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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일기] 길손, 강릉

한국인의 밥상에 사볶음서 있나니, 그중 하나 달콤한 낙지볶음이라

by 김고로

"우리 빙상장 가자."


"응? 빙상장을? 스케이트 타러 가자고?"


"예전부터 타고 싶었는데, 이제 시간이 되니까. 가도 되잖아."


"그래, 좋지. 나도 스케이트 탈 줄은 아니까."


이쁜 그녀가 이전부터 스케이트를 타러 가고 싶다고 했다고 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김고로는 기억이 없다. 아마 그때는 무언가 시간이나 환경이 잘 안 되어서 서로 못 가는 상황을 받아들였을지도. 하지만, 지금은 둘 다 주말에 시간이 되고 갈 수 있는 환경이기에,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토요일 아침 늦지 않게 일어나 집을 나섰다.


2018년에 동계올림픽의 빙상 종목들을 치러냈던 강릉이기에 제법 괜찮은 아이스링크가 지금까지도 유지되어 일반 시민과 빙상 종목들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그러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도시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누려본 적은 김고로, 문화생활은 미식 외에는 큰 취미가 없어서 그럴터이다.


김고로와 이쁜 그녀 둘 다, 어릴 적 겨울 방학에는 아이스링크와 논밭 등에서 스케이트 타는 법을 배우며 자랐기에, 어렵지 않게 얼음장 위에서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며 놀았지만 그 나이 때만큼 오래 놀 수는 없었다. 거의 10년 만에 얼음 위에서 달리다 보니 금방 땀이 나고 하체가 단단해짐을 느낀다.


"이제 밥 먹으러 갈까, 금방 배가 고프군."


"그래, 여기 근처에 '길손' 가자고 했었지?"


강릉의 공영 아이스링크가 있는 곳의 정반대 편에는 점심시간에만 운영을 하는 '길손'이라는 낙지볶음 집이 있어 스케이트도 타고 거기서 점심도 먹을 겸 온 김고로였다. 이 집은 김고로가 자주 커피를 마시러 가는 구 바리스타님이 추천해 준 곳이었는데,


"거기 낙지 엄청 큽니다, 거의 크라켄이에요."라는 말씀에


김고로의 흥미가 동했다. 강릉에서는 낙지볶음 집이라고는 포남동에 있는 미성식당 밖에는 가본 적이 없기도 하니, 강릉에 있는 이름난 낙지볶음 집들을 다녀보는 것도 좋겠지.


강릉의 동계올림픽 종목들이 치러졌던 지역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은 아니다, 행사나 프로 스포츠 경기가 있는 때나 저녁의 운동 동호회 활동 시간이 아니면 인적이 드문 곳. 그 가운데에 '길손'이라는 식당은 낙지볶음이라는 단일 메뉴로 점심 장사만 한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급경사의 비탈길을 따라서 내려가니 가게의 창고로 쓰이는 컨테이너 박스와 수돗가와 의자, 호스, 큰 대야들이 있는 뒷마당이 있고 주황색과 흰색이 섞인 털을 뽐내는 고양이 몇 마리가 팔자 좋게 늘어져 겨울 낮의 햇빛을 쬔다.


가게의 자동 유리문을 지나 들어가니 왼쪽은 바로 계산대, 오른쪽은 주방의 직원분들과 사장님들이 함께 일하시는 널찍한 부엌이 막힘 없이 보인다. 안쪽에는 좌식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긴 방, 그리고 홀은 나무 무늬 타일 바닥에 널찍한 창문, 어두운 나무 무늬와 검은 철제로 이루어진 식탁과 의자들, 다른 사람들이 금방 먹고 나간 흔적이 남은 식탁을 보니 점심 식사를 주력으로 하는 식당답게 '빠르게' 와서 '빠르게' 먹고 나가는 회전율이 매우 높은 곳으로 보였다.


"몇 분이세요?"


"두 명이예요."


"네, 2인분 드릴게요~"


메뉴가 한 가지다 보니 주문도 간단하다, 몇 명인지 얘기하고 안내를 받아 앉으면 인원수만큼 음식이 나간다. 메뉴판에는 '낙지볶음'과 '소면'이 음식의 전부, 그 외에는 음료와 주류로 마무리.



주변을 쓱 돌아보니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손님은 다양하고 낙지볶음에 비빈 밥이나 양념에 비빈 소면을 구운 김에 싸 먹는다.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먹는지 관찰하고 나서, 그 행위가 반복적으로 보인다면, 그 집은 그렇게 먹어야 맛있다는 결론을 내는 김고로. 직원분이 기본 반찬과 조리되지 않은 낙지볶음을 가져다주실 때 얼른 소면을 추가 주문한다.


으레 낙지볶음 집들이 그렇듯, 이곳도 손님이 낙지볶음을 조금씩 뒤적여가며 직접 익혀 먹는다. 처음에는 물이 적어 보이고 되직하지만, 익으면 익을수록 낚지와 갖은 채소에서 채수와 육수가 흘러나오고 양념에 스며들어 촉촉한 낙지볶음이 완성된다.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이미 식탁에 자리한 소면이 굳기 전에 빠르게 그릇에 담아 낚지양념에 비벼준다. 1인용 스테인리스 비빔 그릇에 철썩철썩 양념과 소면을 섞어주고, 김고로는 숟가락으로 양념을 한 숟가락 떠먹으며 원초적인 호기심을 해결해 본다.



후룹


"와하, 하하하! 달콤하네."


첫 입부터 손님을 웃게 만드는 음식은 흔치 않다. 길손의 낙지볶음 양념은 첫 입부터 김고로를 웃게 했다. 양파, 파, 양배추, 버섯 등으로부터 나온 달콤한 채수가 고운 고춧가루와 간장, 약간의 설탕이 들어간 낚지 양념과 만나니 은근한 달콤함이 극에 다다라서 김고로의 뇌에 있는 '행복버튼'을 '딸깍'하고 쉽게 누른다.


절묘하게 조합된 단맛은 머리에 있는 모든 미각세포들이 깨어나 춤을 추는 행복함을 선사한다, 그리고 김고로는 커다란 낚지 조각을 씹어본다.


우적우적



양념이 겉에 골고루 코팅되어 간이 잘 배인 낙지가 어금니 사이에서 튕기듯 씹힐 때마다 그 근육 안에 숨기고 있던 구수하고 감칠맛 터지는 육즙이 입안에 물풍선 터지듯 펑펑 터진다. 함께 들어와 있던 양념과 손을 잡고서 김고로의 혀 위로 뛰어드니 첫 번째 숟가락과 젓가락부터, 길손은 김고로의 입맛을 확 휘어잡았다.


"이제 안심하고 식사를 계속해볼까."


이전보다 농도가 묽어진 양념에 물든 소면을 양배추, 대파, 낙지와 함께,


후루룹



면가닥들이 파닥거리는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찰랑거리며 김고로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와 구석에 웅덩이를 만들고 달달한 매력을 입안 전체에 퍼뜨리고는 사라진다. 낙지볶음에 곁들이도록 나온 구운 김 위에도 낚지소면을 올려 바다의 구수함을 더한다.


양념 자체의 개성이 강한 음식이다 보니 낙지볶음의 간이 강하다고 느끼는 손님은 조금 더 담백하게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애초에 무언가에 싸 먹는 음식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보니, 김을 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간이 되어 있지 않은 구운 김을 낙지볶음과 함께 먹으면 낙지볶음과 함께 깊은 바다를 코 안에 가져올 수 있기에 매력적이다.


"지금까지 다녀본 낙지볶음 집들과는 다른 매력을 가진 집이야. 대부분은 매콤하고 얼큰하거나, 고소하고 알싸한 맛에 많은 집중이 되어있는데 반해, 여기는 달콤한 감칠맛이 도드라져서 호불호가 거의 없다고 봐."


김고로는 이쁜 그녀가 낙지볶음과 양념을 충분히 가져가게 한 후에, 나머지 양념과 재료들을 자신의 그릇에 부어 넣었다. 평소 같으면 양념을 다 먹고 나서 짠맛 때문에 식후에 물을 많이 마실까 봐 그러지 않지만, 이곳 양념은 끝까지 긁어먹어도 염분 때문에 힘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짭짤한 매콤함이 무기가 아니라, 채수가 섞인 단맛이 주력이기 때문에.



"이 낙지볶음은 참기름도 넉넉히 넣어서 촉촉하게 먹을 거야."


김고로는 참기름도 양념의 양에 정비례하는 양으로 끼얹는다. 밥을 미리 식혀두었기에, 조금 덩어리를 진 밥알들을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잘게 분해해서 다시 고슬고슬한 비빔밥으로 탄생시킨다. 그리고,


우적우적 사각사각



밥알들과 양배추, 대파, 낚지들이 진하고 붉은 호수 안에서 각자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고 끝까지 힘을 낸다. 식감과 맛이 살아서 달콤하고 아삭하며, 진부한 매콤 달콤한 맛이 아닌, 신선한 맛이다. 이전에는 초당동의 어느 산 중턱에 있는 식당이라고 했었는데, 식당이 잘 되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는 말씀을 나중에 구 바리스타님께서 해주셨다. 아마 이전에 있던 '충성 고객'분들도 함께 따라오셨겠지. 길손의 낙지볶음을 먹어보면 충분히 납득 가는 말이라고 김고로는 생각한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으면, 입술 양옆에 양념이 화장처럼 잔뜩 묻은 것도 모르다가, 슥슥 닦고 나온 김고로와 이쁜 그녀는 그 이후에 마실 맛있는 커피를 찾아 다시 나그네처럼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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