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로의 글을 여태까지 읽어오신 독자님들이라면, 김고로라는 사내가 강릉에 있는 어느 식당을 곧잘 가며 어느 사장님과 친밀하게 지내는지 이미 알고 있으리라 본다. 주변인들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신 분은 강릉에서 피자펍 '샌마르'를 운영하시는 일명 '피자대장'님. 재작년부터 시작되었던 그저~ 맛있는 음식이라면 안 먹어보고 못 지나치는 단골손님인 피자광인 김고로와 피자에 진심을 담는 피자대장의 '월간 식도락'은 가끔 인원이 추가될 때도 있지만 주로 둘이 떠나는 조용하지만 부지런히 먹는 여행이다.
둘의 거주지가 강릉인 고로, 강릉이나 영동지방의 맛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는 편이나 김고로의 연차와 피자대장님의 휴일이 같은 날로 맞아떨어지는 어떤 날에는 강릉이 아닌 타 도시로 식도락을 떠나기도 한다. 여태껏 속초, 양양, 원주 등 강원도에서만 돌고 돌았던 그들의 식도락은 피자대장님의 지인이자 같은 업계에 몸담고 있는 다른 업장의 사장님들을 만나는 일정과 맞물려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여전히 습하고 더운 9월의 어느 날이었다.
"대장님, 우리 처음 가는 곳이 쌀국숫집이라고 하셨었나요?"
"네, 제가 아는 베트남 쌀국숫집 대표님이에요."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호앙비엣이요. 지금은 종로에 점포를 새로 열었다고 하셔서, 오늘은 거기로 갈 겁니다."
"종로... 5가에 있네요? 그 라디오 광고에 나오는 유명한 종로 5가 ㅂㄹ약국 있는 곳이잖아요? 큭큭"
"허허, 그렇네요."
종로 5가라는 말을 들으니 어릴 적부터 라디오를 들으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그 손녀와 할머니의 대화로 광고를 하는 종로 5가의 그 약국이 문득 생각나 무언가 웃긴 김고로였다. 서울역에 내려 종로 5가까지 편안하게 이동을 하기 위해 택시를 잡은 피자대장님의 은덕으로 호앙비엣 종로점이 있는 골목 앞으로 편하게 이동한 그들은 둘 다 종로 5가의 골목이 처음이기에 지도를 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어, 저기 있네요. 딱 봐도 베트남 노점상인데요?"
붉은색 배경에 흰 글씨로 베트남어로 쓰여 눈에 탁 뜨이는 강렬한 간판과 어닝 앞에 베트남의 해안가에서 볼 수 있을 만한 파라솔과 현지의 길거리에서 가져온듯한 입간판에 메뉴의 사진들, 큰 글씨로 박혀있는 베트남에서 쌀국수를 뜻하는 'PHO'라는 글씨, 가게 앞에 나열되어 있는 스테인리스 테이블과 붉은 난쟁이 의자들이 저녁에는 야외테이블에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만 이 골목에서 베트남이네요."
"진짜 현지 점포 같은데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깔끔하면서도 반팔과 반바지로 일하기 편한 복장을 입으신 대표님이 피자대장님과 김고로를 반긴다.
"아, 오셨어요? 시장하시죠?"
호앙비엣의 대표님은 대장님과 김고로를 안쪽의 편한 자리로 안내해 주시고는,
"그런데 이거 어떡하죠, 우리 집은 쌀국수가 진짜배기인데. 지금 쌀국수 육수 남았나요?"
스테인리스 기구들과 희고 깔끔한 플라스틱 식기류들, 식재료들 너머로 베트남인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계신 한국인 점장님께 사장님이 물으니 곤란한 웃음을 지으시는 점장님 왈,
"아뇨, 점심때 쌀국수 육수가 다 나갔어요. 죄송해요."
"음... 아쉽지만... 그러면, 넴이랑 반쎄오에 분팃느엉 두 그릇 주세요."
그렇게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김고로는 매장을 한눈에 담으려 고개를 휙 돌리며 이것저것을 살펴본다. 하늘색 벽에 흰색 벽,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들과 에어컨, 벽에 붙은 거울과 번호표, 식기류들과 식기류를 꽂는 통, 난쟁이 의자와 가게의 통창문 아래에 자리 잡은 플라스틱 재질의 식탁보, 식탁마다 올려진 온갖 베트남식 조미료들 그리고 부엌에서 소곤소곤 들리는 베트남 직원분들의 대화. 그저 손님과 사장, 점장님들만 한국 사람들이지 베트남 현지에서 한국인들에게 인기 많은 지역에 열린 베트남 쌀국숫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고로가 여러 가지를 관찰하자 사장님도 눈치를 채셨는지,
"여기 직원분들도 다 베트남분들이고요, 벽에 붙은 번호표나 기구들, 식기들 등등 다 베트남에서 가져왔어요. 그리고 쌀국수에 사용되는 육수도 베트남 현지 공장에서 가져오는 거고요. 이 쌀국수에 들어가는 쇠고기 육수를 드셔보셔요 하는데, 안타깝네요."
사장님이 몇 번이고 추천을 하시는 그 쇠고기 육수의 맛은 어떠한 맛일지 김고로는 그 말에 위장에서부터 점점 고기를 들어 올리는 시장기를 참지 못하고 입맛을 계속 다시니 입술이 번들번들, 반짝반짝거릴 정도다. 옆에서 피자대장님과 사장님이 음식 사업과 이런저런 일적인 얘기를 하실 때에는 얌전하고 조용히 기다리는 반려견처럼 있다가도 호앙비엣의 사장님께서 김고로에게 스몰토크로 지루하지 않게 매너를 갖춰 말을 걸어주심이 감사한 식객 김고로였다. 그런 모습에서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배려와 예의를 갖춘 사장님에게 조금씩 호감이 가기 시작한 김고로, 사장님께서 주문해 주신 음식이 나오니 음식에 대한 호감을 쌓아가기 위하여 길고 뭉뚝한 젓가락을 집어 올리며 전투적인 식사욕구를 드러낸다.
"일단 튀긴 음식들부터 먹어볼까요. 그런데 이 반쎄오는 어떻게 먹는 게 맛있나요?"
호주에서도 반쎄오를 먹어봤었지만 커다란 오믈렛처럼 나오기에, 조금 더 작은 크기에 라이스페이퍼와 나온 반쎄오를 본 김고로는 사장님께 가르침을 구해본다.
"이 반쎄오는 익히지 않은 라이스페이퍼에 감싸서 스위트칠리소스에 찍어드셔 보세요."
"호오, 알겠습니다. 일단 저는 반쎄오 자체의 맛이 궁금하니..."
김고로는 청개구리처럼 사장님의 친절한 말은 바로 듣지는 않고 (그럴 거면 왜 물어봤냐) 반쎄오를 하나 집어서 맛본다. 달걀물이 익어 미약한 탄산수처럼 부슬부슬한 식감이 입술과 앞니를 통하여 전해진다, 살짝 그을린 솜사탕을 (그런 건 먹어본 적도 없지만) 입술로 뜯어먹는 기분이고 거기에 반쎄오에 들어있던 숙주나물과 잘게 썰린 고깃 조각들이 서걱거리면서 씹힌다. 다양한 식감들의 조화, 적당히 심심한 간을 가진 익은 달걀, 마음에 든다. 그러면 사장님의 말씀대로 라이스페이퍼를 감아서 소스에 찍는다, 김고로.
바삭바삭
".... 오! 이건...!"
"맛이 괜찮으세요?"
"네, 완전히."
생 라이스페이퍼, 익은 달걀, 숙주나무와 고기로 이어지는 세 가지 식감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삼중주를 이룬다. 익지 않은 단단하고 질긴 식감이리라, 하고 생각했던 라이스페이퍼는 반쎄오의 뜨끈뜨끈한 열기와 입안에서 뿜어져 나온 타액에 젖었음에도 불구 꺾이지 않는 와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삭하며 그보다 덜 바삭거리는 달걀과 꺾으면 으스러지는 숙주나물의 사각거리는 식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생 라이스페이퍼가 반쎄오랑 만나면 이렇게 맛이 좋을 거라고 내가 어찌 알았겠어. 현지인들은 이 맛있는 반쎄오, 이걸로 더 맛있게 먹는구나.'
거기에 겉으로만 봐도 맛있어 보이는 넴 (대답이 아니다, 음식 이름이다), 호앙비엣의 넴에는 우렁이를 잘게 썰어 넣어 쫄깃한 식감이 인상적이라는 설명을 식당에 오기 전에 봤었는데 역시 우렁이는 강된장이 아니라 이렇게 튀김의 속에 들어가도 맛이 좋구나.
바사사삭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라이스페이퍼 안에 다진 당면, 당근과 함께 고기처럼 들어간 우렁이는 반쎄오와 마찬가지로 식감과 맛을 위해 계획적으로 설계된 식감의 집합체였다. 우렁이의 튕기는 식감과 말랑거리는 당면, 그 사이에서 '나야 당그은'하면서 고개를 드는 딱딱한 황색 채소의 씹히는 맛이 함께 나온 달콤하면서도 베트남 고추의 매운맛이 죽지 않은 달콤한 소스를 묻히고 입안을 폭격한다. 바삭 트리오 삼중주에 이은 쫄깃 쿼텟 사중주 그리고 못 먹어서 아쉬운 쇠고기 쌀국수의 빈자리를 대신 채운 분팃느엉이 준비한 오케스트라가 준비되었다.
분팃느엉은 베트남의 국민 소스로 알려진 민물고기로 만든 액젓이 기초인 '느억맘소스'를 부어서 말아먹는 비빔 쌀국수. 그래서 주문을 하면 느억맘소스가 찰랑거리는 주전자가 함께 나온다.
"같이 나온 소스를 다 부어서 드시면 되어요."
"넵!"
쌀국수 위에 베트남식의 순대와 같은 짜조, 돼지고기, 상추, 숙주나물, 당근이 (원래 오이가 고명으로 함께 올라가지만 김고로는 오이를 못 먹기에 빼달라고 요청드렸다) 올라간 시원한 쌀국수, 소스를 붓기 전에 그 맛이 궁금한 김고로는 수저에 소스를 조금 따라서 맛본다.
달콤하면서 짭짤함으로 무장한 진득한 감칠맛이 혀에 닿자마자 미뢰사이를 번개처럼 달린다.
'엄청 달아! 그런데.... 맛있어! 뭐지 이거?'
달달한 소스이기에 재료와 쌀국수가 그릇에 넘칠 정도로 담긴 분팃느엉 그릇에 부으면 간이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든 김고로는 일단 위에 올려진 짜조가 눅눅해지는 일은 피해야겠다 싶어 짜조부터 바삭하게 씹는다.
이전에 집 근처에 베트남분이 하시던 쌀국숫집에서 파시던 짜조가 참 맛있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펑 선물상자처럼 터져 나오는, 역시나 기대만큼이나 맛있는 호앙비엣의 짜조. 튀겨진 라이스페이퍼롤 안에 육즙과 가득 들어찬 다진 고기가 씹을 때마다 고소하며 기름진 액체로 입안을 적신다. 튀겨진 탄수화물과 육류는 언제나 옳다는 사실이 오늘도 입증된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면을 공략해 볼까.'
후루루루룩
아사사삭
달콤한 소스를 몸에 감싼 탱글거리는 쌀국수의 맛과 식감이 입안에 가득, '꿀벌집을 어금니 사이에 쑤셔 박은 맛이야'라고 느낄 때쯤, 사각거리는 채소들과 베트남식 돼지고기구이가 볼 양쪽에서 들이닥쳐서는 경찰특공대처럼 단맛을 체포해 간다. 거기다가 역시나 베트남식 액젓을 기본으로 삼은 소스인 이유인지 흔들리지 않는 감칠맛으로 계속 입을 잡아당긴다. 단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김고로이지만 평정심을 잃은 시장기와는 별개로 소스가 묻은 쌀국수와 재료들을 야무지게 섞어서 양볼에 견과류를 양껏 채운 햄스터만큼 입에 넣고 눈을 감고 씹는다.
말캉거리는 쌀국수 사이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단맛의 금관악들과 사각거리는 채소들의 현악, 그리고 군데군데 섞여 들어온 땅콩알갱이와 돼지고기가 함께 맞물려 펑펑 터지는 고소함의 타악이 한 그릇의 지휘자 안에서 아름다운 연주를 이어간다. 달달하고 시원한 쌀국수라서 그런지 더운 여름날에는 더욱 꿀맛이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다음에 또 오시면 꼭 쇠고기쌀국수를 먹어보시길."
"물론이죠."
호앙비엣에서 사장님이 내어주신 음식을 만족스럽게 먹은 김고로와 대장님은 다음 식도락 목적지를 위해 다시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