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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l 24. 2023

히가시노 게이고 소고(小考)

《라플라스의 마녀》 외


1) 라플라스의 악마 또는 도깨비는 초기조건만 알면 우주의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의 가상존재로, 18세기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가 쓴 《확률에 대한 철학적 시론》의 다음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가 그 이전 상태의 결과이며 앞으로 있을 상태의 원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연을 움직이는 모든 힘과 자연을 이루는 존재들의 각 상황을 한순간에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우주에서 가장 큰 것의 운동과 가장 가벼운 원자의 운동을 하나의 식 속에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가 그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모티브를 차용해 대기의 카오스적인 유체역학을 코스모스적으로 완벽하게 예측하는 천재소녀 캐릭터를 창조하였고, 《라플라스의 마녀》라 일컬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그리고 프리퀄에 해당하는 《마력의 태동》에서도 작가는 이 놀라운 능력의 근원에 대해 획기적 뇌실험이라는 설정 말고 아무런 논리적 설명을 하지 않는다. 하긴 결정론적 소재에 대고 데우스엑스마키나 외 어떤 설명을 더 할 수 있겠는가.



2)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있는가? 운명을 타파하고 싶은 우리는 자유의지의 존재를 극진히 추앙하지만, 그조차도 신경세포체의 활동전위에 따른 전기적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리벳 실험 류의 뇌과학의 어떤 논의들은 지성의 존재의지마저 좌절시킨다.

3) 양자역학이 결정론을 깬 듯한 오늘날, 완벽한 라플라스의 악마가 정말 있다면 못 미더운 인간보다 차라리 AI에 자유의지를 부여하고 싶으리라. 그렇담 자유의지가 주어진 인공지능은 결정론적 미래에 과연 수긍할까? 정해진 운명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가능한 상상 아닐까? 결정론을 신봉한 과학자 라플라스의 이름 피에르시몽은 프랑스어로 시몬 베드로를 말한다. 닭이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의 미래를 알고 있었던 이는 악마가 아니라 예수였으니 이제부턴 라플라스의 지저스라고 개칭해야 하는 건 아닐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답게 별 잡생각을 다 해본다.




4) "히가시노 게이고는 쉽게 읽힌다. 이사카 코타로보다 가볍다."라고 언젠가 촌평한 적이 있다. 세대부터 다른 두 작가를 맞비교할 의도는 없지만 밀실트릭 같은 본격추리물과 메시지를 싣는 사회심리물 사이, 차이가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라플라스의 마녀》와 《마리아 비틀》의 차이랄까. 게이고의 전자는 사람을 어떻게 기발하게 죽이느냐 방법론의 재미라면, 코타로의 후자는 사람이 사람을 죽여선 안 되는 이유란 뭣인가 인식론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누가 더 낫고 그런 건 없다. 둘 다 재밌다. 재밌으니까 둘 다 롱런하는 것일 게다.

5) 이들의 작품이 베스트셀러인 것은 떡밥 투척과 회수가 맛깔나기 때문이다. 찰진 떡밥 플레이어는 시간과 시점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비선형적(nonlinear) 사고에 능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수백 쪽 넘는 분량에 깔아놓은 수많은 퍼즐을 타이밍 맞춰 척척 풀어내기 쉽지 않다. 나는 이것을 '메타인지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순간에 휘둘리지 않고 전체맥락을 이해하기. 거인을 올려다보며 정수리를 상상하기. (뻔한 표현이지만) 달 대신 손가락만 갖고 최소한 옥신각신하지 않기.



6) 때로 단편에서 장편과 다른 재미를 찾곤 하는 것은 작가의 넘치는 재치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슨 발상을 했는지, 어쩌다 그런 발상을 하게 됐는지, 심지어 발상에 발상이 더해져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부터가 실제인지, 메타인지가 자극되는 체험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이 딱 그렇다. 히피디의 메이킹필름이라고나 할까. 시청자, 아니 독자의 피드백까지 콘텐츠화하는 메타 리얼리티라고 할까. 세금이 아까워서, 아이디어가 고갈돼서, 치매가 와서, 은근슬쩍 때우려 드는 작중 소설가들이 왠지 본인인 건 아닌지 피식대며 읽게 되는 유쾌한 옴니버스 소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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