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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일기] 평양냉면, 춘천

춘천의 평양냉면이 이렇게 맛있을 리가 없어

by 김고로

전날 춘천 풍물시장의 타코 보이의 타코에 이어서 이쁜 그녀의 집에서는, 장인장모님의 배려 덕분에 김고로는 난생처음으로 송편을 빚어보는 체험도 할 수 있었다. 사위가 송편을 한 번도 안 만들어봤다는 소리에 일부러 송편을 위한 떡반죽을 준비해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 송편을 빚는, 추석에 걸맞은 가족의 시간이었다.


다음 날의 점심 식사는 장인어른께서 곧잘 가시는 노포를 가자고 말씀하셨다.


"거의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이야, 춘천에서도 손에 꼽게 오래되었지."


"무슨 집이에요?"


"평양냉면집, 맛이 심심해."


"평양냉면 좋지요, 서울에서도 먹어봤는데 저는 좋았어요."


평양냉면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이쁜 그녀도 기대를 조금 했는지, 맛이 궁금하다며 함께 춘천의 '평양냉면'으로 향했다. 하지만 김고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슴슴한 평양냉면은 이쁜 그녀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것임을. 이쁜 그녀는 막국수도 조금 더 새콤달콤하고 매콤 짭짤한 입맛이기에 이쁜 그녀가 평양냉면의 육수를 한 모금 마시고는 좋지 않은 소리를 하는 모습이 이미 그려졌다.


춘천의 도심지에서 벗어나 외곽으로 소양강을 따라서 차를 타고 조금 달리니 금방 금일의 목적지인 '평양냉면'에 도착한다. 한눈에, 누가 봐도 '참 오래되었겠네'라고 생각 드는 가게 앞 작은 마당은 손님들을 위한 주차장. 입구에는 꼿꼿하게 몸을 일으켜 세운 붉은 바탕에 굵은 흰색 글씨로 '평양냉면'이 쓰인 간판이 손님들을 맞이한다.


마당 안으로 들어가면 직사각형, 가로로 쭉 뻗은 냉면집이 눈에 들어온다. 샛노란 색으로 칠해진 벽에 푸른 페인트가 칠해진 현대식 기와, 그 위에 다시금노란색으로 빛나는 한자로 쓰인 '평양냉면'. 입구는 하얀색 현대식 새시로 된 미닫이 문으로 되어있다. 손님들을 맞이하는 주 건물 양 쪽에도 구조물들이 있는데, 검은색 천으로 지붕을 씌운 철제 구조물 그리고 창고인지 주거지인지는 모르겠는 건물 하나.


본 건물로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면 주방으로 통하는 좁은 통로의 우측 벽을 마주 보고 빈대떡을 지지는 직원분이 기름이 튀기는 사투를 벌이다가 손님들을 맞이한다. 그가 전을 뒤집고 움직일 때마다 펑펑 피어오르는 고소한 빈대떡의 냄새가 이미 손님들의 식욕을 불태우는 기폭제다.


그리고 그 옆에 바로, 통로의 왼쪽 문을 통해서 형광등이 있음에도 약간은 어두침침하게 느껴지는 평양냉면의 홀에 착석한다. 주변에는 주로 나이가 어느 정도 있으신 어르신들부터 중년의 손님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후루룩' '꿀꺽'하며 평양냉면 삼매경에 빠졌다.


김고로는 평양냉면을 이미 좋아하기에 '곱빼기'를 주문했고 다들 평양냉면 보통을 주문하신다, 거기에 이미 불판 위에서 익어가던 빈대떡도 빠질 수 없다. 홀에 바로 붙은 주방 안에서 물을 끓이는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데, 뜨거운 안개를 타고 구수한 메밀의 냄새가 밀물처럼 밀려온다.


그 전날 먹은 막국수의 순 메밀향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 메밀의 냄새는 언제든 환영이다. 주방 안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여성분들께서 분주하게 돌아다니시면서 냉면을 만들어내고 계셨다.


처음 그들의 식탁에 등장한 음식은 유증이 아직 올라오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황금빛 빈대떡. 곱게 바삭거리는 갈색과 노란 윤기가 겉에서 반짝거린다.



"이미 겉모습만으로도 맛이 상상된다."


"얼른 먹자."


젓가락으로 빈대떡을 여러 조각으로 찢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튀겨지듯 구워진 빈대떡의 겉면이 부서지며 높은 음의 악기와 같은 소리를 낸다.


바삭바삭


치아 사이에서 살짝 단단한 빈대떡의 식감은 곧 미끄러지듯 부드럽고 갓 나온 떡처럼 찰지게 씹힌다. 빈대떡이 어금니에 맞물려 얇은 결로 혀 위로 퍼질 때마다 녹두의 식물성 고소함과 거기 섞인 동물성 지방의 진한 고소함이 혀에 강력한 한 점 찌르기처럼 떨어진다.



맛있는 맛은 눈이 '번쩍' 뜨인다, 빈대떡에서 흘러나오는 기름과 구수함의 맛이 김고로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거기에 바삭함과 사각거리는 부드러움이 뒤섞이는 식감, 아 이 참에 '선주후면'의 법칙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 술도 못 마시는 김고로는 갑자기 막걸리가 당겼지만 크게 참는다.


그릇에 푸짐하게 담겨 나왔던 빈대떡은 여러 사람이 젓가락이 움직이자 밑바닥에 미끌거리는 액체의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다.


"역시 이 빈대떡에는 돼지비계가 조금씩 들어가야 해, 녹두만으로는 그 최고점의 고소함이 잘 안 나와. 식물성의 깔끔함도 좋지만, 나는 이런 비계의 맛이 취향이야."


김고로는 춘천에 도착하자마자 방문했던 어느 막국수 집에서 먹은 콩류만 들어갔었던 어떤 빈대떡의 맛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빈대떡을 다 먹은 이후에 적당한 시간 차로 바다의 파도가 넘실거리듯 넉넉한 양의 육수가 철썩이는 평양냉면이 하얗게 이슬이 내려앉은 스테인리스 사발에 담겨 나온다.


김고로가 먹었던 평양냉면은 서울의 '필동면옥'과 강릉 남항진에 있는 '평진냉면'이 전부라서, 김고로는 평양냉면을 많이 겪었다고 할 수는 없다. 강원도는 냉면보다는 막국수가 주류인 지역이니까. 그래도 평양냉면의 육수의 매력을 깨우쳤다고 생각하는 김고로, 우선 냉면사발부터 들어 올린다, 거칠한 손바닥 주름 사이로 냉면의 냉기가 짜릿하게 서리를 내리는 듯하다. 그리고 육수를,



꿀꺽꿀꺽


매끄럽고 가슴속까지 울리는 시원함 거기에 막국수의 동치미 육수와는 다른 입안 가득히 퍼지는 고기 육수의 진한 구수함이 혀를 타고 들어와 머리를 장악한다.


"와아, 이거지. 이게 냉면 육수지."


김고로는 흡족한 미소가 귀에 걸릴 정도로 크게 웃으며 신이 난 젓가락질을 시작한다. 사발에는 큰 치마저고리를 입고 곱게 앉은 모습의 옅은 회색빛의 면이 육수에 잠겨있다. 냉면 곱빼기, 면 두 덩어리를 젓가락으로 슬슬 누르스름하게 투명한 육수 안에 풀어 젓가락에 돌돌 말아 입안으로 가져간다.


오물오물



전날 순 메밀면을 사용한 동치미 막국수를 먹었던 정족리 동치미 막국수 집의 메밀면과 같은 메밀의 향이 화악, 구름처럼 승화되어 김고로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여기 메밀 함량이 높네요."


그렇다, 강하고 자극적인 맛의 육수가 아니기 때문에 면도 그 식감과 맛이 화려할 필요 없다. 평양냉면은 면이 아니라 육수를 마시는 음식이라고 할 만큼, 육수의 매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기 육수의 맑은 맛에 어울려 주는 수수하고 풋풋한 메밀이면 그만이다.


김고로는 메밀면을 다시 젓가락으로 붙잡아 육수에 샤워를 시키고 빠르게 다시 흡입해 본다. 소금 결정처럼 빛나는 메밀밭의 꽃향기 위로 육수의 소나기가 쏟아지며 점점 혀를 고기의 육향으로 물들인다, 고소함과 구수함이 정선에서 하나로 만나는 북한강과 남한강의 소용돌이처럼.


"음.... 나는 이 맛이 많이 별로야. 다음에 또 오면 비빔을 먹을래."


이쁜 그녀는 '많이 별로'라는 말보다는 냉면 애호가들이 들으면 마음에 상처가 될 표현을 사용했지만, 어찌 되었든, 아무리 남들이 맛있는 음식이라 하여도 본인의 취향이 아니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김고로의 앞과 근처에 앉은 손님들은 모두 신나게 냉면 대야를 들어 벌컥벌컥 육수를 마시며 냉면 육수 파티를 즐긴다, 김고로도 그렇다.



김고로가 발견했었던 평양냉면의 매력은, 처음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느끼는 육수의 맛이 입안에 조금씩 쌓이면서 점점 더 진해지고 진득해지는 고기의 맛으로 변모하는 과정. 거기에 다른 식감과 향을 전하는 소박한 메밀면이 더해지며 그저 차가운 고깃국이 아니라 각 재료의 진수를 담아서 내놓은 훌륭한 요리가 된다는 점.


각자 취향에 따라서 식초, 겨자를 넣어서 조금 더 자극을 더할 수도 있겠지만 김고로의 취향은 간을 하지 않고 냉면을 그대로 먹는다. 이미 춘천 평양냉면의 물냉면은 그 자체로 완성된 요리다.


고기육수를 주로 사용하는 평양냉면이든, 동치미 육수를 부어먹는 막국수이든, 여름이나 겨울이나 계절에 상관없이 답답한 마음이나 풀 죽은 마음에 상쾌하게 시원한 마음 불어넣어 그 입맛을 돋우고 살아가는 힘을 샘솟게 하기는 일반이고 그 영을 즐겁게 하는 것도 일반이라고 김고로는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다시 한번 냉면을 들이켠다.


그리고 남은 쇠고기 편육, 오랫동안 냉면 사발의 밑바닥에 잠수해 있다가 마지막까지 남겨서 먹는다. 주변에 함께 하던 동료들이 점점 사라지는 동안 육수를 빨아들여 그 맛을 간직한 채 차갑게 발견되는 편육이다.


우걱우걱



겉은 탄탄하게 씹히는 질감이지만, 그 속살은 쫄깃하게 씹히며 육질 사이로 그 시간 사이 품어왔던 육수의 맛과 함께 치아 사이에서 찢어지고 터져 나간다. 편육이 조각으로 찢길 때마다 쇠고기의 향이 코로 거품처럼 떠오르며 톡톡 터진다. 육향이 가득한 풍선껌을 먹는 기분이다.


"나는 춘천에 오면 여기 또 오고 싶어. 정말 만족스럽다."


"그래..? 그럼 나는 빈대떡에 비빔냉면 먹으러 와야겠네."


춘천은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였고, 흐린 하늘에 반사된 소양강의 물빛도 옅은 회색이다. 식사를 마치고 가게 앞 도로 너머에 보이는 소양강을 본다, 김고로는 그 회색 빛에 다시 입맛을 다신다.


'소양강의 색채가 평양냉면 육수를 닮았네... 아 육수 또 마시고 싶다.'


다시 와서 또 먹을 것을 다짐하는 김고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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