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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Mar 16. 2024

류이치 사카모토, 끝을 준비한다는 것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고작 몇 차례 일어날까 말까다. 자신의 삶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어린 시절의 기억조차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많아야 네다섯 번 정도겠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름달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스무 번 정도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은 기회가 무한하다고 여긴다."


류이치 사카모토(1952-2023)는 일본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입니다.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글로벌한 인정을 받았고 우리나라에도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이 많습니다. 젊어서는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라는 전자음악 밴드로 80년대를 풍미했고, 나이 들어서는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 등 여러 굵직한 영화 음악을 맡으며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몰라도 마지막 황제 OST <Rain>이나 데이비드 보위와 연기 호흡을 맞췄던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속 <Merry Christmas Mr. Lawrence> 등은 귀에 익숙할 것입니다.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전위예술부터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활약인물입니다. 백남준, 이우환, BTS 슈가, 새소년 등 한국 예술인들과의 일화도 다양합니다. 왕성히 활동하던 그는 그러나 2014년 첫 번째, 2021년 두 번째 암 진단을 받고 투병 끝에 지난 2023년 유명달리하고 말았습니다. 이 책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의 인생 회고록입니다.


이상은 류이치 사카모토 씨에 대한 간략한 프로필입니다. 책을 읽독자들이라면 이 정도 프로필은 물론, 진작부터 그의 음악을 애정해 온 찐 팬일 가능성이 크겠지요. 그분들께 고백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위의 정보 이상 그에게 특별한 팬심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양쪽 팬들에게 욕을 쌍으로 들어먹을 고백이 되겠습니다만, 솔직히 이름 비슷한 다른 일본 뮤지션 유키 구라모토 씨와 헷갈린 적도 한두 번쯤 있었을 겁니다. (다시 한번 두 분의 팬들께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 적극적 용의선 상에 있지 않았달까요, 그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도 크게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책을 집어 들게 되었고, 특정 유명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사카모토 씨에 비하면 경미한 삶입니다만, 큰 틀에서 비슷한 분야의 일을 해온 것도 있고 또 예술에 대한 관점이 겹쳐 투영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암이라는 키워드가 제게도 익숙했던지라 이모저모로 삶과 죽음에 대한 공통의 상념을 엿보기도 했습니다. 어두운 분위기의 책일까 싶었는데 흥미롭게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자유'라는 화두였습니다.



- 자유에의 의지


류이치 사카모토의 삶과 언행을 보면 '자유'라는 가치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 전 2009년에 자서전 1부 격인 책 하나가 먼저 나온 게 있습니다.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라는 제목입니다. 제목에도 콕 집어넣어 놨듯이 형식이나 관습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그의 자유에 대한 집착은 곳곳에서 곧잘 읽힙니다.


돌아보면 저는 이때부터 작곡 면에서도 오선지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 같습니다. 오선지는 음악이 시간 예술이라는 약속 아래 편의에 따라 구성된 것입니다. 제가 종종 설치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역시 그런 규제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람과 깊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갤러리 안에서의 소리의 표현은 일반적인 음악처럼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이야기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111p)


그의 팬들에겐 한번 더 미안한 얘기지만, 음악은 원만한데 사람은 삐딱하단 평가도  받았던 모양입니다. 나긋나긋하고 평화로운 선율을 듣노라면 왠지 온화한 성자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까탈스러운 취향에 주변 피곤하게 하는 재주도 꽤 있었봐요. 마이웨이가 확실했에 실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성공한 것일 모르겠습니다. 둥글둥글만 해서는 역사에 남지 못하는 게 우리네 세상 불편한 진실이지요.


힐링뮤직으로 호평받을 때 치과에서 흘러나올 법한 값싼 음악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정말로 싫었어요. (198p)


에고도 굉장합니다. 모교에서 강의를 부탁받고 학생들을 만났는데 그 평범함에 실망하여 "나였다면 애초에 유명인의 수업은 듣지 않았을 거"라며 비범함에 대한 편향과 자랑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토록 까다롭고 잘난 사람이 누구의 의견이나 지시를 받으며 살 수 있었을까요?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는 자유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 이것이 그에겐 인생의 키이자 절대반지였을 겁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 암 판정이라니, 그 자체가 이미 사형 선고였겠죠.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유명한 죽음의 5단계 이론이 있습니다. 삶의 끝을 언도받은 사람이 처음엔 상황을 부정하다가 분노하게 되고 → 타협을 시도하다가 → 좌절하는 단계를 거친 후 → 결국 수용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류이치 사카모토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암을 선고받고 5년 이상 생존율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의사의 단도직입적 언에 무척 화가 났었노라고 분노의 감정을 고백합니다. 게다가 1차 선고 후에 수년간 힘든 치료과정을 거치며 다 나은 줄 알았는데 다시 재발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었으니 얼마나 더 절망스러웠겠습니까. 그 심정이 충분히 공감되어 고개를 끄덕이던 차,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괜찮다면 잠시 제 얘길 조금 하겠습니다. 저 역시도 과거 판정을 받아본 캔서 서바이버입니다. 다만 담당의에게 처음 통보를 듣던 당시 제 반응은 조금 달랐습니다. 평생 나와 상관없을 거라 생각한 얘기를 는 충격적인 자리였음에도 이상하게도 그다지 놀라거나 화가 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부정, 분노, 타협, 좌절, 앞의 네 단계들이 존재하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수용의 단계로 건너뛴 것만 같았습니다. 정작 당사자는 담담한데 자꾸만 걱정 말라고 괜찮을 거라고 애써 다독이는 의사가 도리어 답답했었습니다. 다만 고민되는 게 한 가지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신규 기획한 프로그램 출장이 바로 일주일 뒤였는데, 책임자인 내가 갑자기 변고를 전하면 스태프와 출연자들 사기도 떨어지고 자칫 피해가 갈까 걱정되었습니다. 당장 이튿날부터 항암 돌입하자는 의사한테 "저기 죄송한데 선생님, 혹시 치료를 한 달 뒤로 미뤄도 될까요?" 했다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변에 알리지 않은 채 계획된 스케줄을 다 소화하고 나서야 치료를 시작했고, 오전엔 병원에 시체처럼 누워 방사선을 쐬고 오후에 출근해 밤샘 편집을 하는 이중생활을 몇 달간 지속했습니다. 저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요. 암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초연함을 유지하는 강한 멘털이었던 걸까요? 아니면 책임감 넘치는 리더임을 스스로 입증하고 싶었을까요? 아마도 저 깊은 무의식에서 육체는 무너져도 주체적 자유의지만큼은 건사하리라 발버둥 쳤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시간이라는 가능성


자유롭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동의어입니다. 물리법칙을 거슬러 정(靜)에서 동(動)을 창조하는 생명 자체가 자유이고, 자의로 일상을 선택하고 영위하는 것도 자유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자유는 달리 말하면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내가 내 삶을 컨트롤할 때 우린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이것은 또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생명은 늘 가능성을 찾습니다. 아직 않은 미래, 미지의 시간에 무엇을 겪게 될지 확인할 기회가 계속 남아 있다는 안도감, 그 가능성의 확인이 살아있음의 핵심요소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필수적으로 시간에 종속됩니다. 시간은 삶을 불가항력으로 속박하는 무시무시한 굴레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한 가닥까지 움켜쥐고 절대로 놓아지지 않는 갈망의 동아줄입니다. 시간이  편일 때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시간이 충분히 있어줘야 미지의 가능성을 내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이란 놈이 도무지 통제가 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무슨 짓을 해도 맘처럼 컨트롤되지가 않습니다. 시간이 통제 하에 있지 않음을 어느 날 새삼스레 깨닫고 나면 우리는 분노하고 절망합니다. 이 책에서도 시간에 대한 얘기가 계속 나옵니다. 사카모토의 대표작 《async》가 말하는 싱크의 어긋남은 시간에 대한 실험입니다. 죽기 얼마 전 진행한 설치예술 《Time》에서 그가 담은 건 '시간은 환상이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마지막 앨범 제목인 《12》도 시간의 인덱스입니다. 의 가능성을 통째로 빼앗아 가는,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의 절대권력대항그 역시 끝까지 집착했던 것입니다.


그럼  저항 없이 수용의 단계로 넘어갔다는 제 경우는 어떨까요. 그건 진짜 수용이 맞았을까요? 나보다 동료를 먼저 챙겼다는 훈훈한 에피소드는 과연 진짜 자유의지의 발로였을까요? 혹시 어떤 식으로든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고 싶었던, 다시 말해서 일상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삶의 통제권을 놓치지 않으려 안달한, 어쩌면 매우 자유롭지 못했음의 반증이었던 건 아닐까요.


나는 정말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수긍'했던 것일까요?



- 긍정의 본질


요양차 머물던 하와이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달짝지근하다며 싫어했던 하와이 음악을 다시 보게 됩니다. 싫다고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옳지 않구나, 고집이 가능성을 좁힐 수 있구나를 통감하고 반성했다고 합니다. 의지가 어느덧 아집이 되어 진정한 자유를 훼방 놓기도 한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내 의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사실마저 수용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긍정이라는 것입니다.


"암과 싸운다가 아니라 암과 살아간다."


생에 대한 긍정이 있다면 사에 대한 긍정도 있습니다. 삶을 긍정하는 것도, 죽음을 긍정하는 것도, 대척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한 이치의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에 대해선 찬사를 보내지만 죽음을 하는 것은 두려워하며 본능적으로 터부시 합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한 번이라도 끝을 숙고할 기회를 가져본 사람삶과 죽음 같은 배에서 나온 쌍둥이란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저는 사계절이 춘하추동의 순서가 아니라 겨울에서 시작되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절의 변화란 당연하게도 인간의 삶을 상기시키는데, 그렇게 보면 가을이 곧 생의 마지막이 되죠. (86p)


사카모토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만든 레퀴엠 《고토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4계절을 4악장으로 담은 콘체르토입니다. 비발디의 사계처럼 계절의 시작은 당연히 봄일 거라는 상식을 깨기라도 하듯 이 곡의 첫 악장은 춘하추동 대신 동춘하추, 겨울에서 시작합니다.


네 악장의 제목은 각각 still, return, firmament, autumn입니다. 겨울을 스틸, 봄을 리턴이라고 표현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스틸은 멈춤일 수도 있지만 고요한 태동일 수도 있습니다. 겨울이 더 이상 죽음의 계절이 아니라 준비의 계절이 됩니다. 끝이 끝이 아니라, 끝을 이어 붙이는 다음의 연결점이 되는 것. 저는 이 대목에서 고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속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추(醜)가 없으면 미(美)도 없듯이,

 슬픔이 있으니까 기쁨이 있듯이,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


 때로는 나에게 죽음도 희망이 되는 것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 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 만물 모든 것은 댓구가 있어 존재합니다. 어둠이 있어 빛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어둠이란 게 없었다면 빛이란 것 자체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끝이 정해졌기 때문에 시작이 의미를 갖습니다. 죽음을 긍정하는 것은 곧 삶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나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쓰면 낡고, 많이 쓰면 고장 나는 것은 비정상이 아닙니다. 유한한 신체가 주어진 조건을 치열하게 살아낸 정상적인 결과물입니다. 녹이 슬었단 것은 그만큼 활발하게 산소와 반응했다는 얘기입니다. 노화와 질환은 분명 불편하고 성가신 것이지만 무조건 부정한다고 해서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를 박멸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착각했던 것과 같습니다. 암과 싸우는 게 아니라 암과 살아간다고 한 사카모토의 고백은  뜻입니다. 걸 받아들이고 나서 그는 어느 정도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저는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보았습니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그리고 마음속에서 제목을 고쳐 썼습니다. "나는 지금 떠 있는 저 달을 보고 있을까".


죽음이 두려울 땐

한 달 두 달 유한한 횟수의 시간을 지만


삶을 긍정하듯 죽음관조하면

보름과 보름 사이 무수한 반달과 초승달과 그믐달과 삭망의 모든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금 내 눈앞에 떠오른 달이 차 있든 이지러져 있든 그 모양이 어떻든 간에, 나는 매 순간의 모든 달들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보면서 살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마지막 순간마저다름없이 긍정할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이라도 달들을 볼 것입니다. 그 달들은 모두 지금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것입니다.



- 끝을 준비할 수 있다는 축복


마지막으로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죽음을 알고 기다리는 것과

부지불식 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


당신이라면 어떤 쪽을 선택하겠나요.


저는 간접적으로나마 두 가지 경험을 다 해보았습니다. 오지에서 아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죽음 직전까지 가보기고, 암 판정 후 찬찬히 삶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져봤습니다. 각각의 장단점이 너무도 명확합니다만, 갈 때를 알고 사랑하는 이들과 인사하며 주변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축복일 수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류이치 사카모토 씨는 끝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니 나름 복 받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했고, 끼치고 싶은 영향들을 끼쳤습니다. 자신이 한 모든 일을, 자신이 한 모든 생각을 기록하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걸 기억하고 기록해 준 사람까지 따로 있었지요. 그는 그렇게 그를 애도하는 팬들을 위한 마지막 인사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작년 3월 28일에 떠났으니 곧 며칠 후면 그의 1주기가 되는군요. 사람들은 사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만, 본인의 장례식에서 연주될 플레이리스트까지 챙기고 떠난 사카모토 씨라면 이미 충분한 복을 받고 더 좋은 곳에서 더 큰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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