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순이
나이만큼 오래된 단짝이 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친구다. 사촌이지만 형제만큼 가깝게 지내왔고 내 호적이 1년 늦어져 같은 해 입학했다. 그러면서 온전한 친구가 됐다. 단짝으로 지내다 보니 척하면 척인 관계가 됐다. 오후에 사촌에게 걸려온 부재중전화가 떠 있었다. ‘가을이 이뻐서 소식 전하려 전화했나?’하고 통화버튼을 누르려는데 연달아 카톡 메시지 5개가 울린다. 사진 3장과 메시지 2개다. 파란 가을하늘과 단풍 든 오솔길, 빨갛게 익은 아기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아가위나무를 찍어 올렸다. 그리곤 “잘 지내지?” “가을향기가 난다”란 메시지를 보내왔다. 짐작이 맞았다.
‘가을향기’라는 말에 그러잖아도 울긋불긋한 가을에 한창 감동하고 있던 내 마음을 덩달아 드러내고 싶었다. 그 시절 가을이면 함께 산에 쏘다니며 밤과 상수리를 주웠다. 우리의 바지 밑단에는 쇠무릎, 도꼬마리, 도깨비바늘이 언제나 붙어 있었다. 노란 들국화가 보이면 꽃송이를 손으로 휘휘 젓다가 코를 킁킁거렸다. 꿀을 빨던 황금색 벌들이 앵앵거리다 꽃 위에 다시 앉을라치면 신발로 재빨리 잡아 뱅글뱅글 돌려 벌들을 귀찮게도 했다. 운이 좋은 날은 잘 익은 머루 한 송이 발견해 정신없이 따먹다가 손과 입을 온통 까맣게 물들였다. 붉게 익은 해당화 열매는 발견 즉시 따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주황색으로 제법 잘 익은 열매는 쓱쓱 닦아 씨를 빼고 과육만 베어 물면 맞춤 간식이 됐다. 호주머니가 부족할 땐 윗도리를 접어 올려 열매를 담았다. 캥거루 배가 될 때까지 가득 담아 돌아오면 바로 실에 꿰어 해당화 목걸이를 만들었다. 갈대숲을 헤맬 땐 부드럽게 간질거리는 갈대로 간지럼도 태웠다. 오솔길에선 우수수 떨어진 낙엽을 두 손 가득 쥐고 서로의 머리에 뿌리며 무언가를 축하해 줬다. 마을에 하나 밖에 없던 11촌 아저씨댁 아가위나무. 때론 당당하게 때론 살금살금 사과 송이를 따서 새콤달콤한 맛을 즐겼다. 각자 추억의 저장소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다른 에피소드를 가득 담아놓고 그때그때 꺼내 들면 우리들의 이야기는 마를 새가 없다.
어릴 때 좋은 추억은 평생 살아갈 힘을 준다.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면 그 힘은 몇 배가 된다. 늦은 오후 동네 친구 예닐곱 명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했다. 내 사촌이 술래가 됐다. 내가 대신 술래를 자처했다. 늘 그렇듯 금세 술래에서 벗어날 것 같아 대신했건만 그날따라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었다. 급기야 아이들을 잡으려고 뛰다가 밭에 처박혀 입에 흙이 들어가는 불상사가 생겼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어대는 바람에 당장의 창피함을 감추려 버럭 화를 내며 못난 모습을 보여줬다. 그 와중에도 넘어질 때 짚은 곳이 국화꽃 무더기여서 손과 옷에선 국화 향이 폴폴 났다. 지금도 국화 향만 맡으면 그때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당시 부정적인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모든 것이 정겨움으로 뭉뚱그려져 아름다운 사진 한 장으로 남았다.
사촌에겐 친동생들이 셋이나 있었다. 반면 난 집에서 막내였다. 그래서인지 사촌은 사춘기가 조금 빨랐던 것 같다. 그녀는 혼자 있길 좋아했고 책을 많이 읽었다. 독서보단 놀기 바빴던 나는 사촌이 감명 깊게 있었다며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이야기를 해줬을 때 그 자리에선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나중에 읽게 되면서 주인공 제제와 뽀루뚜가 아저씨를 보며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친구는 나이와 무관하다는 것을 알았다. 라임 오렌지 나무 밍기뉴를 베어야 한다는 것을 안 제제가 “아픔은 매를 맞아서 생기는 것도, 병원에서 상처를 꿰맬 때 겪는 것도 아니다. 아픔이란 가슴 전체가 모두 아린, 그런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라고 말한 장면을 곱씹어 오랫동안 사유했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희로애락이 쌓이고 쌓여 우리는 단단해졌고 더 많은 이야기를 품을 수 있었다. 툭 치면 툭 하고 나올 정도로 각자의 삶에 촘촘히 스며들어 있다가 언제라도 나올 준비가 돼 있다.
생각해 보면 사촌과 붙어 지낸 건 15년 남짓이다. 떨어져 지낸 세월이 세 배가 훨씬 넘는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만나도 매일 보는 사이 못지않다. 그녀와 함께라면 쉴 새 없는 수다도 좋지만, 침묵도 좋다. 침묵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다. 사촌이 기억하는 내 모습, 내가 기억하는 사촌의 모습이 종종 색다른 재미를 줄 때가 있다. 흐릿한 기억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며 조각난 기억의 퍼즐을 맞춰가도록 서로 도와준다. 소중한 순간을 따로 또 같이 기억하며 되새길 때마다 그런 경험이 살면서 내 삶을 얼마나 풍부하게 만들어줬는지 새삼 감동하게 된다. 현재의 내 정서에 많은 영향을 끼친 시점은 한창 정체성이 형성됐을 어린 시절이다. 그 시절 이야기엔 재미, 싸움, 슬픔, 웃음 등 감정의 높낮이가 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시점에서 보면 반짝이고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좋은 추억을 온전히 공유하며 이야기가 마르지 않는 것은 행운이고 행복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온전히 기억하고 공유하면서 그 위에 새로운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그 바탕엔 언제나 편안함과 따뜻함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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