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
어제는 엄마 머리를 염색해 드렸다.
-염색해 드렸다와 염색했다 사이에서 어떤 말을 쓸까 고민하다, 해 드렸다로 써본다.-
어르신 염색 심부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시어머님 머리 염색을 두 세 번 해 드린 적이 있고, 몇 년 전 엄마가 어깨 회전근개 관련 수술을 받았을 때 염색을 처음으로 해 드린 적이 있다.
엄마 머리는 뿌리부터 전부 하얗다.
“나는 엄마를 닮았나 봐.”
“왜?”
“나도 흰 머리가 많거든.”
“벌써? 왜 그런 것만 날 닮았냐, 아빠 안 닮고.”
아빠는 흰머리가 아주 더디 나는 편. 큰아빠는 팔순이 넘었는데 접때 보니 이제사 흰머리가 조금 보이더라며 엄마는 놀라워하셨다.
“어쩌겠수. 좋은 것만 골라 닮을 수는 없잖소.”
두 달 만에 염색하는 것인데 사 놓은 염색약이 진한 갈색밖에 없었다. 머리를 염색하고 샴푸로 두어 번 박박 씻어도 얼굴 가장자리 묻은 염색약이 바로 지워지지는 않았다.
“진한 검정으로 해야 했나 봐.”
하얀 머리가 연한 갈색 정도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더 짙은 색으로 염색을 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흰머리로 마음이 심란했던 엄마는 이것만으로도 만족하신 듯.
“이리 손 줘보시오.”
일전 일본 여행에서 생일자 손톱깎이가 있어 사 왔었는데, 8월생인 엄마의 손톱깎이는 손톱받이 인형이 다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색감이 마음에 드는지 ‘참 이쁘다야.’ 감탄하신다. 동글 넓적한 손톱이 자르기가 좋아, 손톱도 깎아드린다. 지나가는 말로 들으니 잘 안 보이시는지 손톱을 안 깎아 낮에 큰언니가 잔소리를 했던 모양. 깎아 준다고 하면 당신이 깎는다고 고집부린 뒤 안 깎으시니, 색감에 정신 팔리신 사이 얼레벌레 손을 잡고 손톱을 깎는다.
시어머님 머리를 염색했을 땐, 서로 조심스러운 것도 많아서 그다음부터는 어머님이 해달라는 소리를 안 하셨는데, 내 엄마 머리를 염색하면서는 이리 오시오, 돌아앉아 보시오, 고개를 돌려 보시오, 숙여 보시오, 솜씨도 없는 초보 염색사가 요구하는 것도 많으면서도 맘이 편했다.
친정을 나서려는데, 잠옷을 입고 목수건을 두른 엄마가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며 졸린 눈을 끔뻑거리신다.
“아야, 머리 감았더니 시원타야.”
가려운데 긁어 드려 마음도 몸도 시원하신 모양.
“엄마, 엄마.”
“응.”
“이번에 고향 집 정리하러 내려가잖아.”
“응.”
“흰 종이에 뭐 가지고 와야 하는지 생각날 때마다 써보시오.”
“칠부바지.”
“응?”
“니가 막내 입으라고 보내 준 칠부바지.”
“안 입길래 내가 입었거든. 그게 편했는데.”
“칠부바지? 그것 말고는 없어?”
“응. 없어.”
“귀중품 없어?”
“없어, 없어.”
두 달 전에 이주를 위해 카니발 렌트해서 부모님 모시러 갔었는데, 그때 여행 가방 하나 싸 온 짐이 거의 전부였다. 십 년 넘게 산 집에서 필요한 건 그거 하나라니. 내가 둘러본 고향 집 세간과 살림은 많았던 것 같은데. 이곳에 있는 것들로 이미 족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별로 소유가 중요하지 않은 성정 이어 그러실 수도 있고, 아님 기억이 안 나시려나.
이주 한달 전부터 마음한귀퉁이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뒤숭숭하고 입맛이 없다고 하시더니, 너무 잘 적응해서 두고 온 옛것들도 떠올리지를 못하시니 좋은 사인으로 봐야 하겠지.
고향 집의 것들은 낡고 헌것들이 많아 세째가 부모님과의 합가를 준비하며 많은 것을 새로 구비하기는 했었다. 2월은 앉아만 있어도 괜스레 마음이 분주한 달. 설도 있고, 먼 거리 오가며 거의 처분 수준의 고향 집 짐 정리도 해야 하고, 아이의 상태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24년 1월의 마지막 날, 엄마의 머리를 염색해 드렸다.
개운해 하셨던 그 얼굴을 기억하며 2월 한 달도 호기롭게 스타트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