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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근수근 Dec 16. 2024

아편전쟁


19세기 초 중국의 경제 위기와 은 유출

중국의 개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체결한 난징조약부터로 꼽는다. 개항이전에도 서구와 중국의 무역관계는 이미 양측의 국내경제를 좌우 할 정도로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영국은 1635년 처음 동인도회사 선박을 중국으로 파견한 이후 1786년이 되면 다른 나라 선적이 17척인 데 비해 영국의 선적은 62척에 달할 정도로 중국의 최대 무역 대상국이 되었다. 중국의 비단, 차, 도자기는 유럽인의 생활문화를 바꾸기에 이르렀고, 한때 중국차에 대한 관세수입이 영국 국가재정의 10%를 차지할 정도였다. 유럽은 이러한 중국 상응할 유력 수출품이 없었다. 모직물은 중국에서 시장을 찾기 어려웠고, 인도 면포 또한 그러했다.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대금은 식민지인 신대륙에서 채굴한 방대한 양의 은으로 지불해야 했다. 18세기는 대단한 호황기로 시장경제가 발달하고 상품작물의 재배가 확산되어, 한 세기동안 이구는 2배가 넘게 성장하여 3억을 돌파했고, 1830년대는 4억을 넘어섰다. 이러한 인구 폭발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중국경제는 이를 포용하고도 남을 호황을 구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과 서구는 무역수지에서 한쪽에 치우쳐 있었을 뿐 아니라, 무역관계에서도 그러했다. 무역항을 한 곳으로 제한했을 뿐 아니라 공행제도를 실시하여 교역을 감독 했다. 이러한 무역항의 제한, 비정규적인 과세, 직접교역을 막는 보상제는 영국 상인들의 불만을 샀다. 여국은 수차례 사절단을 파견하여 수정을 요구하였지만 무역 확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무역 적자를 상쇄하기 위해 영국이 취한 다른 방법은 중국에 수출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바로 인도의 아편이다. 이로 인해서 중국의 은유입은 은유출로 바뀌기 시작했다. 서구와 중국의 무역을 주도한 것은 영국의 동인도 회사인데 이들은 아편이 금지된 상품인지 알면서도 지방무역 상인의 아편무역을 조장하였다. 은의 유출은 국내 은값의 폭등을 가져왔다. 이는 세금의 가중을 불러들이게 됐다.  


아편문제와 린쩌쉬

처음에 아편은 사회문제로서 주목받았다. 만주족 정규군인 팔기군 병사와 관리 사이에서 아편흡입 풍습이 퍼지면서 각종반란에 대한 효과적인 진압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1830년대 이전에는 아편과 은 유출을 별개의 일로 1829년 푸젠도어사 쟝위안의 상주 이후, 아편밀수가 은 유출을 일으킨다는 인시기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총체적인 사회경제의 붕괴 주범으로서 아편문제가 재인식되었다.

아편과 은 유출 대책을 둘러싸고 조정에서 엄금론과 이금론으로 논쟁이 일어났다. 이중에서 황제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 린쩌쉬였다. 황제는 린쩌쉬를 흠차대신으로 발탁하여 광저우로 파견하고, 그의 아편단속의 힘을 실어주기위해서 다시 량광총독에 임명하였다. 이렇게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지방요직을 두루 섭렵했으며,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그라면 암암리에 이권이 얽혀 있어 아편 단속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광저우의 관리를 철저히 다스릴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최초의 개항

린쩌쉬는 1839년 3월에 광저우에 도착한 후 아편매매를 엄금시키고 영국, 미국 상인을 압박하기위해서 식량공급을 중단하여 두 달 만에 아편 2만여 상자를 몰수하는데 성공해 전량을 공개적으로 폐기했다. 이처럼 린쩌쉬는 아편 몰수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이 문제가 외국과의 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무역 감독관 엘리어트는 본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고, 영국 상인들은 사유재산 몰수와 무역자유 침해를 이유로 의회에 압박을 가했다. 린쩌쉬는 외국인도 내국인과 같이 중국의 법을 따라야한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시각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린쩌쉬의 의도와는 반대로 영국정부는 10월에 개전을 결정했고, 원정국인 6월 마카오 해역에 도착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42년 8월 난징조약의 체결까지 약 2년의 기간 동안 전투는 주로 중국 중남부 해안과 양쯔강 중하류 일대에서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25만여 청군이 2만의 영국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1842년 8월 29일 난징 함락직전에 청조는 콘윌리스호 선상에서 영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인 패전조약이자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에 조인하게 된다.

전쟁과정에서도 청조의 태도는 갈팡지팡했다. 도광제의 우유부단한 태도는 첫 불평등조약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난진조약과 이후 체결된 몇 개의 보완 조약은 동아시아 ‘불평등조약’의 원형이 되었다. 협정관세율, 영사재판권, 편무적 최혜국대우 등 세 개 조항이 불평등조항의 핵심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명백한 불평등성을 드러낸 이 조항들을 청조가 어떻게 생각했는가라는 점이다. 청조는 수입관세 5%가 그 당시 관세율 2~4%보다 높았기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영사재판권은 언어와 습속이 다르고 ‘교화’가 안 된 외국인은 중화의 법이 아니라 오랑캐의 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온당하다고 생각하여 수용했다. 최혜국대우 조항도 군자는 ‘만인을 공평히 대하듯이’라고 생각해서 받아 들여졌다. 아편전쟁을 치르면서도 전쟁 중 도광제는 청이 영국보다 우세한 처지에 있다고 믿었다. 황제와 청 조정은 아편전쟁을 약간의 양보로 해결된 양이의 소요사태로 밖에 보지 않았다.

청조의 불평등 조약 수용 태도를 이해하기위해서는 난징조약보다는 7년 앞서 체결된 코칸트 왕국과의 합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조가 어떻게 받아들였어도 현실은 많이 변화하게 되었다. 중국은 홍콩을 영국을 영국에 할양하고, 4개의 무역항을 추가로 개항하여 기존 광저우를 포함해 5개 항이 열었다. 또 5개 항구에 외국인의 영주를 허가하여 조계제도의 기반이 만들어 졌다. 공행제가 폐지되면서 개항장에서 교역에 대한 감독이 철폐되고, 공행이 중계하던 외교상의 역할도 사라져 양국사이에 대등한 문서격식으로 직접 교섭을 하게 되었다. 


아편전쟁의 대내외적 영향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아편전쟁은 중국정부와 정책집행자들에게 커다란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지 못함으로써 새로운 근대라는 시대에 늑장대응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장기적인 시각에서 아편전쟁은 청조의 붕괴를 가져올 징후를 보여주었다. 청조는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200여 년간 중화제국의 황제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해왔지만, 아편전쟁에서 나타난 청조의 무력함은 잠재되있던 반청-반만주족의 한족민족주의의 부활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그 가능성은 이미 전쟁 당시에 나타났다. 청조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한간(漢奸)’문제가 그것이다.

아편전쟁은 대외적으로도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궁극적으로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중화주의적 천하질서의 종주국으로서 청조의 위신이 크게 떨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직접적으로 낯선 유럽국가와 대청제국의 전쟁은 이웃나라 일본과 조선에도 안보상의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응은 달랐다.

조선정부는 중국에 보내는 조공사절인 연행사를 통해 전쟁에 대해서 자세히 알았고, 조선정부는 지속적으로 전쟁에 관심을 갖고 정보를 수집했지만 영국의 압도적인 우위와 청의 패전사실은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은 안녕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일부 보고는 청조의 무력한 대응을 상신 했지만, “평안하다”는 정사의 주장에 묻혀 크게 취급되지 못했다. 즉 조선정부는 아편전쟁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으나 정보의 자의적 해석과 낙관론으로 위기의식을 완화하였고, 아편에 대해서만 경각심을 높였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나가사끼에 출입하는 네덜란드로부터 받는 보고서와 중국 상인으로부터 얻은 보고서를 통해 전쟁의 경과와 전황에 대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고 있었으며, 일찌감치 영국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인해 청이 패배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막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로써 유화책으로 전환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식 총의 도입과 총포대의 신설, 증기선 수입 등 해방체제의 개혁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대조적 대응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중 하나는 정보를 입수한 통로가 달랐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마음자세의 차이를 지적한다. 조선은 외형상 큰 반란 없이 안정적인 시대였기 때문이었고, 이와 달리 일본정부는 1830년대부터 각종 농민, 도시민 소요가 빈발하고 재정위기로 막번 체제가 흔들리면서 이미 내부적 위기를 절감하고 있던 터였다. 결과적으로 일본 막부도 무너지고 말았으나, 적어도 개항과정에서 일본은 큰 전쟁 없이 서구에 굴복하고 불평등 조약을 맺었으므로 개항의 조건은 중국만큼 나쁘지 않았다. 일본의 비교적 무난한 개항에는 대외적 상황이 중국과 달랐다는 점도 작용했다. 열강은 중국에 관심이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관심은 희박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강진아, 『문명제국에서 국민국가로』, 창비, 2009

김주삼, 『국제지역문제연구』, 「아편전쟁과 동아시아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중,일의 대응방식 분석」, 한국아시아학회, 2009

유장근, 『경남사학』, 「아편전쟁 시기의 한간에 대하여」, 경남사학회, 1984

이학로, 『대구사학』, 「아편전쟁시기 중국의 아편문제」, 대구사학회, 2000

하정식, 『근대중국연구』, 「아편전쟁과 조선·일본」, 중국근대사학회, 2001


*2010년 전후에 학부 토론용 소논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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