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약 줄까, 파란 약 줄까?
#5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페미니즘을 처음 만난 날.
둘째 아이가 돌도 되지 않았을 무렵, SNS를 통해 한 통의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어떤 웹사이트의 게시글을 꼭 접속해 보라며 링크를 하나 보냈다.
평소라면 광고라 여기고 무시했을 메시지지만 그날은 느낌이 달랐다. 조심스레 링크를 눌러보니 갓난아기들의 100일 사진이 줄줄 나왔다. 모두 남자 아기였다. 사진 아래엔 ‘미래의 한남충’을 시작으로 입에 차마 담을 수 없는 욕들이 적혀 있었고, 댓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 내 아기의 사진도 몇 장이나 있었다. 평소 그 사이트를 유심히 관찰하던 제보자는 남자 아기들의 100일 사진이 유출된 사진관 정보를 찾아, 엄마들에게 직접 연락을 돌리는 중이라 했다. 페미니즘에도 여러 분류가 있는데 그중 하나인 ‘래디컬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급진여성우월주의)’을 주축으로 하는 사이트라는 설명을 하며, 어떤 법적 조치를 취하는 일은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덧붙여 주었다. 나는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아기띠로 안고 경찰서를 오가며 고소장을 접수했다.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난, 조롱을 받은 댓글들을 엄마인 내 손으로 직접 옮겨 적어야 했다. 당시 경찰서에선 고소장을 앞에 두고 이곳은 의도적으로 해외 ip 주소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이트이기 때문에 운영자나 게시자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어쩌다 소문이 났는지 신문 기자에게도 연락이 왔지만 다른 피해자들분께서 적극적인 대응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속만 끓이며 마무리했던 과거의 경험은 페미니스트들을 향한 나쁜 인상만 심어주게 되었다. 나는 모든 페미니스트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2년 전쯤, 한 책방에서 페미니즘 책 모임을 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평소 여성, 노동, 인권 등의 분야 책들을 공들여 소개하던 책방이라 관심 있게 지켜보았고, 거리가 멀어 직접 가보진 못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꽤 신뢰하던 책방이었다.
3개월간 진행된 페미니즘 북클럽에선 매 달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번의 화상 모임(zoom)을 했다. 책방 지기님과 인연이 깊은 페미니즘 전문 강사님께서 모임에 함께 참여하셔서 이론적인 부분을 채워주셨다. 거기에 모임 멤버분들의 생각, 경험담이 함께 어우러져 각자의 삶에 스며든 페미니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20대 아들을 제대로 키우고 싶어 이 북클럽에 참가하게 되셨다는 한 50대 참가자분의 이야기들이 인상적이었다. 설사 본인은 그렇게 살지 못했더라도 다음 세대를 위해 읽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그 모습이 참 닮고 싶기도 했다.
이 북클럽에선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페미니즘의 도전>,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 이렇게 총 3권의 책을 읽었다. 아쉽게도 난 3번의 모임 중 2번의 모임밖에 참여하지 못했다. 코로나로 한창 가정 보육을 하던 시기라 남편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화상 모임이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 날도 있었기 때문. 마지막 모임은 두 아이들의 참견으로 화면을 끄고 들었는데, 그나마도 잘 시간이 되어 채팅창에 인사만 간신히 남기고 모임을 마무리해야 했다.
페미니즘 관련 책을 처음 읽은 나에겐 사실 위의 세 책도 모두 쉽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두 번째 모임의 책은 거의 읽지도 못했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 북클럽을 시도했던 이유는 바로 나의 첫째 딸을 위해서였다. 내 딸은 조금 더 주체적인 삶을 살길 바랬으니까, 한쪽의 우월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평등함을 알길 바랐고,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페미니스트의 'ㅍ'만 들어도 질색하는 아빠 같은(나의 남편..) 사람 앞에서도 당당하길 바랐으니까! (방금도 내 뒤에서 빨간 약? 파란 약? 엄마는 페미니스트? 하며 편집 화면을 보고 비웃고 지나간 남편) 나야 어느 정도의 경험치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고 무분별하게 상대를 비난하는 폭력적인 발언을 하진 않지만 아직 어린 딸이 만날 세상은 어떨까, 그저 내 아이부터 제대로 키우는 수밖에 별 수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엄마인 내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엄청난 선입견을 가지고 페미니스트들을 바라보았지만 아이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믿을만한 울타리 안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적극적인 참여를 하진 못 했지만, 주체적인 여성의 삶에 대한 가치관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시작점이 되어준 곳이 바로 이 페미니즘 북클럽이다.
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들을 온전히 소화하진 못 했지만 덕분에 여성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나에겐 가장 큰 성과였다. 여중, 여고, 여대 그리고 여자들이 많은 직장에 다닌 덕에 딱히 남성들과 경쟁할 일도, 사회적인 차별을 받은 경험도 없던 내가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긴밀하게 알고 싶어 지게 된 건 큰 변화였다. 그 후 책 모임 선향이나, 서평 쓰기 모임인 윤슬에서도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혼자서라면 외면했을지도 모를 여성들의 이야기를 여전히 계속해서 읽어나가는 중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래서 페미니스트가 뭔데? 당신도 페미니스트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아직도 명확한 대답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약속은 할 수 있다.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삶에 계속해서 귀 기울일 것이라는 것을.
당신도 '빨간 약' 한 번 드셔보시라 권한다. 불편한 진실을 깨달은 후의 세계는 우리에게 달려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