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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일기] 미성식당, 강릉

튼실하고 꿈틀거리는 낙지가 당신의 멱살을 잡고 매콤하게 식탁 앞으로

by 김고로

"오늘 포남동에서 점심 먹었는데, 먹을 때는 그렇게 맛있다는 느낌은 아니었거든, "


"그랬구나, 뭘 먹었는데?"


더위가 어둠이 함께 깊어져 에어컨 없이는 한시도 버티기 힘든 어느 여름날 밤, 바깥에는 장마와 함께 온 폭우로 인하여 물방울 소리가 빗발치는 그런 밤, 김고로와 함께 자리에 누운 이쁜 그녀가 그날 다녀온 어느 식당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낙지볶음 먹었어. 식당에서는 엄청 맛있거나 그런 게 아닌 그럭저럭... 그냥 먹을만하네, 이런 맛이었는데, "


"음음.. 그랬구나, 그래서?"


"집에 와서 너랑 자려고 자리에 누우니까 괜히 그 맛이 생각나네."


"호오... 그 집 의외로 매력적인 집이구나."


"응, 맞아. 집에 와서도 뜬금없이 그 낙지볶음이 생각나서 한번 더 먹으러 가고 싶어."


이쁜 그녀는 김고로처럼 일부러 식당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입맛과 미식관이 있다, 그녀가 맛이 괜찮다고 하면 대체로 괜찮은 식당인 편이 많았기에 김고로는 그녀의 입맛을 믿어보기로 한다.


"그래, 그럼 또 언제 갈까?"


"음..." 잠시 생각하던 이쁜 그녀는 "오는 토요일에 점심 먹으러 가자."라고 하며 남편과의 즐거운 점심 데이트 약속을 잡는다.


그리고 토요일. 그 전전날인 목요일 저녁부터 시작되었던 비는 도망자를 추적하는 사냥꾼처럼 추적추적 그치지 않고 내려, 점심때가 다 되었지만 어느 날의 저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우중충하다. 하지만 날씨는 우리에게 큰 문제가 아니다, 맛있는 점심을 먹겠다는 강한 의지만 있다면.


강릉의 송정, 안목 등 이름난 해변으로 가는 길목에 E로 시작하는 커다란 대형마트 근처에 포남동이 있고, 포남동에는 옛날부터 술꾼들과 미식가들에 의해서 형성된 먹자골목이 있다.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붐볐을듯한 골목은 주말인 토요일 점심에는 제법 조용하고 한적하다, 그도 그럴 것이 떠들썩한 관광객들은 이런 골목의 식당들을 찾지 않으니, 이런 곳은 지역 주민들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가게 앞에 도착하니 골목 안의 작은 공원이 있고 하얀 간판에 미성식당이라는 큰 글씨, 글씨의 좌측 상단에 조그맣게 사장님의 성함인 '정유진'이라는 이름이 곁들여져 있다. 그러면 이 식당의 이름은 '정유진 미성식당'이 되는 건가. 김고로는 편의상 이 집을 '미성식당'이라 부르기로 한다.


1층은 대리석으로 꾸며진 외관이지만 2층부터는 갈색 벽돌과 같은 타일로 꾸며진 건물, 2층과 3층은 월세를 주면서 사는 집으로 보이고 그 건물의 1층에 식당이 자리 잡았다. 식당 창문에는 '추어탕 전문'이라는 글씨가 크게 붙어 있어서 추어탕 전문점을 강조한다. 김고로와 이쁜 그녀가 유리문을 열고서 들어가니 이미 한구석에 은색의 작은 추어탕 솥을 가운데에 두고서 식사를 하고 있는 팀이 있고 메뉴에는 추어탕과 낙지볶음만이 있다, 곁들임 메뉴로 미꾸라지튀김이 있으니 추어탕도 상당히 맛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김고로.


하지만 금일은 이쁜 그녀가 낙지볶음이 먹고 싶다고 하여 찾아왔으니 얌전하게 낙지볶음을 '중간맛'으로 시켜본다. 김고로가 어렸을 적에, 한때 ㅇㅈ낚지 프랜차이즈를 필두로 하여 매운 낙지볶음에 밥을 비벼서 차가운 콩나물국과 함께 먹는 유행이 일었던 적이 있었는데 '낙지볶음'이라는 메뉴를 보니 김고로는 어머니와 함께 낙지볶음을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났다. 낙지볶음이 상당히 매워서 한 입만 먹어도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어린 김고로는 '맛있다'를 연발하며 낚지메밀전에 밥과 낙지볶음을 싹싹 비워냈었다.


주문과 동시에 주방에서는 고소하면서 매콤한 불맛이 홀까지 흘러나온다. 스테인리스와 강화 플라스틱, 목재 등으로 만들어진 의자와 식탁이 많으면 30명은 조금 넘게 앉을 수 있는 규모의 식당에 스테인리스 주방기구로 된 계산대와 선반들 너머로 화구와 환풍기, 냉장고 등이 보이는 열린 주방이라 사장님의 조리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 열린 주방이라 요리와 동시에 좋은 냄새가 피워지는 광경은 덤.


"반찬 좀 드릴게요."


데친 브로콜리, 채소볶음, 말린 김 등이 놓이는데 무가 얇게 썰린 물김치가 있다.


"여기 물김치 맛있어."


미성식당의 물김치, 치트키다. 김고로는 두번이나 더 채워먹었다.


이쁜 그녀가 마법의 주문을 건다, 김고로가 안 먹을 수 없게 하는 마법의 주문, 김고로는 홀린 듯이 숟가락을 들어 물김치를 퍼올린다. 일반적인 물김치이지만 개운하고 상쾌한 맛에 시원함은 따라온다.


"와, 시원하네, 뭐지? 뭐가 들어갔지? 뭔가 개운한데."


얇은 무조각들 사이로 무언가 어색하게 생긴 굵은 뿌리처럼 보이는 재료가 있다, 잔뿌리들이 듬성듬성 나있는 모양을 보고 김고로가 웃는다.


"생강이었네, 생강 넣은 물김치는 처음인데 잘 어울리네?"


"응, 나도 생강 좋아해서 여기 물김치 계속 먹게 되더라고."


사장님의 손맛이 밴 채소 반찬들을 아삭아삭 씹고 있노라니 널찍한 무쇠팬에 갓 볶아진 낙지볶음이 매콤한 냄새와 고소한 견과류의 향기를 입고 지글거리며 모락모락 김을 덮어쓴 채 등장.

양이 적어 보인다면, 그것은 사진 촬영을 깜빡하고 먼저 반을 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낚지 조각들이 크고 튼실하다, 양배추와 파와 부추와 약간의 양파가 들어갔다. 음식의 자극적인 색채에 비해 냄새는 그리 자극적이지 않고 고소한 참기름의 냄새가 많이 올라온다. 음식을 본격적으로 먹기 전에 먼저 숟가락으로 낚지와 양념을 떠서 한입에 먹어본다.



우적우적


낚지는 토실토실한 생물 낚지, 입안에서 치아의 저작운동과 함께 다시 위아래로 튕기며 살아나는 훌륭한 식감이다. 거기에 밑바닥에 넓게 깔리는 참기름의 고소함으로부터 은근한 매콤함이 고개를 살며시 든다, 그리고 채수로부터 나온 약간의 단맛으로 마무리.


"오오... 담백하면서 고소해, 그리고 끝맛이 은근하게 달달하니 균형이 딱 맞네."


"그래? 나는 단맛은 잘 못 느끼겠는데."


"아마도 양파와 양배추 등으로부터 나온 채소의 단맛이라서 잘 못 느낄 수도 있겠지."


김고로는 잔뜩 기대감을 갖고 스테인리스 주걱으로 이쁜 그녀가 가져가고 남은 낙지볶음을 모두 자신의 밥그릇에 퍼담는다. 여느 낙지볶음 집처럼 미성식당도 낙지볶음을 주문하면 낙지볶음에 밥을 비벼먹기 편한 넓은 그릇에 밥을 주기에 가지런히 쌓인 쌀알들 위로 붉은 천을 펼치고 비비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쓱싹쓱싹


그리고는 고루고루 잘 비벼져 촉촉한 낙지볶음 비빔밥을 입안에 담는다. 밥과 섞여도 양념이 넉넉하기에 간이 옅어지지 않는다. 양념만 먹었을 때 느꼈던 참깨의 고소함과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계속 입안을 쐬는 친절한 매콤함이 고슬 거리는 쌀밥과 함께 혀와 입안을 구석구석 적셔간다. 탱글거리는 낙지가 바삭거리고 사각거리는 부추와 양배추의 상쾌한 식감과 함께 씹히니 치아가 쉴 틈 없이 즐겁다. 거기에 마지막은 채수의 단맛으로 산뜻하게 마무리.


반찬으로 함께 나온 김에 시선을 옮기는 김고로,


"이거 구운 김인가?"


"구운 김은 아니야, 생김인데 낚지랑 싸 먹으면 맛있어."


겉면이 투명하거나 바삭해 보이지 않으니 구운 김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낙지볶음과 먹기에는 간이 되어있지 않고 구워지지 않은 김이 더 좋다. 구운 김이라면 단단한 질감 때문에 밥을 싸면서 부서질 테니, 질긴 생김을 내어주는 사장님의 탁월한 감각.



김고로는 생김을 손바닥에 올리고 숟가락으로 낙지 비빔밥을 올린다. 김 표면에 뚫린 구멍들이 있기에 완벽한 방수가 되지는 않으니, 김고로의 손바닥에 낚지 양념이 조금 묻기는 했지만 그래도 젓가락보다는 손으로 싸 먹는 맛이 더 원초적이고 좋지 않은가.


찹찹


바삭한 구운 김에 비해 생김은 조금 더 튼튼하게 서로가 엮여있기에 살짝 질기고 쫄깃한 김주머니가 찢어지며 고소하고 매콤한 낚지와 쌀알, 채소들이 와르르 혀 위로 쏟아져 양 볼을 가득 채운다. 양념의 맛이 강하지 않고 각자의 식감과 맛을 살려주는 역할만을 하기에 김고로에게 미성식당의 낙지볶음은 더 맛있다.


각각의 재료들과 양념, 생김과의 조합까지 맛을 본 이후에 김고로는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껏 음식을 즐긴다. 중간중간 상큼한 생강물김치로 입맛을 새롭게 해 가면서 김을 싸서 먹으니 식탁에 올라와 있던 김은 이미 바닥을 보인 지 오래고, 숟가락으로 마구 퍼먹는 낙지 비빔밥을 즐기는 김고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입안에서 울리는 채소와 낚지의 식감, 그리고 양념의 협주가 감동스러움을 표현한다.


그렇게 식사를 즐기고 있으니 곧이어 몇 팀이 더 들어온다, 김고로와 이쁜 그녀처럼 낙지볶음을 먹기보다는 추어탕 주문의 연속이다.


"다음번에 오면 추어탕을 먹어봐야겠네."


"그러게, 여기 원래 추어탕 집이구나."


즐거운 식사를 마친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러 큰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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