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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pr 13. 2024

공감은 본능일까 능력일까 (심퍼시 vs 엠퍼시)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브래디 미카코의 신작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를 리뷰한 글입니다.


 in one's shoes : ~ 의 입장이 되어 보다
(e.g. Put yourself in my shoes. 내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봐.)



- 공감, 하십니까?


감정이입은 우리네 타고난 능력 같다. 어려운 이웃 사연에도 이입하고, 드라마 캐릭터에도 이입하고, 원산지(?)로 강제 압송된 푸바오에게도 이입해 대쪽 같은 성원을 거국적으로 보낸다. 떠들썩한 사회적 사건엔 이입의 정도가 공감을 넘어 공분으로 번지 일쑤요, 말하지 않아도 안다며 과자에서도 정을 떠올리는 민족성은 미운 정 고운 정 남의 사정에 오지랖을 가능케 한다. 타인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는 하품도 따라 하지 않는다는데... 그런데 이런 공감능력, 어디서부터 나오는 걸까?


눈치 빠른 분들은 눈치챘겠지만, 이 책의 제목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는 영어 관용표현 in one's shoes를 직역한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누구누구의 입장이 되어보다 되겠다. 입장() 자체가 그 장소에 선다는 얘기니 뜻이 상통한다. 그런데 #공감에세이 인스타갬성 자극하는 목만 보고 몽글몽글한 내용을 기대했다간 초장부터 화들짝 놀랄 것이다. 이 책, EQ보다 IQ, 촉촉한 감성 말고 딱딱한 이성에 호소하는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공감에는 심퍼시가 있고 엠퍼시가 있는데 이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며 엠퍼시적 공감은 감정이 아니라 지적인 능력으로 봐야 한단다.



- 심퍼시는 뭐고, 엠퍼시는 또 뭐냐


사전엔 sympathy와 empathy 모두 공감으로 번역돼 있지만, 그리스어 어원을 들여다보면 -pathy(느낌) 앞에 붙은 접두어 sym-은 with(함께)의 뜻이 강하고 em-은 into(들어가다)의 뜻이 강하다. 즉, 동정이나 연민의 느낌이 강한 심퍼시와 달리 엠퍼시는 의식적으로 역지사지를 해보는 이성적 능력이다.


심퍼시의 대상에는 가엾거나 사정이 딱한 사람, 나와 비슷한 의견이나 관심을 가진 사람, 내가 지지하는 조직에 속한 사람이라는 제약이 붙는다. 반면 엠퍼시의 대상에는 지정된 조건이나 제한이 없다. 딱히 가엾지 않거나 나와 의견이 다르더라도 엠퍼시를 발휘하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 보는 지적 작업이 가능하다. 내 취향이 아니어도 역지사지해 내는 엠퍼시는 그래서 학습이 필요한, 조금 피곤한 능력이다.


엠퍼시가 되지 못하는 단순한 공감이란 이렇다. 인간(뿐만 아니라 영장류, 조류)의 뇌엔 '거울 뉴런'이란 게 있어서 타인의 행동을 보거나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자신이 그 행동을 하는 것처럼 활성화되어 그걸 모방할 수 있다. 남이 다친 걸 보고 내 몸이 아픈 것처럼 느끼는 이런 즉각적인 감정은 본능적으로 작동한다. 이런 공감은 피상적이다.


책에선 몇 가지 영국의 사례를 든다. (저자는 영국 거주 일본인이다.) 영국 예지만 우리 사회에서 목격되는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용하자면,


예를 들어 영국에서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을 상상하면 범인을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극단적인 목소리가 SNS에 떠돌고 용의자를 호송하는 차량에 계란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도 냉정하게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이 되어본다면 당사자들은 불행한 사건을 잊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자꾸 사건이 뉴스가 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해자에게 복수할 마음을 먹는 것은 자신의 상상과 분노를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겠다며 실은 자기 신발을 신고 타인의 영역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꼴이다.


저자의 요지인 즉, 자신을 모델로 타인을 이해하려 드는  진정한 공감이기보다 동정이나 연민, 자기 투사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이런 종류의 공감은 자칫 타인에게 억지로 내 신발을 신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앞에서 거울 뉴런 이야기를 했지만, 예를 들어 같은 거울이어도 내 당한 만큼 너도 한번 당해 봐라 식으로 고약하게 쓰이는 미러링은 (원래의 의미가 이건 아니었는데) 역지사지보다 혐오에 가까울 것이다. 건설적인 공감을 시도한다면 내 신발을 잠시 벗어두고 신발장 전체를 조감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엠퍼시적 공감은 거듭 말하지만 훈련이 필요한, 피곤한 능력이다.



- 내 신발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무조건 내 신발은 벗고 남 신발만 신으면 공감이냐는 의문이 든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까지 피곤하게 남을 이해해서 내게 돌아오는 게 뭐냐 하는 본능적인 저항도 생길 수 있다. 신발이고 나발이고 어쨌든 나부터 살고 봐야 남을 이해하든 오해하든 할 거 아닌가 말이다.


오래전 피 끓던 20대 후반에 쓴 글 하나가 있다.


"이해란, 상대방의 자리에 서서 나를 보는 것".


문장이 나오기까지 자초지종의 디테일은 세월을 타고 희미해졌지만, 나름 진지했던 어떤 관계의 종착점에서 고민 끝에 찾은 한 줄이었다.  이해 못 , 상대를 탓하고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뭔가 납득할 만한 설명이 더 필요했었던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게 진정 가능한 일인지 깊은 의구심이 들었을 이다. "상대방의 자리에 서서"라고 쓴 부분은 타인의 입장에서 신발을 신어 보는 심상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문장을 좀 더 들여다보면 게서 끝맺지 않고 뒤에 한 구절을 덧붙였다.


"상대방의 자리에 서서 나를 보는 것".


뭘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어린 나이에도 왠지 그냥 뭉개고 넘어갈 수 없는 뭔가를 느꼈던 걸까?


그런데, 이 책의 저자도 첫머리에 비슷한 말을 남겨놨다.

'empathy'를 '공감'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 의문이 이 책을 쓴 동기였습니다. SNS의 '좋아요' 버튼처럼 공감, 공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는 다른 입장이나 의견을 가진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 타인에게 동화되어 쉽게 자신의 신발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empathy'의 본래 의미로, 개인도 사회도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두둥.


타인에게 동화되어 쉽게 자신의 신발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웬 자기 신발 타령?


남의 신발을 신어 보는 게 진짜 공감이라고 온갖 이타주의자 같은 소릴 하던 사람이 갑자기 시선을 홱 틀었다. 그것도 한 문단 안에서 곧바로. 모순 아닌가?


그런데, 이게 핵심이다.


타인의 신발을 신다가 자기 신발을 잃어버려선 안 된다는 것.


엠퍼시는 사실 위험할 수 있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엠퍼시에도 양면성이 있다. 감정적 엠퍼시가 과잉인 사람은 지나치게 자기희생적이며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 책의 표현을 빌자면 "과도한 교감에는 비용이 발생한다".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람을 사이코패스(psychopath) 또는 소시오패스(sociopath)라고 한다면, 반대로 너무 민감한 사람은 엠패스(empath)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주변의 생각이나 감정을 감지하는데 뛰어난 만큼 스스로는 매우 괴로워진다. 자기 견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니체에 따르면, 엠퍼시 능력자는 편견 없이 보려다가 그만 자아가 사라진다.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에게 악용되어 착취당할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 힘없는 쪽이 오히려 힘 있는 쪽을 배려한다. '회사가 어려우니까 사장님이 저러시는 거겠지', '정치인이 큰일 하려면 어쩔 수 없지'. 먼저 이해하려선의가 안타깝게도 감정노동으로 변질돼 버린다.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일부 리더들에게서 오히려 사이코패스적 기질이 발견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대인 조종기술이 되때문이다.



- 이타적이 되면 이기적이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밸런스다. 상대와 자신을 모두 포기하지 않는 균형감각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애정이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기주의는 타락한 것이고 이타주의는 순수한 것이라는 발상은 다분히 이분법적 사고다. 현실에서 이 둘은 뒤섞여 있다.


사실상 모든 사달은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온다. 이분법이야말로 원흉이다. 세상에는 흑 아니면 백, 좌 아니면 우만 있지 않다. 빨주노초파남보도 있고 회색도 옅은 것부터 짙은 것까지 수많은 그러데이션이 있다. 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층위의 다변화가 포인트다. 비유하자면 심장과 허파와 위장 같은 것이다. 순환/호흡/소화계는 서로 다르지만 대립되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서 상보하며 융합한다. 그렇게 한 몸이 된다.


무슨 말인가? 우리 얼굴은 하나만 있지 않단 말이다. 나는 직장에서 상사이지만 퇴근 후엔 학생일 수 있다. 평소 말수 적던 옆집 청년이 술자리에선 좌중을 웃기는 재담꾼일 수 있다. 내겐 부모의 얼굴도 있고 자식의 얼굴도 있으며, 누군가의 손님이면서 동시에 아르바이트생이기도 하고, 갑이었다가 순간 을이 되기도 한다.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정 상태에서 보이는 특정한 하나의 얼굴이 그 사람의 유일한 얼굴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어느 얼굴은 내 얼굴과 겹치기도 할 것이다. 우린 동시에 많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엠퍼시란 남의 얼굴이 나의 얼굴일 수도 있다는 걸 아는 능력이다. 이걸 깨달으면 이타와 이기가 통한다. 저자는 이타적인 건 이해타산적이라고 말한다. 이해타산의 능력이 고도로 발달하면 도리어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는 관용을 베풀게 된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렇다. 일종의 큰 그림을 보는 능력이다. 팬데믹에 만 살겠다고 마스크며 기초물품을 사재기하는 인간은 의료진이나 감염병에 취약한 저소득층의 위기가 거꾸로 본인의 상황을 악화시킬 거라는 전체를 보지 못한다. 눈앞의 하나만 탐하는 근시안으로는 큰 틀에서 작용하는 둘, 셋의 원리를 이해할 수 없다. 이타적인 행동이 자신에게도 이득으로 돌아올 거란 걸 이해하는 엠퍼시는 한 차원 높은 공감능력이다.



- 위험한 생각 거리들


엠퍼시적 공감을 좀 더 확장해 보면 흥미로운 화두부터 아슬아슬한 주제까지 다양한 사고실험을 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SNS의 '좋아요'는 좋은 공감인가.

인스턴트화된 공감 현대 사회에선 어떠한 의미가 될 수 있을까?


▶ 인스타그램에도 엠퍼시가 가능할까

https://brunch.co.kr/@ez1pd/196


엠퍼시의 윤리적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면 범죄자와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악인마저도 존중해줘야 하는가?

타인의 입장을 상상해 보는 과 그 사람에게 동조하는 것은 얼마나 별개인가?


매우 논쟁적인 주제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역사 문제 같은 것.


일제 강점기 친일 행위를 했던 민족 반역자들의 입장도 인정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인 엠퍼시를 유지하는 게 가능할까? 만일 우리가 그때 살았다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일본인인 저자는 흥미롭게도 정반대의 입장을 예시로 든다. 저자가 꼽는 엠퍼시의 달인은 독립유공자 박열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다. 일본 본토에서 조선인의 아내가 되어 투쟁하다 옥사한 일본 여인 말이다. 저자는 그녀야말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는 타인이라도 이성적으로 인정하고 상상해 보는 능력이 가능하다는 실제사례라고 본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사실 이 책은 처음부터 엠퍼시 말고도 다른 키워드 하나를 꾸준히 강조해 왔다. 바로 아나키즘(anarchism)이다. 소속에 강하게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신발을 신어 보기 어렵게 되는데, 가네코 후미코는 세상에 '소속된' 감각이 없이 성장한 사람이었기에 '친구 vs 적' 구도에서 자유롭게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는 얘기다. (박열도 아나키스트였다.)


저자는 무정부주의적 가치관을 도처에서 소개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는' 아나키즘과 '타인의 신발을 신어 보는' 엠퍼시는 매우 잘 통한다면서, 아나키즘은 폭력적일 것 같은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주체적 개인들 간의 상호부조의 철학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라는 의미심장한 전작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에서 태어나 영국에 정착한 저자의 관점이 짐작은 된다. 허나 내용간단치 않기도 하거니와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어서 깊이 다루진 않겠다. 그래도 생각은 해 볼 만하다. 사고실험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직접 읽어보시길 바란다. 참고로 한국어판과 달리 직설적인 일본어판의 부제는 '아나키적 엠퍼시의 추천' 『アナーキック・エンパシーのすすめ』이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법정 사진


- 그렇기에 공감은 짝으로 간다


엠퍼시는 복잡한 기술이다. 엠퍼시적 공감은 사고()라는 쿠션이 개입하는 만큼 발휘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타인이 처한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맥락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은 오랜 시간 훈련이 필요하다. 완벽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대가 변하면 사회상도 변하기에 엠퍼시는 계속해서 업데이트돼야 한다. 그에 비해 심퍼시는 간단하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발동할 수 있다. 또한 보편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늘 효과 만점이다.


심퍼시는 빠르고 엠퍼시는 느리다. 빠름과 느림에는 우열이 없다. 장단점이 있을 뿐이다. 공감 능력은 하나의 기술이다. 기술 자체에는 빛도 그림자도 없다. 좋고 나쁨은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SNS의 좋아요도 누르는 사람에 따라 깊이가 달라질 것이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 보는 일은 그런 맥락을 읽어 보는 작업이다. 맥락은 자신과 타인을 아우른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 보면서 동시에 내 신발을 폐기처분하지 않아야 한다. 균형 잡힌 이타와 이기는 모순처럼 보여도 모순이 아니다. 신발은 짝지어져 있다. 고로 신발은 두 짝을 모두 신어야 한다. 심퍼시든 엠퍼시든 거기출발할 것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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