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 Jun 22. 2022

제주도 작은 책방


먹고사는 것과 노후 자금 마련을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된다면 뭘 하며 살고 싶은지 잠시 상상해 본다.


제주도 작은 책방이 좋겠다. 책방 문을 열고 그날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곡들을 플레이리스트에 담아

재생 버튼을 누른다. 커피도 내려야지. 겨울이라면 난로에 보리차도 끓여야겠다.

얼마 전 재밌게 읽은 책들의 소개 글을 손글씨로 정성껏 눌러쓰고, 가만히 손님을 기다린다.  


그저 상상이지만 좋다. 그러나 금방 현실적인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낭만적인 소리나 하고 있기는! 책방 일이 얼마나 고된데.

책을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책방을 유지하기도 어렵다는데, 생활이 되겠니?!’     


이제 상상도 어려운 나이가 된 걸까. 그럼에도 생각해보면, 이제껏 내 삶에서 비교적 큰 변화들은 무모한 상상으로 추동되었다. 가령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돌연 사회복지사가 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상만으로 뭔가를 결정하기엔 용기도, 확신도 부족하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룬다고, 정말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건 아니다. 무엇이 된다면, 이것만 바뀐다면, 저것만 할 수 있다면 수많은 가정법의 결말이 내가 원하던 답이 아닐  있다.

몇 년 전, 유튜브에서 김영하 작가의 강연을 들었는데, 그는 좋아하는 일을 꼭 직업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오히려 좋아하는 일보다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것이 현명하며, 직업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형태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일찍 들었다면 그토록 무언가가 되어야겠다고 필사적이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이 또한 장담할 수 없겠지만.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이 막 시작될 무렵, 대만과 괌 여행이 거짓말처럼 연달아 취소되었다. 어디라도 떠나야겠다는 심정으로 제주도에 갔다. 제주도는 가족 모두 좋아하는 곳이라, 거의 매년 가게 된다. 그러다 보니, 여행 코스가 크게 달라지지 않고 매번 비슷하게 반복되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 특별하게,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정해 일정에 넣기로 했다. 남편은 낚시를, 아이는 두 번 물을 것도 없이 수영과 해변에서의 모래 놀이를, 나는 책방을 선택했다. 코로나19가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되도록 인적이 드문 곳으로 조용히 다녀오기로 했다.

     

제주도에는 워낙 매력적인 독립서점들이 많아서 가 보고 싶은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고 일정도 길지 않아, 숙소와 그나마 가까운 서점 한 곳에 다녀오게 되었다. 이미 여러 블로그와 독립서점과 관련된 책을 통해 알고 있던,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던, 제주도 독립서점의 1세대 ‘소심한 책방’이었다.      


구좌읍의 작은 종달리 마을의 끝, 많은 블로거가 증언했듯 ‘과연 이런 곳에 책방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길만한 곳에 책방이 있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된 철제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서는데, 마치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에 입장한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발걸음을 몇 번 옮기는 것만으로 내부를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은 책방이었는데, 있어야 할 것들은 모두 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책방의 규모와 내부 장식, 책의 배치 등 모든 것이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그대로 충분했다. 책 한 권 한 권이, 작은 굿즈 하나하나가 나를 설레게 했다. 공간 자체가 주는 영향이 있다. 그저 머물기만 해도 힐링이 되고 위로가 되는 곳. ‘소심한 책방’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남자만 없었다면, 좀 더 오래 그 공간에 머무르고 싶었다. 김영하 작가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과 ‘egg’라는 제목의 그림책을 사서 나왔다. 차로 돌아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꿈꾸던 책방의 모습이야!”     


소심한 책방




유년시절, 내가 즐겨 찾던 놀이터는 헌책방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나는 자주 허름하고 어두운 헌책방에 혼자 숨어들어 몇 시간씩 책을 읽었다. 오래된 책들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가 좋았다. 가끔 그때 기억이 떠오르면, 자동으로 그 냄새가 먼저 생각난다. 또 유난히 책 읽기를 좋아했던 작고 통통한 여자아이 한 명도.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어느새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주인공이 되어 온갖 일들을 겪고 드디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잠시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몽롱한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그만큼 작가가 만들어 놓은 허구의 세계에 깊이 몰입했다. 그 몰입의 순간과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감동이 좋았다. 돌아보니, 책은 어린 시절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챙겨주고 돌봐 준 고마운 존재.


지금도 책은 여전히 나의 다정한 친구다. 바쁘게 지내는 날들 가운데 잠시 가만히 앉아 숨을 고르게 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고 살펴주는 존재. 그래서 다시 책방을 꿈꿔본다. 제주도라면 좋겠지만, 지금 살고 있는 파주도 좋다. 이른 아침 책방 문을 열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재생하고, 커피를 내리고, 겨울엔 난로 위에 보리차를 펄펄 끓이고, 고구마도 구울 거다. 그래서 추운 날 차갑게 얼어있는 손님의 손에 난로처럼 건네주고 싶다. 재미있게 읽은 책을 소개하는 글은 손글씨로 한 자 한 자 정성껏 눌러쓸 것이다. 누군가에게 부치는 편지처럼.



   

다시 현실로 돌아와,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그토록 꿈꾸던 책방 주인이 되었을 때, 나는 행복할까?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책방 운영은 과연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일까?

   

대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실망할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끔 상상하고 싶다. 작은 책방의 주인이 되어 귀여운 호호 할머니로 늙어가는 신나는 상상을.

휠체어나 유모차가 언제든 편하게 들어올 수 있고, 어른이나 아이나 누구도 차별 없이 환대하는,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다정하고 아늑한 공간을.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나의 꿈을.


작가의 이전글 쓰지 못한 날들에 대한 긴 변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