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 쓰던 중학생이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게 된 이야기
<응답하라 1997>을 보지 않았더라도 이 짤을 아는 사람만큼은 아마 여럿 있을 것이다. 무려 13년 전에 종영한 드라마지만,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은 밈(meme)화되어 지금까지도 종종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웃긴 이미지로 퍼지고 있으니까. 해당 짤은 성시원이 수업 시간에 본인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인 H.O.T의 팬픽을 작성하던 중 그 내용을 담임 선생님에게 발각되어 망신당하는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팬픽을 읽던 담임 선생님의 놀란 표정, 노트에 적혀 있는 내용을 선생님이 그대로 낭독하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된 교실까지. 학창 시절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거나 팬픽과 같은 2차 창작물을 제작해 본 경험이 있는 많은 이들은 성시원을 보며 어릴 적 자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팬픽 :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한 2차 창작물 중 하나로, 주로 K-pop 팬덤 문화에서 활발히 창작 중이다.
나 또한 이 드라마를 시청하며 성시원의 모습이 10대 시절 나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팬픽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본격적인 건 아니었으나 나도 한때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그것도 꽤 여러 번. 조금 민망하지만 수학이나 과학처럼 내가 그다지 흥미가 없는 과목 시간에는 맨날 노트를 꺼내 생각나는 소설 줄거리들을 끄적거리곤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과목 선생님들께 참 죄송한 마음이 든다.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짝꿍을 시작으로 반 여자 아이들이 돌아가며 내 노트를 보고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독자 피드백 정도쯤 되려나. 그 친구들 중 몇몇은 나에게 훌륭한 작가가 될 거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팬픽 쓰기는 당시 나의 유일한 낙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시간 덕분에 나는 어릴 적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청소년기까지 잘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다.
성시원이 팬픽 사건(?)으로 교무실에 끌려간 장면에서 드라마는 시원이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를 챙겨볼 당시에는 나도 팬픽의 도움으로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팬픽을 쓰며 즐거웠던 기억 덕분에 글쓰기에 흥미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으니 딱히 이를 부정하진 않겠다. 전형적인 ‘성시원 루트’를 탄 나는 아직도 여러 장르의 덕질을 이어나가고 있다. (아쉽게도 2차 창작은 하지 않는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동기들과 어떤 계기로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게 됐냐는 질문이 오갈 때 사실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작가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는 친구 앞에서 어떻게 팬픽이라는 두 글자를 꺼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졸업을 대략 일 년 정도 앞둔 지금,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문예창작과를 꿈꾸게 된 계기를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일화를 말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성시원이 당당해지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