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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일기] 잔, 강릉

잔잔한 밥집의 '짠!' 한 야수파 커리와 주먹밥

by 김고로

전날부터, 강릉에 인간들에게 '9월의 장마'를 떠올리게 하듯, 갑작스레 쏟아진 비는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3주 동안 이어졌던 기록적인 우기와는 다르게 차박차박 비가 내리는 아침부터 이쁜 그녀와 김고로는 하루를 시작했다.


토요일 점심은 이쁜 그녀가 추천하는 어느 밥집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기도 하고, 마침 김고로가 점심 이후에 계속 사람과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일정도 잡혀있었기에, 평소 같으면 집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즐기고 느지막하게 마실을 나갈 그들이지만, 이 날만큼은 그들의 애정하는 바리스타인 구 바리스타님이 계시는 카페에 거의 영업 시작시간부터 출현해서는 늦은 오전부터 커피를 들이켜고는 강릉역 방향으로 향했다.


강릉역 방향으로 간다고 해서, 강릉역 근처를 간다는 말은 아니다, 교동사거리에서 강릉역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낡은 오뚜기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식당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 주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월요일부터 이쁜 그녀가 김고로와 함께 가고 싶다며 김고로의 시간을 선점했기에 김고로도 제법 흥미가 일어난 집이다. 가게의 간판에 상호명은 쓰여있지 않다, 그저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이 직접 그렸다고 추정되는, 식당의 가족 구성원들이 배를 타고 항해하는 그림이 간판이다. 하지만 상호명이 없지는 않다, '잔'이 상호명.


김고로가 직접 가게의 사회관계망을 타고 들어가 보니, 서울의 역촌동에서 제법 오랫동안 영업을 하시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던 가게였으나 미상의 연유로 강릉으로 이주하신 분들이었다.


이전에는 1층에 편집숍, 2층에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던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통유리로 된 벽과 문을 열고 들어가니 늘어지게 수면을 취하던 견공이 크게 짖는다, 암, 자다가 깨면 사람도 동물도 기분이 안 좋기 마련이지. 이쁜 그녀가 사장님들의 반려동물에게 다가가 코인사를 하며 진정시키는 사이에 남편으로 추정되는 분이 우리를 자리로 안내하신다.


천장부터 벽까지 하얗게 칠해진 내부에 간간히 파스텔톤의 인테리어 소품과 나무재질의 가구들, 가게 입구 우측에 바로 보이는 열린 주방. 홀로 식사를 해결하는 분들이 외롭지 않도록 주방을 바라보도록 바짝 붙은 바테이블이 김고로를 유혹하지만 오늘은 이쁜 그녀와 함께 왔으니 둘만의 식탁에 따로 앉는다.


남사장님께서 멋들어진 그릇의 식사처럼 메뉴판을 가져오셔서 주요 메뉴인 커리들, 그리고 생연어를 활용한 음식들을 설명해 주신다. 하지만 이미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어떠한 메뉴를 주문할지 잠정적으로 정하고 왔기 때문에 메뉴 주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약간의 매콤한 고추가 곁들여진 토마토커리, 그리고 온순한 맛의 크림커리. 거기에 우동, 밥, 파스타 중에 하나를 곁들일 수 있는데 김고로와 이쁜 그녀 둘 다 우동을 택했다. 맛이 좋은 커리가 나올 예정인데, 카레우동을 어떻게 참겠는가.


하지만 그것으로는 김고로의 식사양이 충분치 않으리라 생각한 이쁜 그녀는 거기에 주먹밥을 하나 더 주문하도록 격려한다. 매운 명란마요 혹은 표고버섯과 문어가 들어간 주먹밥, 매운 명란마요는 무언가 맛이 아는 맛일 거라고 생각이 되니 김고로는 생전 처음 보는 조합인 표고버섯과 문어를 택한다.


'잔'의 연어와 크림치즈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애피타이저 겸 연어와 크림치즈롤이 나오고, 씻은 묵은지와 표고버섯과 달걀이 들어간 일식 된장국도 등장한다. 그렇게 잠시 수저를 움직이며 있다 보니 진한 향신료의 향을 풍기며 우동이 잠긴 커리가 길고 깊게 오목한 커리 접시에 담겨 등장한다. 연이어 거뭇거뭇한 조각들이 표면 구석구석에 박힌 커다란 주먹밥도 상 위에 오른다.


"주먹밥은 숟가락으로 퍼서 드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맛있게 식사하는 법을 터득한 김고로는 앞에서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음식들에 눈을 돌린다.


길게 갈려진 파마산 치즈 사이로 보름달과 같은 달걀노른자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 그 위에는 매콤한 고추 플레이크, 그리고 루꼴라가 곁을 지킨다. 그 아래로는 다져진 파가 소복하게 눈처럼 한 곳에 앉았다. 거기에, 커리 표면 위로 둥실 떠오른 토마토 조각은 파도 위에 떠오르는 붉은 부표.


'잔'의 토마토커리 (좌) / 입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크로켓 (우)


"노른자가 먼저 익어버리지 않게, 먼저 풀어야겠네."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젓가락을 들고 분주히 움직여 달걀노른자를 휘져어 더 액체화시키고 우동과 커리사이에 비벼준다. 조금 더 고소하고 진득한 맛에 공헌하지 않으려나.


그리고 김고로는 숟가락을 들어 카레를 한 스푼 크게 떠서 맛을 본다. 매콤함이 잠시 톡 쏘더니 중후한 저음처럼 낮게 깔리는 시원한 향신료의 파도가 덮쳐오고 토마토의 새콤한 감칠맛이 그 사이에 다른 맛들보다 먼저 미각을 잠식한다. 커리의 불 같이 뜨거운 맛과 거기에 어우러진 토마토의 상큼함이 그저, 압도적이다.


'호오, 한 순간에 미각세포를 휘어잡는 강력한, 강렬한 풍미. 구미를 당기는 정도가 아니라 멱살을 잡네.'


김고로의 수저에 시동이 걸리기 충분한 맛이다, 젓가락으로 우동면을 잡고서 커리국물에 여러 번 담가 향신료의 맛을 듬뿍 묻혀낸다. 그리고 끈적한 그 갈색의 미미(美味)가 흘러내려 사라지기 전에 살짝 더 감아서,



후루룩


면치는 소리를 크게 내고 싶지 않지만 이 우동과 커리의 조합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조합이다. 가능한 빠르고 힘 있게 흡입하며 커리우동을 입안에 담아낸다.


찰랑거리는 우동의 면발을 내부에 응축해 낸 깊은 상쾌함과 이국적 향신료의 개운한 매콤함이 꿈틀거리는 면과 함께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김고로의 구미를 계속 잡는다. 그러고 나서 반찬으로 곁들여진 하얀 묵은지를 아삭아삭 씹는, 김고로.


사각사각


오랜 세월을 간직한 묵은지가 달콤함과 시큼함을 씹을 때마다 터트리며 이전에 묻었던 풍미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만큼 놀란 혀를 가라앉힌다. 한쪽으로만 쏠릴 수 있는 입안의 분위기를 초기화시켜 주니 그다음 먹는 커리의 한입이 한층 더 살아난다.


반찬으로 나온 씻은 묵은지


"이 씻은 묵은지가 요물이네. 커리와 잘 맞아."


그리고 흑과 백으로 구분된 문어표고 주먹밥, 문어와 표고버섯 조각 외에도 얇고 짧게 채쳐진 다시마가 함께 들었다. 한 숟가락을 푹 퍼서 맛을 본다.


우적우적


압도적인 짭짤함과 고소함이 폭탄처럼 터진다, 그전에 먹은 커리는 잊으라며 다시마와 표고를 씹을 때마다 참기름의 연막이 퍼지고 간장소스로 입안을 세척한다. 혀 한가운데 벼락이 꽂히듯 감칠맛의 깃발 아래에 간장과 참기름이 침샘을 터트린다.



"이게 다시마라고..? 와우."


다시마는 국물을 낼 때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삶은 다시마도 먹지 않는 김고로지만 '잔'에서 주먹밥에 넣은 다시마는 그의 다시마에 대한 고정관념을 박살 내는 맛이다. 문어의 쫄깃한 탄력에 꼬독거리는 식감을 더하며 감칠맛은 당연하다, 다시마의 그 맛이 어딜 가랴.



고슬 거리는 밥알에 활어처럼 튀어 오르는 표고버섯, 문어 그리고 다시마, 그 사이에 진득하게 짠맛과 참깨의 풍미를 담아내는 매끄러운 마요네즈.


첫 수저부터 강렬한 커리와 주먹밥의 조화는, 김고로를 손쉽게 압도했다. '힘과 파괴만이 정의'라는 어느 우스갯소리는 음식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김고로였다.


사장님께서 서비스로 내어주신 올리브오일과 후추가 끼얹어진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김고로는 입과 혀를 달콤하게 식혔다.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식사의 시작과 마무리가 완벽하니, 바깥은 아직 비가 다 그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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