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정리하다가 냉동실 문 쪽 보관 통에서 편강이 담긴 봉지를 발견했다. 무려 세 봉지나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편강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첫맛은 단맛으로 시작하지만, 한동안 입에 물고 있으면 생강의 알싸한 향과 함께 매콤한 맛이 퍼지고 온몸에 온기가 돈다. 엄마가 힘들게 만들어 주신 것을 먹어보지도 않고 그저 냉동실에 넣기 바빴다. 돌아가신 엄마께서 담가 주셨던 된장, 고추장, 간장, 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 사라졌지만, 편강만은 이렇게 남아 있었나 보다. 갑자기 목이 메었다. 엄마의 마지막 음식으로 세상에 다시없을 귀한 것이 되는 순간이었다. 입맛이 변했는지 엄마의 사랑 때문인지 편강 한 조각으로 온몸이 데워진 그날부터 엄마가 생각날 때마다 한 개씩 입에 넣는 버릇이 생겼다. 향기가 전해주는 추억은 순간순간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어릴 적 가을 들녘엔 대나무 모양을 한 생강밭이 끝도 없이 펼쳐졌었다. 어른들이 생강 뿌리만 신경 쓸 때, 아이들은 버려진 잎과 줄기를 모아서 놀이 삼매경에 빠진다. 흙바닥을 잎으로 덮고 사각으로 탑처럼 높이 쌓아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을 짓는데, 보통 5~6명 정도는 거뜬히 누울 수 있는 ‘지붕 없는 집’이 된다. 아늑한 사각 집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까지 다 소환하고 나서야 현실로 되돌아온다. 가끔 시장에서 생강 뿌리만을 쌓아놓고 파는 걸 보면 그 시절 우리의 장난감이 돼 준 생강 줄기와 잎은 어찌 됐을까 궁금해진다.
생강은 습하고 기온이 높은 곳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서산 지역의 특산품으로 흔히 볼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생강이나 외래종에 비하여 향이 6~7배 높고 매운맛이 강하며 육질이 단단하다. 보통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하는데 그때가 가장 향긋하다. 이것으로 생강차, 생강청, 편강 등을 만들고, 갈아서 소분해 냉동실에 두고 양념으로 쓰게 된다. 생강을 이용해 만든 한과도 있는데 서산 생강의 향이 한과와 잘 어우러져 맛의 우수함을 인정받은 지역 대표 특산물이다.
우리 집에서는 엄마께서 바쁜 일이 끝나면 아버지를 위해 생강청과 가족의 간식으로 편강을 만드셨다. 생강청은 생강을 얇게 저며서 꿀을 듬뿍 넣어 항아리에 담아 서늘한 곳에 놓아두셨다. 아버지께서는 찻숟가락으로 한 스푼씩 그냥 드시거나 따뜻한 차로 우려 드셨다. 어느 날 호기심에 몰래 한 스푼을 입에 넣어봤는데 ‘아! 그 달콤함이란’ 숙성이 된 생강청은 매운맛은 싹 사라지고 생강 향은 진하지만 달콤한 맛이 강해 자주 훔쳐 먹었다. 몰래 먹었던 생강청 맛을 언니와 오빠도 모를 리 없었다. 우리는 종종 웃으면서 그때의 은밀한 추억을 공유하곤 한다. 아마 생강청은 그 시절 어린아이에게도 달콤한 간식으로 더할 나위 없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만드는 편강은 생강청보다 좀 더 손이 많이 간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신 간식이었기에 이 또한 연례행사처럼 날을 잡아 만드셨다. 아버지와 엄마는 생강껍질을 밥 수저로 긁어 벗겼다. 그래야지 생강 속살을 온전히 지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깨끗하게 다듬어진 생강은 여러 번 물에 씻어 채반에 건져 놓는다. 노란 생강을 적당한 크기로 어슷하게 썬다. ‘저렇게 많은 걸 누가 다 먹어?’ 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편강을 만들고 하루 이틀은 온 집안에 생강 향이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잘 말린 그것은 보이는 곳에 두고 오며 가며 먹을 수 있게 했지만, 아이들에겐 인기가 없었다. 나머지는 잘 보관해 두셨다가 설날 손님 접대할 때 술안주로 내주셨다. 기름진 음식으로 더부룩한 어른들에겐 가볍고 매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는 편강이 딱 좋았을 것이다.
본래 생강은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 체온을 높여주니 자연히 면역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몸에 좋은 생강을 생으로는 먹을 수 없고 양념으로 먹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간식으로 만든 것이 바로 편강이다. 이것은 가끔 음식 재료로 쓸 때가 있는데 생강이나 설탕이 필요한 생선조림 요리에 넣으면 간편하다. 갈아 놓은 생강이 없을 때 편강 몇 조각이 생선의 비린내와 조림의 단맛을 동시에 잡아주는 데 그 역할을 충분히 한다. 간식으로 먹는 편강은 원성분이 우리 몸속에 있는 나쁜 균을 살균해 주는 역할을 하고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도 있어서 소화에도 도움이 된다니 그야말로 겨울 건강 간식이다.
어릴 땐 단맛보다도 매운맛이 강해서 거의 먹지 못했다. 결혼해서도 그때 기억 때문인지 해마다 엄마가 만들어 주셨지만 잘 먹지 않았다. 그 후로는 열어보지도 않고 보관 통으로 바로 직행해 버린 것이다. 잊고 있던 것을 발견해서 엄마가 생각날 때마다 한두 조각씩 먹다 보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엄마의 편강이 다 사라지기 전 엄마가 만들던 기억을 더듬고 영상을 찾아보며 편강을 만들어 봤다.
그 옛날 엄마처럼 생강 껍질을 밥 수저로 벗기고 깨끗이 닦았다. 뽀얀 속살을 드러낸 생강의 빛깔은 정말 예뻤다. 하나하나 손수 하다 보니 못 보던 게 보이고 생강 한 조각도 귀하게 여겨졌다. 그것을 먹기 좋은 크기와 두께로 썰어서 매운맛을 빼기 위해 일정 시간 동안 물에 담가 놓는다. 건져 올려 살짝 데친 후 설탕과 섞어 버무린다. (1:0.8 비율) 이것을 중 불에서 끓이는데 처음엔 생강과 설탕이 끓으면서 수분이 나온다. 약 불로 줄여서 한참 동안 끓이다 보면 생강표면이 마르기 시작하고 약간 지루하다 싶을 때까지 오래 저어준다. 신기하게도 수분이 마르면서 생강표면에서 설탕 입자를 다시 토해내는 걸 볼 수가 있다. 겉이 설탕 가루로 하얗게 됐을 때 불을 끄고 채반에 건져서 하루 이틀 말려주면 오래 두고 먹어도 변치 않는 맛의 편강이 완성된다.
엄마의 편강 통 옆에 내가 만든 편강이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식감이 너무 부드러워 조금 아쉽지만 이렇게 엄마의 편강 레시피를 살릴 수 있었다는데 안심이 됐다. 작은 편강 한 조각이 온몸에 온기를 퍼뜨렸다. 온기는 위로를 준다. 위로의 방식이 너무 투박하고 갑작스러웠다. 입에 넣은 그 한 조각이 부모님을 떠오르게 했고 직접 만들어 보면서 엄마와 아버지의 더없이 정성스러웠을 마음속으로 빠져들게 됐다. 잘 먹지 않아도 한쪽이라도 먹어 주길 기대하며 만드셨을 그 마음을 이해했다. 신비로운 힘으로 관심 밖이었던 음식의 명맥이 이렇게 이어졌다. 엄청난 속도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지만 중년이 된 가을의 끝자락에서야 부모님의 그 마음을 헤아리고 나도 그렇게 조금씩 닮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