두운 갈색 나무 그릇 위에 구워진 고기, 샐러드, 감자튀김이 정돈되어 나온다.


'아아, 구워진 돼지고기를 보면서 설레었던 적이 생애 첫 삼겹살을 먹었을 때 이후로 오늘이 처음일까.'


와인으로 다시 한번 입을 헹구고 김고로는 기름기와 지방이 상대적으로 적은 담백한 부위인 목살부터 칼과 포크로 공략을 시작한다. 고기 겉면의 거칠거칠한 느낌을 칼로 느끼면서 튕기면서도 부드럽게 속살이 썰리는 돼지고기, 칼을 통해서 전달되는 촉감이 나를 더욱 안달 나게 한다. 잘 썰려진 목살 한 조각을 입안에 넣고서 어금니가 첫 키스를 하게 해 준다.


왼쪽부터 삼겹살, 바베큐소스, 목살, 샐러드, 감자튀김, 케첩


탱글탱글 우적우적


혀와 치아에 닿으며 먼저 느껴지는 것은 훈제 고기 특유의 짭짤함, 그리고 입천장과 목젖을 스치며 코로 올라오는 훈연의 향긋함.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서 고기의 식감을 온전히 느꼈다.


탄탄하게 씹히고 접히면서도 탱글거리는 속살과 바삭한 겉면의 조화가 나의 고개를 저절로 끄덕이게 한다.


'저절로 눈이 감기는군, 환상이네. 아름다운 돼지고기야.'


훈제 목살 스테이크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서 돈가스를 먹으며 음악이 들리자 '이 아름다운 곡이 무슨 곡인가요?'라고 물은 소개팅 여성에게 '돼지고기요.'라고 답했다는 어느 남성의 유머가 생각나는 목살스테이크의 첫 입이었다. 그렇다, 스모크하우스 앤 펍에서 무엇이 아름답겠는가? 돼지고기가 아름답다. 드레싱으로 버무려진 샐러드를 한입, 감자튀김을 또 한 입 먹고 나는 목살을 다시 한 점 먹으며 즐거운 환상곡을 계속한다. 씹고 또 씹는다, 튼튼하고 맛있는 고기다.


'목살이지만 훈제로 익히고 다시 그릴에서 구워낸 것이라 질기지 않아. 씹을수록 치아 사이에서 고소한 육즙과 연기가 터져 나오네, 이거 목살부터 이렇게 맛있으면 삼겹살은 얼마나 더 맛있을까.'


내가 한창 목살 덩어리들을 순식간에 먹어치우며 샐러드와 감자튀김의 반이 사라졌을 무렵, 옆에 있는 커플이 맥주를 새로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저희 XXXX 맥주 주세요."


"XXXX요? 혹시 이걸로 마지막 맥주 할 거예요?"


"네? 그건 아닌데요."


주문하려는 맥주가 마지막이냐고 묻는 아내 사장님의 말에 맥주를 주문하는 젊은 남성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내 사장님이 웃으며 말하길,

"XXXX는 맛이 진하고 강해서 마시고 나면 다른 맥주들은 맛이 하나도 없으니, 다른 것부터 먼저 드시고 이거 마지막에 먹어요. 그게 훨씬 맛있어요."


"그래요? 그러면 뭐가 나을까요?"


"OOO 먼저 마시고 그다음에 그거 마시면 좋죠."


그래도 내가 이 가게에 있는 모든 술은 다 마셔봤다는 자신 넘치는 맥믈리에의 말씀에 주문을 수정하는 모습. 그리고 고기를 굽거나 요리를 하지 않는 시간이 잠시 생기자 주변에 먼지가 쌓일 만한 네온사인이나 주방기구들의 먼지를 닦아내는 남자사장님의 모습을 보면서 왜 이곳이 맥주 한잔을 기울이려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맛이 있을 수밖에 없는 곳인지 더더욱 신빙성을 갖기 시작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훈제 목살(좌), 훈제 삼겹살(우)


'저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챙기는 사람들인데, 식당에서 제일 중요한 음식은 맛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빙긋 웃으면서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고 다음 부위인 삼겹살로 식사 진도를 나간다, 칼로 자르는 감각부터 목살보다 더 튕기는 듯한 느낌이 자신은 목살보다 훨씬 더 맛있을 것이라는 예고를 하는 훈제 삼겹살.


"삼겹살, 무슨 맛이려나."


혼자서 중얼거리는 김고로, 비계와 살코기로 층층이 쌓인 삼겹살을 포크와 칼로 한번 접고 잡은 후에 입으로 지체 없이 배송한다. 목살보다 더 쫄깃하게 씹히는 살코기들 사이로 기름지고 고소한 살코기 사이의 비계와 바삭하게 씹히는 겉면의 비계가 목살보다는 더 풍부한 식감에 유연하게 치아 사이에서 춤추는 무희가 되어 움직인다.


아름다운 삼겹살 스테이크


'와, 이게 돼지고기라고? 이렇게 맛있는 고기가 돼지고기라고?'


입안에서 터지는 육즙과 비계와 훈연향과 짭짤한 염분의 쿼텟 환상곡 연주에 쌉쌀함과 촉촉함으로 적와인이 마무리를 더하자 눈을 감은 김고로의 행복한 고개 끄덕거림은 멈출 줄을 모른다.


'돼지고기가 이렇게 맛있다면, 소고기는 얼마나 더 맛있는 걸까?'


마지막 한 조각,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지방과 살코기가 서로 식감과 염분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호흡과 균형을 잡아가며 길고 강하게 남는 육즙의 맛, 김고로는 이미 한국의 서울이 아닌 환상 소설 속 '신림(神林)'이라는 요정족들이 모여사는 마을 근처의 어느 작은 펍에서 잠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들렸다가 꿈과 같은 낭만적인 식사를 홀로 즐기는 미식여행가가 된 지 오래다. 쫄깃한 살코기가 짭짤하게 씹히다가도 지방이 치아 사이에서 팍 터지며 고소한 기름을 내뿜고 잠시 동안 그 맛을 즐기면서 고기를 삼키는 재미, 두툼한 삼겹살을 불판에 구워 먹는 것과는 또 다른 미식의 즐거움이 김고로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다 먹었으니 일어나 볼까. 이렇게 홀로 행복했던 식사는 오랜만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 사장님께 카드를 건네며,


"돼지고기가 이렇게 맛있을 줄 알았으면, 소고기 먹을 걸 그랬어요."


어떤 의미의 칭찬인지 금방 이해하신 사장님들은 활짝 웃음을 터트린다, 주방에서 요리하시던 남자사장님은


"우리 집은 돼지고기가 더 맛있어요."


"우와, 그래요?"


"네, 제가 돼지고기를 더 좋아하거든요."


"돼지고기 추가로 더 먹기를 잘했네요, 이 동네 잠시 왔다가 우연히 들렸는데 정말 잘 먹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네, 조심히 가세요~"


가게를 나서며 다시 달빛과 별빛이 쏟아지는 신림동의 거리를 걸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숙소로 약간 알딸딸한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김고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쁜 그녀랑 꼭 한 번 와야겠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고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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