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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ily 케일리 Jan 24. 2023

붉은색, 푸른색 그사이, 그 짧은 시간

영화 <정이> 리뷰

"엄마가 나 때문에 희생만 하며 산 건 아닐까?"

"내가 없었다면 엄마가 더 행복했을 텐데."

.

자책 섞인 엄마를 향한 애착, 가슴 한 곳을 후비는 효도 유발 장르는 예전부터 대유행이었다. 그리고 약간은 올드해 보이는 이 감성이 의외로 디스토피아 미래 배경과도 잘 어울린다. 20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정이> 얘기다.


<정이>

급격한 기후변화로 지구는 폐허가 되고 인류는 우주에 새로운 터전 ‘쉘터’를 만들어 이주한다. 수십 년째 이어지는 내전에서 ‘윤정이’(김현주)는 수많은 작전의 승리를 이끌며 전설의 용병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작전 실패로 식물인간이 되고, 군수 A.I. 개발 회사 크로노이드는 그녀의 뇌를 복제해 최고의 A.I. 전투 용병 개발을 시작한다.

35년 후, ‘정이’의 딸 ‘윤서현’(강수연)은 ‘정이 프로젝트’의 연구팀장이 되어 전투 A.I. 개발에 힘쓴다. 끝없는 복제와 계속되는 시뮬레이션에도 연구에 진전이 없자, 크로노이드는 ‘정이’를 두고 또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이를 알게 된 ‘서현’은 ‘정이’를 구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전투 A.I. 정이, 연구소를 탈출하라!


<고요의 바다>, <욘더>처럼 제작자가 상상력을 잔뜩 발휘한 과학 소재 작품을 좋아한다. 거기에 이과의 탈을 쓴 문과처럼 드라마가 있는 SF 장르라면 금상첨화. 전쟁 용병 엄마와 머리 좋은 딸을 내세운 시놉시스에 홀려 넷플릭스 앞에 앉았다.


기대감을 안고 틀었지만, 초중반까지는 줄곧 정이의 비주얼과 친해지느라 애먹었다. 분명 김현주 얼굴인데 어깨까지만 있는 몸, 투명한 정수리, 피 대신 흐르는 은색 액체는 불쾌한 골짜기 그 자체였다. 겁 많은 관객으로서 로봇 팔 아닌 사람 팔을 자르는 내용이었다면 관람 시도조차 못 했을 테니, 덕분에 수위가 낮아진 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인간과 전형적인 로봇 사이에 놓인 정이를 볼 때마다 묘하게 징그럽고 역겨운 마음은 떨치기 힘들었다.


영화가 반환점을 돌며 불쾌한 골짜기를 벗어난 건 "노란불" 덕분이다. 극 중 김상훈은 윤정이의 뇌 데이터에서 고통은 붉은색, 전투 의지는 녹색, 미확인 영역은 노란색으로 칠하라며 신호등에 빗대고 좋아한다. 아무도 반응해주지 않는 싱거운 농담처럼 그려지지만, 이 미확인 영역은 정말 신호등 속 노란불 같은 역할을 한다.


2년 전 발매된 인기곡 이무진-<신호등>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붉은색 푸른색 그 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노란색 빛을 내는 저기 저 신호등이

내 머릿속을 텅 비워버려"


붉은색과 푸른색을 반복하던 윤정이의 뇌 데이터에서 노란색이 드러난 건 찰나다. 순간 활성화된 노란 빛은 정이의 식어가던 전투 의지에 불을 지펴 이목을 끈다. 팔을 자르고 다리에 총을 쏘는 등의 고문에도 드러나지 않던 노란 빛의 정체는 서현과 정이의 대화를 통해 모성애임이 밝혀진다. 전투를 멈추는 고통(빨간불), 계속하게 하는 의지(파란불), 그리고 감정을 정리하며 어떤 힘을 주기도 하는 노란불의 모성애까지, 신호등으로 정의된 감정선이 인상 깊었다. 김상훈이 유머 아닌 작명소를 욕심냈다면 먹혔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정이>에는 분명 신파가 있다. 건조한 과학물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겠으나, 시놉시스부터 모녀의 가족애와 새드 엔딩을 예상했기에 놀랍지 않았다. 다만 기왕 있을 감정선이라면 삐걱대는 파도 풀이 아닌 부드러운 유수 풀로 자연스레 관객을 이끌길 바랐다. <정이>는 반복해서 비춘 키링과 딸을 위해 전투에 나가는 설정으로 윤정이라는 인물의 모성애를 꾸준히 부각했다. 비록 <고요의 바다> 속 한윤재가 딸의 병원비를 위해 작전에 참여했듯 병 걸린 자녀에게 발목 잡히는 부모 설정은 다소 식상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명확하게 드러난 여러 모성애 단서 덕에 윤정이의 삶과 선택을 납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로봇의 얼굴로 바뀐 뒤에도 눈빛만 가지고 감정을 전달한 김현주의 연기는 그녀가 장르를 가리지 않는 명배우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억지스러운 러브 라인이 전혀 없다는 점도 눈에 띈다. 대체로 아무리 잘나고 유능한 주인공이어도 조미료 같은 사랑을 뿌려주는 게 한국 작품의 준 필수 요소다. 주연 서사에 넣기 애매하다면 서브 주연이나 조연에게라도 꼭 넣는다. 하지만 <정이>는 "썸"조차 없이 뇌 복제에만 집중하면서 감정적 서사는 정이-서현 모녀에게 몰아줬다. 덕분에 둘의 가족애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듯 두드러졌고, 정이에게서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운 서현의 뻔한 결정도 변질되지 않은 애틋함 그 자체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인간의 죽음을 뇌 기준으로 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심장을 기준으로 정해야 하는가?"는 도덕적 논쟁에 있어 단골 이슈고, <정이>는 이에 대한 답을 "뇌"라고 내놓은 듯하다. 이들의 답은 독성 있는 꽃 같다. 윤리적인 문제가 피부로 와닿고, 무분별한 기술 발전에 경각심을 갖게 됨과 동시에 A 타입을 살 재력만 있다면 정말 뇌 복제로 영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세계관에 혹했다. 하지만 세계관에 이끌리는 만큼 사사로운 설정도 들여다보는 법. 윤정이가 아직 살아있는데 뇌 데이터를 삭제한들 다시 복제할 수는 없는 걸까? 또 뇌사와 달리 식물인간은 반응이 있다고 아는데, 저렇게 갇혀있으면 심심하진 않을까. 자질구레한 질문이 샘솟는다.


불과 1~20년 전 예능만 봐도 세상의 발전에 깜짝 놀란다. <정이>가 그린 만큼 극적이진 않아도 우리는 순식간에 새 기술을 접하고, 빠르게 희미해진 과거를 마주할 때 문득 놀라는 삶을 살고 있다. 멈춤과 나아감을 반복할 인생에 변치 않을 한 가지, 우리는 가족이라는 노란불 앞에 추진력과 안식을 얻으며 재정비할 거라는 것.


비록 신호등에서 가장 짧지만, 긴 레이스를 견디게 할 페이스 메이커 "노란불". <정이>는 그 노란불을 엄마의 모습으로 끄집어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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