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 가기 전 막내아들은 나를 걱정했다. 꿈꾸는 이상주의자에 혼자 있기 좋아하는 엄마가 건강을 해칠까 잔소리처럼 걷기를 챙겼다. 그래도 걷는 것을 좋아하니 다행이라고.
내가 걷는 산책로엔 작은 숲의 사계절이 존재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도서관 담벼락이 길과 함께 이어진다.
도서관이 실로 아궁이 같다는 생각을 겨울이 오면 불현듯 하게 된다.
책 쓴 이들이 뿜어냈을 열정과 고민과 한숨이 늘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내가 상상하며 지나가는 사이 그 아래로 부글부글 흐르는 것이다.
개줄에 끌려 뛰어가는 사람도 집으로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는 이들도 마치 그 화산의 존재를 잊은 듯 스쳐간다. 그 길에서 자신이 걷고 난 발자국이 지워져도 모를 것이다.
겨울의 한기는 어쩌면 알아야 할 것을 애써 외면하는 모진 마음과 닮은 듯하다.
어제까지 매서운 추위에 얼어붙었던 눈들은 드디어 밤사이 자유를 얻어 소리도 없이 세상에 내려앉았다.
해가 뜰 때까지 가로등 아래서 신나게 춤추며 날렸을텐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땅만 하얗게 덮고 있었다.
재밌는 소리를 내며 밟히는 눈길은 가끔 묘한 기분이 느껴질 만큼 푹신하고 포근하며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내가 눈 오는 날 걷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여지없이 이 기분이 생각난다.
세상을 하룻밤에 완전히 바꿔버리는 이 능력은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자연의 신비 중에 하나다.
가끔 마음이 가라앉는 나를 발견하면 눈길을 걷는 상상을 하고 흐린 눈보라를 걷고 나타날 아름다운 흰 말을 기대해 본다. 얼마나 아름다울지 한참 그려보다가 정신이 들면 어느새 행복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용기가 난다.
며칠 전 군에 가 있는 막내아들이 제설작업을 하고 난 후부터 허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이 있는 곳보다 더 위쪽이라 눈도 더 많이 오고 추운데 아직 일병이라 나름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휴가를 나올 것이고 그때 병원을 가보자 하며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아픈 것도 아니고 할 일이 많아 바쁘다 보니 순간순간 잊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눈세상을 꿈꾸며 기분 좋게 걸을 생각으로 나선 나는 그 많은 눈을 말끔히 치워 안전한 길을 내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덜컹거렸다. 그나마 아침에 눈이 멎었으니 다행이지만 이보다 더한 지역에서는 제설작업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들이 직접 눈을 치워준 것처럼 환해진 산책로가 눈에 들어온 순간 새삼 너무나 놀라고 감사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세상의 오래된 비밀들을 기록하고 책을 만든 이들의 마음이 언제나 오가는 그 길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은 채 갈 길만 바쁜 이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 나는 안전한 그 길 위에 내 생각을 펼치며 몰입하는 즐거움으로 행복했는데 누군가는 일터로 또는 봉사의 현장으로 다녀갔을 것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누군가는 비가 오면 길이 무너지지 않게 흙을 돋우고 여름엔 우거진 나뭇잎을 잘라주고 가을엔 낙엽을 쓸며 겨울까지 안전한 산책로를 보살폈다. 그리고 나는 내 아들의 어려움을 떠올리며 부끄럽게도 이제야 내가 꿈꾸듯 걸었던 산책로에서 외면했던 많은 일들을 떠올려본다.
최근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홀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어려움으로 힘든 사람들이 전보다 더 많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내가 직접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내 나이에 부끄럽지 않을 가치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잇값, 배운 값, 밥값으로 조금이나마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감사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 그리고 어느새 무신경해진 내 마음의 빗장을 풀고 또다시 나를 들여다보며 걷는다. 늘 거울처럼 마음을 닦고 잘 관찰하는 일은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말과 글이 따로 갈 수 없고 생각과 행동을 달리 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지나갈 것이다.
종소리가 크다고 더 귀한 것이 아니니 숨을 죽여 남을 돕는 이들에게 머리 숙여 공손해야 한다. 그리고 돌아서서 나 또한 그 돕는 손과 발이 되도록 늘 아궁이를 지펴서라도 마음의 한기를 걷어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