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나는 상실감이 드는 기분을 무척 싫어한다. 잃어버렸다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부채의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건망증으로 여럿 물건을 잃어버려 보고 나면 알게 된다. 어떻게 잃어버리든 나의 잘못으로 느껴지는 상황을 견디기는 쉽지 않다. 이건 내가 갖가지 사물들에 지나치게 애정을 많이 기울이는 탓일 수도 있다. 비누에 대고 혼잣말을 늘어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잃어버린 물건들이 어디 있어야 했는지는 기억하면서 산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상실감이 느껴질 때면 그 감정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감정의 동요에 휘둘리지 않는 일이 극복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다스리면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유독 나한테만 벌어지는 일 같다고 느껴지는 사고를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겠다고 믿었다. 감정을 배제하는 연습으로 얻어지는 감상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었으니까.
가후쿠는 우연히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게 된다. 그 이유를 물어볼 새도 없이 아내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시간이 흘러서 가후쿠는 연극제에 초청을 받아 작품의 연출을 맡게 된다. 거기서 운전사 미사키를 만난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둘은 각자의 과거와 아픔을 알아간다.
감정을 배제하는 연습으로 얻어지는 감상을 생각해볼 것. 연출자인 가후쿠가 배우들에게 주문했던 일이기도 했다. 감정으로 유발되는 행동을 억제하고 텍스트 자체에서 느껴지는 감상을 행동에 옮긴다. 그의 태도는 슴슴한 평양냉면의 맛을 음미하려는 미식가의 행동 양식으로 보였다. 일에 있어서도 그랬지만 일상생활에서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 유들유들하고 적당하게 말하는 방법을 아는 것 같았다. 그는 일정한 온도로 말을 받고, 말을 했다. 정온(定溫)과 정속(定速)으로 행동했다. 가후쿠는 반복적이고 기계적으로 일을 수행했다. 운전하는 차에서 카세트테이프를 틀어 건조하게 대사를 읊으며 연습했다. 어찌나 끊임없이 감정을 내몰았는지 나는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척이나 무미건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대신 말한다. 미사키에게 상실감에 대한 일종의 죄의식과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내가 당신의 아버지였다면' 어떻게 말하겠다고 본인의 생각을 전달한다. 간접적인 의사표현은 피상적인 대화를 나눴던 가후쿠와 오토의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머리에서 한번 걸러진 감정은 문자 그대로의 주장이다. 구태여 직접적인 표현을 자제해왔던 건 연출자로서 가지고 있던 철학에 기반한 행동이었다. 가후쿠는 마음을 아끼지만 영화는 그의 심정을 다양한 환경으로 묘사한다. 길고 긴 터널을 나오면 비가 내리고 있고, 비 오는 마음을 넘어서면 꽁꽁 언 하얀 눈발이 흩날린다. 내내 드러내지 않고 앓다가 끝에 가서 떨구는 눈물 한 방울의 무게는 가늠할 수가 없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감정을 감각할 시간을 준다. 한 장 한 장 공들여 수기로 써 내려가는 이야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 원작을 시각화한 다양한 영화 중에서도 유독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름에 행간을 옮겨놓은 느낌이었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무언가를 나누려는 마음보다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자연스러운 걸 보면 상실감은 본능에 새겨진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감상이 그랬다. 무척이나 본능적이고, 넓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에 고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는 그 마음을 구태여 끄집어낸다. 뭐랄까 마치 세상에 나와야 할 타이밍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이 세계에 이런 이야기가 필요할 때가 되었지'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랄까.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감정을 다룬다. 현대적인 이야기들이 감성을 다루는 것과는 다르다. 감성을 다루고 있기에 현대적인 느낌을 내려면 자극 자체를 다루거나 자극의 변화에 밀접해야 한다. 하지만, 고전적인 이야기는 감각을 털어내는 과정이 비교적 길다. 이 영화는 충격이 다가오는 전후의 상황들을 끈질기게 설명한다. 점진적인 변화, 그라데이션으로 칠해진 아픔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상황은 유예될 뿐 갚아야 하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감정은 유예할 수 있다. 언제가 되었든 갚아야 하지만 미루는 건 가능하다. 러닝타임 동안 한참을 미뤄왔던 감정은 이 이야기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동기화된다. 그때가 되어서야 눈물을 삼키지 않고 흘려보낼 수 있다.
잔존한 마음을 털어내는 과정에서 <눈물을 마시는 새>에 나오는 키탈저 사냥꾼의 형제 새 이야기, ‘눈물을 마시는 새’가 떠올랐다. 그 안에서 활용되었던 비유와 영화의 상황이 매칭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눈물을 마신다’는 심상이 묘하게도 가후쿠의 얼굴로 읽혔다. 도저히 몸 안에 둘 수 없어 흘러 내보내는 해로운 것, 눈물. 눈물을 마시는 새는 해로운 것인 눈물을 마시기에 가장 빨리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답게 운다. 가후쿠는 묻어두었던 아픔과 대면하고, 슬픔을 느껴서 눈물을 흘려보냈다. 더이상 삼키지 않기로 고 내뱉어서 보냈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을 마주할 때 삶의 의지는 소박하게 피어난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