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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근수근 Jan 06. 2025

다양성과 통일성의 고려문화와 사상


1)고려시대의 문화


우리는 흔히 고려시대 문화 하면 청자와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등을 떠올리지만 이런 것이 고려문화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고려문화의 특성의 일부분 밖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청자와 같은 문화유산을 중앙문화·귀족문화·문벌문화라고 한다면, 고려시대에는 이외에 또 다른 형태의 지방 문화가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유산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매우 다양하며, 도한 각각의 문화가 서로 어울려져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왜 고려청자나 팔만대장경 따위가 고려문화의 전부로 인식되었냐 하면 조선인 국학자들이 조선학운동을 일으켜 우리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부분을 찾아내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주목한 부분이 바로 고려시대의 역사와 문화였습니다. 우수한 문화유산, 자주적인 대외의식을 자랑스러운 역사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외에도 상대적으로 식민사학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던 것도 새롭게 주목 받은 이유입니다.


청자나 팔만대장경과 같은 중앙문화에 대응되는 지방문화는 석불문화를 대표적으로 들수 있습니다. 우리역사를 통틀어 가장 불교가 번성 했지만 막상 알려진 것은 그다지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시대 불교문화는 석불문화라는 상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앙문화와 대비되는 지방문화의 상징이기도한 석불문화의 특징은 서민적이고 대형화된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예로는 관촉사 은진미륵이나 안동 제비원 석불등이 있습니다. 또 다른 양식은 큰 바위나 암벽에 부조 형식 혹은 선으로 불상을 새겨 넣는 방식인 마애불입니다. 그 외에도 당간지주, 커다란 철불은 고려 지방문화의 역동성과 건강성을 잘 보여 줍니다. 이는 통일 신라의 조형미, 세련미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석탑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지방문화가 나온 배경은 고려왕조 건국한 지방 세력의 문화와 연결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신라하대부터 등장한 선종의 산문을 후원한 것은 지방 세력입니다. 당시 지방 세력은 그 영역 내에서는 마치 서양의 봉건영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영역 안의 민들을 교화하고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적 제의를 주관하고 결속을 위해 민들을 동원해서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문화가 지방 세력의 권위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미술사에서는 세련미와 조형미가 돋보여 예술성이 뛰어난 문화유산에만 주목했지만, 사실은 그 외에도 각각의 문화유산이 지니는 역사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있는 우리 시대에 고려문화는 우리사회가 추구해야할 문화의 방향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중앙문화의 질의 문화와 달리 지방문화는 양의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의 각각 독자성을 가진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그에 비해 조선시대는 유교문화라는 단일한 문화가 정착했습니다.


고려시대 문화는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지방문화와 중앙문화가 별개의 문화로서 폐쇄성을 띠지는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또 다른 특징인 통일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통일성은 다양한 문화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 구체적인 예가 팔만대장경 조성사업입니다. 이 사업을 주도한 최씨정권은 조판작업을 통해 중앙과 지방을 묶어 민심을 결집시켜 몽골과의 항쟁을 효과적인 수행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 작업은 중앙과 지방의 모든 작업을 중앙과 지방의 모든 계층이 참여해 이루어졋다는 점에서 중앙과 지방문화를 하나로 묶어 통일성을 추구한 고려문화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2)고려시대의 사상 


고려문화의 특성인 통일성을 추구하는 경향은 사상 부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바로 팔관회인데, 이는 각 지방 단위에서 행해지던 다양한 제의 형식인 성황신앙이나 향도신앙을 묶어 사상적인 통일을 추구했던 의례입니다.


그렇다면 팔관회가 시행될 수 있었던 사상적인 토양은 무엇일까? 이는 우리가 흔히 알려진 대로 고려의 국교는 불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고려왕조는 매우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공존하는 사상풍토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향도신앙과 성황신앙입니다.


향도신앙은 부처님에게 비는 기불 신앙으로 불교적인 요소가 강한 지방사회 주민의 신앙 형태입니다. 이들은 매향행위뿐 아니라 조직을 통해 각종불상이나 석탑을 세운다든가 하는 공동 노동을 함으로서 마을과 공동체를 유지해가는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성황신이란 마을이나 공동체를 지켜주는 신이라 뜻하며, 이러한 신을 믿는 행위를 성황신앙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지방사회의 성황신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국가차원의 큰 경사나 위기 시에는 성황신사에다 작위를 부여하거나 제사를 지내고 토지를 지급 했습니다.


12세기 이후 유교가 점차 확산되면서 고려사회에서 이러한 신앙행위가 많이 약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려정부는 이러한 신앙행위를 아예 폐지하거나 방치한 것이 아니라 국가질서 속에 수렴하는 정책을 취합니다. 지방사회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한편으로는 통일성을 유지하려는 고려 특유의 정책이 신앙 형태에도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2010년 전후에 학부 토론용 소논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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