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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벨라 Jul 02. 2024

[이름들]

백구야,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열 살 무렵 우리 집은 ‘백구’라는 개를 키웠다. 백구는 털이 하얗고, 까만 눈에 쫑긋한 귀를 가진 영리한 개였다. 그 시절 우리 동네 개들은 이름이 많이 겹쳤다. ‘메리’, ‘바둑이’, ‘해피’, ‘누렁이’로 거의 돌려막기를 하는 형국이었다. ‘백구’도 흔한 이름이었지만 내 기억으로 우리 동네에서는 유일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특히 오빠와 나를 잘 따랐다. 끈에 메어있지 않으면 어디라도 따라올 기세였다.


 그즈음 내게 반갑잖은 별명 하나가 생겼다. ‘*백*’, 이름의 가운데 자인 ‘백’ 자를 따서 친구들은 나를 ‘백구’라고 불렀다. 우리 집 개 이름을 의식한 지극히 장난스러운 별명이었다. 한번 생긴 별명은 학년이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별명이 맘에 들지 않아 속이 상했던 난, 우리 집 백구 이름을 덜 부르게 됐다. 괜히 우리 백구까지 손해를 본 셈이다. 하지만, 지우고 싶은 별명도 백구와의 끈끈한 정을 막지 못했다. 백구는 학교 갔다 돌아오면 제일 먼저 나를 반겨줬다. 엄마 아빠가 안 계실 때도 늘 함께였다.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백구가 보이지 않았다. 마루 밑, 뒷마당, 창고를 다니며 ‘백구야, 백구야’ 아무리 외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날 우리 동네 개 몇 마리가 한꺼번에 사라졌다고 한다. 농번기 바쁜 틈을 타서 낯선 사람들이 트럭을 가지고 다니며 개를 훔쳐 갔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에 오빠와 나는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저녁상에서 우리가 숟가락을 들지 않자, 엄마는 그만 울고 밥 먹으라며 타이르셨다. 소용없었다. 급기야 아버지가 큰 소리로 우리를 꾸짖으셨다. 그래도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부모님은 침울한 분위기로 식사를 마치셨다. 그날 밤 아버지는 급체하셨고 백지장 같던 아버지의 얼굴과 찬 손이 잊히지 않는다. 소화제를 드셔도 나아지지 않았기에 엄마는 아버지 엄지손가락에 피를 모으고 바늘로 찔러 검붉은 피를 빼내셨다. 다행히 안정되셨다. 그 이후에는 개를 키운 기억이 없다. 아마 ‘메리’도 ‘누렁이’도 우리 집을 거쳐 간 것 같은데 남아있는 기억이 거의 없다.     

 백구와 헤어진 지 35년 정도 흘렀을 때 친정집에 또 다른 ‘백구’가 들어왔다. 혼자 되신 데다 암 투병 중이었던 엄마는 시골집에서 계속 사시길 원했다. 그런 엄마가 걱정된 오빠가 친구에게 부탁해서 백구를 데려왔다. 엄마는 처음엔 싫다 하셨다. 하루 이틀 지내보시곤 잘 먹고 꼬리 흔드는 백구에 금방 익숙해지셨다. 그 아이는 엄마를 졸졸 따라다녔다. 편찮으신 엄마는 백구 밥을 주기 위해 몸을 일으켰고 그 덕분에 당신 식사도 챙기게 된다고 하셨다. 백구는 엄마의 마실길에도 노인정에 갈 때도 함께였다. 그렇게 엄마와 백구는 절친이 되었다. 백구의 몸이 더 커져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 무렵부터 끈에 묶어 키웠다. 묶인 후부터 엄마에게 더 크게 뛰어오르고 더 세게 꼬리를 흔들었다. 엄마는 그런 백구를 감당하기 버거워하면서도 의지를 많이 하셨다.

  치료를 위해 오빠 집에 와 계실 땐 큰집에 맡겼다. 몸이 괜찮아지면 백구가 있는 시골집에 내려가고 싶어 하셨다. 그런 생활은 여러 번 반복됐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백구를 큰집에 맡긴 채 엄마는 오빠 차에 올랐다. 그게 백구와 엄마의 마지막일 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엄마는 다니던 병원에서 또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장기 입원을 하셔야 했다. 엄마의 회복을 기약할 수 없었다. 기간이 길어지면서 백구는 원래 주인인 오빠 친구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파란 트럭을 가지고 백구를 실어 갔다고 한다.     


 어릴 땐 ‘백구’라는 별명 때문에 그 이름을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두 번째 하얀 개를 만났을 때 내가 바로 ‘백구’라고 불렀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백구’라는 이름을 가진 개와 평생 두 번 인연을 맺었다. 그 아이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타의에 의해서 혹은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첫 번째 백구가 내 뒤를 따라다니던 모습과 두 번째 백구가 엄마와 나란히 걷던 장면이 생각나서 가슴이 저리고 슬픈 감정이 든다. 게다가 두 백구 모두 트럭에 실려 떠날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 백구들에게 세상은 유독 거칠고 가혹했다. 지금도 ‘백구’라는 이름이 큰 파도처럼 슬픔으로 덮쳐올 때가 있다. 그 슬픔의 원인은 엄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제일 클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어쩌면 나와 엄마의 백구에게 그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백구야, 우린 느닷없이 이별했구나. 그 상황이 얼마나 무서웠니?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와 울 엄마에게 친구가 돼 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이젠 두 백구와 엄마, 나 모두가 평안함에 이르길 바랄 뿐이다.


#이름들#백구#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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