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무협지’라는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치고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을 들어보니 ‘문학으로서 가치가 없는 흥미 위주의 소설’, ‘허황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중·고등학생 때 무협소설을 읽는 시간을 아깝게 느꼈다. 하지만 주변의 권유로 한 번 쯤 속는 셈 치고 읽어 볼 마음을 갖게 되었다.
처음으로 추천받은 책은 소설가 ‘김용’의 소설이었다. 김용은 신필(神筆)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무협소설가이다. 아무래도 지금껏 접해보지 못한 장르를 읽기 망설였고, 더군다나 돈으로 사 보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빌려 볼 결심을 하여 의정부 과학도서관을 찾았다. 힘들게 손에 잡은 무협소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 책을 읽고 ‘무협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깰 수 있었고 문학작품으로서 가치 있는 소설을 만났다는 생각에 기뻤다.
나는 좋은 문학 작품이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다 탄탄한 짜임새와 생각할 거리, 재미가 더해진다면 더욱 훌륭한 작품이라 본다. 『신조협려』는 이런 기준에 비춰 좋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소설은 몽골이 중국대륙으로 힘을 뻗어나가 송(宋)나라와 서로 맞설 때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은 양과(남자 주인공)와 소용녀(여자 주인공)다. 그 둘은 스승과 제자 간이다. 양과는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양과가 어렸을 적에 눈을 감았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를 어느 누구도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다. 백부 곽정과 백모 황용이 도화도(소설에 나오는 섬 이름)로 그를 거두어 주었지만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오히려 백모인 황용을 오해하고 원망했다. 결국 종남산의 전진교(중국 도교의 한 종파) 교단으로 가 지내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한다. 여러 가지로 뒤얽힌 사연 속에 고묘(古墓, 오래된 무덤이라는 뜻)를 찾게 되고, 그곳에서 비슷한 또래인 소용녀를 만나 함께 지낸다. 비록 스승과 제자 사이지만, 함께 지내던 시간 속에서 서로를 연모하는 마음을 쌓는다. 우연찮은 기회에 둘은 여러 무공을 배우고, 송(宋)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몽골 왕자, 몽골 승려와 무공을 겨루기도 한다. 또한 서로 오해가 생겨 헤어지기도 하고,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악인이 등장하여 죽을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한다.
결국 독자의 염원대로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난다. 몽골의 대칸(몽골을 통치하는 최고의 군주) 몽케[蒙哥]를 죽이고, 몽골의 군대로부터 양양성을 지켜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 둘은 부부가 되어 은거하여 행복하게 지낸다.
사람들은 ‘사랑’이란 감정을 겪으며 산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연인 사이의 사랑, 국가에 대한 사랑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겪고 배우며 성숙한다. 이 감정은 거의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여러 종류의 ‘사랑’으로 펼쳐진다. 양과와 소용녀가 살던 때, 혼사는 부모가 정해주던 관례가 있었다. 게다가 스승과 제자 사이는 연인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법으로 정해놓은 규범은 아니지만, 서로 알게 모르게 납득하는 질서였다. 하지만 둘은 시대의 관습을 깨고 감정에 솔직하게 서로를 아낀다.
곽정과 황용,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막수(소용녀의 선배)가 <옥녀심경>(소설에 등장하는 무공 비급)을 빼앗기 위해 고묘로 쳐들어 왔을 때 소용녀는 양과를 고묘 밖으로 내보내고 이막수에게 죽기로 결심한다. 이 때 양과는 소용녀에 대한 감정을 누를 수 없어 밖으로 나서다 고묘로 다시 들어온다. 또한 소용녀가 이막수의 독에 당하여 치료할 수 없게 되자, 양과는 혼자만 살 수 없다며 자신을 살릴 수 있는 해독약을 던져버린다. 이렇듯 시대를 넘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랑의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쿨하게’ 만난다는 말이 있다. 쉽고 가볍게 만나 미련 없이 언제든 헤어지는 남녀 관계를 뜻한다. 이런 말이 생겨난 때,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상황과 맞서 순수한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 소설을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양과와 소용녀의 사랑과 성장이 주된 내용이지만, 이야기 곳곳에 생각해볼 거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악인의 기질을 띠고 있는 양과가 자신의 가슴 속에 담긴 뿌리깊은 한을 억누르고, 대의를 위하여 자신을 극복하는 변화상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귀감이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허황된 글과 격언보다 더 진하게 느껴진다. 당시 송나라는 망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정 대신과 관료들의 부패, 굶주리는 백성, 외적의 침입, 전쟁의 혼란, 충신의 간언과 같은 말들이 당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어울린다. 곽정과 황용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양양성을 지키려고 한다. 딸이 몽골군에 볼모로 잡혀 죽게 되었을 때도, 양양성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라에 충성하는 가치를 으뜸으로 여기는 것이다. 양과 역시 곽정의 태도에 감명 받아 목숨 받쳐 나라를 지키는 길로 걸어간 것이다.
‘부패하여 백성을 수탈하고 괴롭히는 나라에 충성할 필요가 있을까? 나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는 나라를 등지면 안 되는가? 쓰러져가는 송나라보다 뛰어난 인재가 다스리는 몽골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면, 몽골에 항복하여 충성하는 것이 정의로운 길이 아닐까? 민족이란 무엇이기에 동질감을 느끼고 목숨까지 바치게 할까? 민족이란 허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소설은 사실이 아닌데도 왜 우리는 주인공의 사랑에 감명 받고, 화나고, 안타까워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스스로 답을 찾을 뿐이다. 이 외에도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음양사상이란 무엇이고,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기(氣)란 것이 정말로 있을까?, 나라면 이 상황에 어땠을까?’ 같은 질문도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재미는 허구적 이야기가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잘 버무려진 데서 나온다. 흔히 들어봤을 법한 역사적 인물과 지명이 많이 나오기에 한층 재미를 더한다. 전진교를 세운 왕중양, 양양성을 5년 간 지켰던 여문환, 칭기즈칸을 만났던 구처기, 몽케, 원(元)나라를 세운 쿠빌라이(홀필열), 무당파를 세운 장군보(장삼봉) 등 실제 인물이 많이 나온다. 따라서 책을 읽으면서 역사와 문화도 알게 모르게 익힐 수 있다.
이야기 곳곳에 시(詩)가 나오는 점도 매력적이다. 시는 인물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인물 사이 얽힌 은원이 하나씩 해결될 때 원호문의 안구사(雁丘詞)가 노래 불린다.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생과 사를 같이 하게 한단 말인가.
이 시구는 소설의 여러 주제를 꿰고 있다. 작품 속 여러 시를 넣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밋밋한 요리에 향신료를 넣은 것과 같다.
다만 이 책을 읽을 때 주의할 점도 있다. 이 책은 역사적 고증이 잘 된 책이라 하더라도, 허구를 띠는 소설이란 걸 감안해야 한다. 무심결에 소설을 통해 한족 외 다른 민족을 ‘악’이라는 틀을 씌워 바라볼 수 있다. 몽골 군대가 곽정의 딸인 곽양을 인질로 잡아 양양성을 함락하려는 모습, 한인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모습, 곽도, 금륜국사의 비겁한 행동은 몽골인이 ‘비열하다’, ‘잔인하다’는 이미지만 심어줄 수 있다. 몽골 군대가 정말 잔인하고 몽골인이 비열한지는 역사적 고증을 통해서 판단하는 게 옳다. 따라서 지나치게 인물에 몰입하여 이야기를 진실인 양 착각하여 ‘그대로’ 믿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읽고 싶은 것만 읽으려’한다. 이 소설은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인증하도록 해주었다. 그동안 무협소설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양과는 세상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무협의 세계에는 정파와 사파가 존재한다. 정파는 정도(바른 길)를 걷는 무리이고 사파는 사도(사악한 길)을 걷는 무리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실상은 정파가 간사하고 사파가 의협심이 강한 사례가 많다. 양과는 정파든 사파든 가리지 않고 의리 있고 좋은 사람이라면 사귄다.
그런 점에서 요즘 같은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순도 100%의 선과 악이 어딨겠는가. 사람들은 저마다 잘났다고, 자신의 말만 주구장창 주장하고, 남의 말은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듣더라도 그 사람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서 핵심 논지를 파악하려는 경우가 많다. 결국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내 의견과 다르면 박멸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독선적 태도가 알고리즘을 통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정과 사의 구분은 칼로 무 자르듯이 간단한 이치가 아니다. 복잡미묘한 은원과 질곡 속에서 한 인간의 생각이 해석되어야지, 정파라서 정의롭고, 사파라서 정의롭지 못하다는 이분법적 도식을 깨부시는데 도움이 되었다.
독서의 측면에서도 생각할 점이 있다. 다양한 장르에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SF, 판타지, 무협, 추리소설 등 뚜렷한 성격을 가지는 소설 장르가 있다. 오직 순수문학만 진정한 문학으로 고집하며, 이들이 문학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 속에 갇혀 있다면, 쥘 베른의 ‘지하탐험’,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 김용의 ‘신조협려’란 훌륭한 작품은 만날 수 없다. 고정관념이란 무서운 것이다. 바닷가를 거닐며 예쁜 조개껍데기를 줍지 못할 뻔 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