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국의 대표 음식은 심심한 개운함
김고로와 이쁜 그녀가 시내에 나갈 때 곧잘 통하는 임당동의 어느 골목에는 오래된 옹심이집이 하나 있다. 한정식으로 이름이 나서 항상 사람이 북적거리는 '서당골' 맞은편에 눌러앉은 그 골목 터줏대감인데, 신기하게도 김고로는 그곳이 그리 끌리지는 않았다.
사실 가게가 끌리지 않았다기보다는, 강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옹심이'라는 음식이 김고로에게는 그렇다. 강릉에 옹심이로 이름이 난 집들이 몇 있지만 김고로는 그중에 거의 1곳이나 가봤을까. 그것도 지금은 폐업한 집 앞의 옹심이집, 매우 훌륭한 옹심이를 판매하는 곳이었고 사람도 꽤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더 이상은 먹을 수가 없다. 그 외에는 그리 감흥이 없어 집 앞의 옹심이가 사라진 후로는 가본 곳이 없었다.
감자 전분으로 만든 음식을 싫어하지 않는 김고로. 감자전, 감자떡, 감자송편, 감자타르트, 감자수프 등등 다 좋지만 이상하리만치 옹심이는 그다지 당기지 않는 음식이었다.
"저기, 그 서당골 앞에 오래된 옹심이 집 괜찮더라."
어느 평일, 퇴근하고 돌아온 이쁜 그녀가 김고로에게 어느 옹심이 집에 대한 이야기를 툭 던진다. 본인이 먹기에 괜찮다 싶으면 김고로에게 추천하는 고마운 그녀.
"그래? 서당골...? 어디였더라."
"우리 손님 오면 한정식 같이 먹고 했던 식당, 그 골목에 옹심이 집 있잖아. 내 직장이랑도 가깝고."
그 말을 듣고 그제야 머릿속에 전구가 번쩍 켜지는 김고로.
"아, 거기. 그래?"
"응, 육수도 맑고 괜찮더라고. 옹심이도 맛있고."
"음... 그렇구나."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옹심이라는 음식이 한 끼 식사로도 나쁘지 않아서 (이전보다 값은 많이 올랐지만) 김고로는 어느 주말 홀로 마실도 나갈 겸 임당동으로 향했다. 이쁜 그녀가 마침 개인 일정으로 서울로 가버린 날이라서 가볍게 혼자 놀기를 시전 하는 김고로.
반투명 커다랗고 페인트칠이 듬성듬성 벗겨진 철문 뒤로 얇은 철제문과 2층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계단 등 옛날 집의 마당이 보이고, 그곳을 중심으로 양 옆에 식당의 좌, 우 홀이 있다. 좌측에 있는 곳은 지금은 손님이 많이 오지 않는 한 잘 열지 않고, 우측을 자주 쓰시는 듯 '오른쪽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오세요'라는 말이 친절하게 안내 중.
반투명 시트지로 메뉴들의 이름과 꾸며진 가게의 통유리 미닫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니 좌측 상단에는 벽걸이 텔레비전과 커피자판기, 화분, 거울 등이 일반 동네 식당처럼 있고 정면은 부엌으로 가는 문이 빼꼼 보인다. 우측은 의자와 테이블에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자리인데 관광객으로 보이는 손님들 한 팀과 홀로 먹는 어르신과 여성분이 식사 중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혼자 온 김고로도 입구 근처 두 명을 위한 테이블에 틀어박히듯 앉아서
"선생님, 여기 옹칼(옹심이칼국수) 하나요."하고 단골손님인 듯 주문한다.
앞치마를 단정하게 입으신 두 여성분과 흰색의 위, 아래로 착장을 한 깔끔한 복장의 남성분이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틀어져 있지 않던 텔레비전이 김고로가 오면서 함께 켜지며 익숙한 공영방송의 뉴스 시그널과 함께 세계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강릉의 옹심이 집에서 그게 대수랴.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필요한 백색 소음 혹은 배경 음악에 지나지 않는다.
옹심이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이 아니라, 이제는 뉴스가 아니라 국악한마당에서 판소리가 나올 때 즈음에는 김고로 앞에 옹심이가 메밀칼국수와 함께 스테인리스 그릇에서 둥둥 떠다녔다.
김고로는 우선, 반찬으로 나온 물김치와 넓적하고 얇은 나박김치를 맛본다.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물김치는 시원하고 개운하며, 고춧가루가 들어간 나박김치는 겉이 흐물흐물할 정도로 부드럽게 달콤하게 익어 새콤하기까지 하다.
'슴슴한 맛의 옹심이와 잘 어울릴 한 쌍이구나.'
김고로는 뜨거운 옹심이 육수를 맛본다, 맑지만 감자전분이 섞여 끈적하게 흐르는 질감이 미끌거리며 김고로의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후루룩
'고기 육수는 아니고, 멸치가 들어가지도 않았네. 다시마 육수가 주 재료네, 육수가 튀지 않고 좋다.'
옹심이칼국수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감자로 반죽한 옹심이와 메밀칼국수면이다. 감자와 메밀, 듣기만 해도 개성이 강한 맛이 있는 재료가 아니고 고소하고 쫀득한 맛과 점점 입에 쌓이는 원재료의 맛이 중요하기에 육수의 맛이 강하면 옹심이가 아니라 '맛있는 육수에 감자와 메밀을 넣은 국'을 먹는 꼴이기에 육수는 눈에 띌 정도로 강한 맛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게, 옹심이에 대한 김고로의 지론이다.
김고로는 다시 여러 번, 옹심이 육수를 마신다. 계속해서 입안에 쌓이는 다시마의 감칠맛과 감자 전분에서 흘러나온 고소함에 감칠맛까지 더해져 김고로의 구미를 계속 잡아당긴다.
부엌에서 가져다주신 여분의 스테인리스 그릇에 옹심이 몇 알과 메밀면을 덜고서 후후 불어 먹는다. 이미 입동이 지난 강릉이라 꽤 추워서 뜨거운 옹심이를 입안에 넣고 '흐허으허'하고 입을 바쁘게 움직이는 동작도 좋지만, 김고로는 입안의 표피를 다 새것으로 갱신시키고 싶지는 않기에 적당히 식혀 먹기로 했다.
서걱서걱
손아귀에 넣어 힘을 주어 만든 감자반죽임을 보이듯 타원형의 반죽에 손가락 마디의 모양으로 움푹 파인 무늬를 입에 넣어본다. 겉으로 보이는 감자의 오돌토돌한 입자들이 이미 다 익었지만, 익지 않은 듯 살아있는 씹는 맛을 뽐낸다.
역시나 기계가 아닌 강판으로 갈려진 감자의 입자는 식감과 고소함이 살아있다. 씹으면 씹을수록 치아와 잇몸 사이로 모래알과 같은 감자 알갱이들이 굴러다니고 위, 아래로 저작 운동과 함께 움직이며 입안을 간지럽힌다. 감자 특유의 풍미가 알갱이들과 함께 톡톡, 어릴 적 입안에서 팍팍 터지던 별사탕가루처럼 감자의 분신들이 김고로를 즐겁게 한다.
그리고 다시 짤막하게 툭툭 끊긴 메밀칼국수면을 젓가락을 슥슥 건져서,
후루룩 후루룩
한 움큼 입안에 가득 넣고 메밀면을 씹는다, 쫄깃하지는 않지만 매끄럽고 툭툭 끊기는 면의 표면에서 메밀향의 고소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젓가락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슬금슬금 떠먹어야 하는 면이지만 그 와중에 함께 곁들여진 애호박 조각들도 같이 먹으면서 애호박의 달콤함과 메밀의 구수함이 함께 어우러진다.
'메밀의 구수함에 감자의 담백함, 거기에 애호박의 달콤함과 다시마의 감칠맛이 한 군데 모이니 균형이 딱 맞는구나.'
그리고 김고로의 젓가락은 물김치와 나박김치로 향한다. 고춧가루와 고추조각, 김칫국물과 열무, 무조각, 배추조각에서 흘러나오던 시원함이 혀 위에서 물풍선처럼 터지며 깊은 개운함까지 선사한다.
옹심이의 열기로 덥기만 했던 김고로의 온몸이 여름날의 에어컨처럼 확 시원해진다, 뜨거운 입안에 떨어진 김칫국물 폭포수가 김고로에게는 '열탕'과 '냉탕'을 오가는 기분이다.
'옹심이로 몸을 후끈하게 덥히다가 물김치로 다시 식혀주니 식사가 즐겁네, 오감이 즐거워.'
반찬이야 주는 사람 마음이겠지만, 옹심이 집에서는 일반적인 배추김치만 먹다가 이렇게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물김치를 먹으니 김고로에게는 신세계였다.
'자주 오지는 않더라도, 옹심이가 생각나면 종종 올 수 있겠어. 이 물김치와 뜨끈한 국물의 조화가 인상 깊네.'
김고로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스테인리스의 거의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국물을 퍼먹고 반찬 그릇을 모두 비웠다.
"잘 먹었습니다."
점심도 뜨겁고 시원하게 먹었으니, 오늘은 후식 커피도 여름과 겨울을 지나서 가볼까, 생각하는 김고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