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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May 26. 2024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by 클레어 키건


소설은 짧습니다.


100쪽이 조금 넘는 정도입니다.


베스트셀러입니다. 작년 말에 출판돼 (국내 기준) 5개월 만에 50쇄를 찍었습니다.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습니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수상 후 국내에서 갑자기 유명해진 국제 문학상 말입니다.


이만하면 잘 팔릴 요소는 두루 갖춘 듯합니다. 상도 받고 소문도 나고 심지어 두께가 얄팍하기까지 하니까요. 제목도 소확행스러운 것이 힐링용 소품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쎄요, 그게 꼭 그렇진 않습니다. 길이가 짧다고 깊이까지 얕지가 않아요. 한번 읽고 그대로 책장을 덮못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정독하게 됩니다. 평소 생각이 많은 분일수록 생각이 더 많아질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펄롱입니다.


딸만 다섯인 아일랜드의 젊은 가장입니다. 평범하고 성실한 석탄가게 사장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건실하게 자라 공동체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었습니다.


때는 1985년 겨울,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펄롱은 그곳에 수용된 여아들의 착취 정황을 우연히 엿보게 됩니다. 맨발이 새카만 한 아이는 몇 주 전 출산까지 했습니다.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이름의 아일랜드 현대사 속 실제 사건이 배경입니다.


풍족하진 않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펄롱은 현상유지와 실천적 행동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여기에는 개인과 공동체, 통념과 묵계, 종교와 인권 등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소설은 이들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대신 행간에 담습니다. 작가의 말을 빌면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아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재차 읽으며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의 주변엔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먼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태어난 주인공을 키워 준 Mrs. 윌슨과

현재 시점, 주인공의 일터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Mrs. 케호가 있습니다.


미시즈 윌슨은 주인공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끼친 과거의 스승입니다. 신교도 미망인으로 갓난아기 딸린 미혼모를 거두어 양육을 지원하고 글도 가르쳐줍니다. 친할머니 같은 그녀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스크루지가 개심하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입니다. 맞춤법 대회에서 상을 받은 어린 펄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시즈 윌슨은 말합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렴."


미시즈 케호는 주인공의 사회생활에 조언을 해주는 현재의 스승입니다. 선술집을 운영하며 노동자들의 주린 배를 채워줍니다. 큰고모 같은 그녀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당장 몸을 덥히는 셰리주 한 잔입니다. "속이 빈 자루는 제대로 설 수 없는 법이지" 걸걸한 그녀의 입에선 처세의 격언이 줄지어 나옵니다. 가톨릭 전통이 강한 아일랜드에서 펄롱의 위기를 눈치챈 미시즈 케호는 말합니다. "적을 가까이 두라고들 하지. 사나운 개를 곁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고."


그리고 세 번째 여인, 아내 아일린이 있습니다. 검소하면서도 필요한 것을 원할 줄 아는 스마트한 여인입니다. 아일린은 펄롱에게 곧 현실입니다. 마음이 어딘지 붕 떠 있는 남편과 달리 아일린의 현실판단에는 뚜렷한 자기 합리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걸 잘 지키고 사람들과 척지지 않으면 우리 딸들이 그런 일들을 겪을 일은 없어.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펄롱의 마음속에는 이 세 여인이 모두 존재합니다. 과거와 현재, 이상과 현실이 혼재합니다. 미시즈 윌슨이 심어준 정신적 유산과 미시즈 케호가 조언하는 사회적 처신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펄롱의 입장은 또한 아일린의 입장과 동일합니다. 그 무엇도 딸들을 지키고 생계를 영위하는 것에 우선할 수 없습니다.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안정적인 현재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펄롱은 고민합니다. 수녀원에서 만난 헐벗은 소녀(와 그 아기)가 눈에 밟힙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때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설 좀 더 옳아 보이는 방향으로 향합니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이 예전에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또는 하지 않았던, 많은 사소한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한데 합쳐 지금의 자신을 이루었음을 생각합니다. 선대부터 자신에게 흘러들어온 강물을 되퍼내는 작은 실천적 행동을 합니다. 소녀를 수녀원에서 꺼내옵니다.


좋은 소설은 독자들 저마다에게 다양한 해석의 장을 열어주지요. 읽는 이에 따라서 어떤 독자는 박애와 희생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어떤 독자는 개인과 사회의 충돌에 집중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 나라 여성으로 그 시대를 직접 산 작가 본인으로선 해당 사건을 반추해고 싶었을 터니다. 그런데 말이죠, 다양한 해석을 보장하는 게 좋은 소설이라면 혹시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까요? 펄롱의 행동이 과연 '더 옳은 쪽'이었던 게 맞았을까요?


우린 여기서 행동의 내용 판가름하기 전에  행동의 동기시선옮겨 볼 수 있습니다. 


펄롱이 최종 결심을 내리기까지는 꽤 긴 갈등의 여정이 필요했습니다. 시간상으로는 크리스마스 전후 며칠 상관이지만 그 사이에 집과 일터에서, 이런저런 거리에서 마주친 다양한 삶의 편린들이 그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평생 궁금해하던 핏줄에 대한 실마리를 뜻밖의 상황에서 찾게 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 그의 결심을 굳힌 건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소설은 끝자락에서 그 단초를 살짝 보여줍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119p) 


인상 깊은 대목입니다. 주인공을 움직인 근본적인 동기, 심연 깊은 곳에서의 속마음은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음'이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그 핵심이 몇 줄 더 쓰여 있습니다.


"...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121p)


주인공에게 가장 최악의 일이란, 눈앞의 실상을 외면한 채 아무 액션 하지  상황  자체였습니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그래서 평생 후회를 십자가처럼 지고 살게 될지 모를 그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의 결단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핵심키워드는

#사소한 

입니다.



소설의 원제는 Small Things Like These입니다.


뜬금없지만, 처음 책을 집었을 때 제목이 Smells Like Teen Spirit처럼 읽혔습니다. 90년대 미국 록밴드 너바나의 대표곡 말입니다. 비슷한 스펠링의 영단어 네 개의 조성이 그래 보였나 봅니다. 물론 당연히도, 권태와 자기혐오를 노래한 세기말 얼터너티브록과 이 소설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억지를 조금 부리자면 연결고리를 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With the lights out, it's less dangerous

불을 끄면 조금은 안전해져

Here we are now, entertain us

우린 여깄잖아 편하 해 줘

I feel stupid and contagious

생각 없이 사는 건 전염성이 강하지

Here we are now, entertain us

우린 여깄잖아 편하게 해 줘


커트 코베인의 허스키 보컬이 당장이라도 들릴 듯후렴구원랜 마약에 취한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지만 이 소설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 내면의 갈등을 여실드러내는 자기 고백 같습니다. 우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양심의 불을 끄고 사는 게 안전함을 압니다. 다른 사람을 돕고 싶지만 먼저 나의 안위부터 챙기게 이득을 잘 압니다. 비겁하거나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현실 앞에 개인의 힘이 얼마나 초라한지 익히 학습해 왔고, 복잡한 고민에 붙잡혀 있기엔 당장 풀어야 할 각자의 문제 시급하때문입니다. 언제나 최우선순위는 나입니다.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변을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괴로운 일입니다. 나를 챙길 것인가 남을 챙길 것인가. 생각이 너무 깊다간 노래의 마지막 가사처럼 자기부정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A denial, a denial, a denial...

부정, 부정, 부정...




출판사가 내세운 카피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월한 침묵과 자멸적 용기의 갈림길, 그 앞에 움츠러든 소시민"


멋진 카피입니다. 임팩트 있어요. 그런데 만약에 - 우리끼리 얘기지만요 - 위 카피에서 '자멸'적 용기를 '자족'적 용기바꾸면 어떨까요. 확실히 임팩트는 떨어지겠지만 리얼리티는 더해지지 않을까요?


옳다고 믿는 을 실천하는 용기가 꼭 자멸적일 정도로 거창하거나 극단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면 자기만족이 동기라 해도 충분히 용기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소중한 무엇을 지키려는 소시민의 침묵을 수월하다고만 치부하기어렵습니다. 그도 하나의 용기가 필요한 선택입니다. 이게 리얼리티지요.


오늘날 가치판단은 보는 관점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습니다. 누구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선택을 하고 누구는 타인의 세계를 지키는 선택을 하겠지요. 물이 흘러넘치려면 때론 내 그릇을 먼저 채우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자기 그릇이 메말랐는데 남의 그릇부터 채우려 드는 것은 양쪽을 불행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욕심일 수 있습니다.


우린 화려하거나 열렬하거나 명확한 신념을 좇아서만 행동하지 않습니다. 왠지 불안해서, 괜히 불편해서, 어쩌면 그냥 내가 힘들어 것 같아서 단지 그 이유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펄롱의 말처럼 - 그리고 너바나의 노래처럼 - 거울 앞에 스스로를 마주했을 때 자기부정의 상황이 괴로운 죠. 실제 대다수우리 행동은 그리 대단한 이유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행동의 동기가 보잘것없다고 해서 그 가치도 보잘것없는 게 되는 걸까요?


함이 결국 다름을 만듭니다. 설사 그 시작이 단순한 자기만족일지라도 달라질 것은 달라집니다. 저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소한 동기들, 이처럼 사소한 이유들, 이처럼 사소한 결심들.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소함들이 꾸준히 쌓였을 때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우리가 꺼리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어쩌다가 그 무엇도 '하지 못해서' 후회하며 사는 삶입니다. 내가 가진 가치와 행동을 합치시킬 때 우린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동기를 솔직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시민의 용기는 - 그리고 펄롱의 용기도 - 솔직한 자기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끝으로 그림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이번엔 뜬금이 매우 있습니다.


이 책의 표지 그림은 16세기 플랑드르 회화의 거장 피터르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입니다. 출판사의 디자인 센스에 감탄했는데 알고 보니 영문 원판에서부터 이미 쓰이고 있던 표지였습니다. 그림의 배경은 400년 전 신교 국가 네덜란드이지만 이 소설의 무대라 해도 위화감이 없습니다.


한겨울, 온통 새하얀 눈이불을 뒤집어쓴 노란 벽돌집들이 백설기 아래 파묻힌 인절미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마을 아래 꽁꽁 얼어붙은 호수(또는 강) 위에선 동네사람들이 얼음을 지치고 있습니다. 일견 평온해 보이는 전경 위로 폭격기처럼 활공하는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도드라집니다. 꼬리를 길게 드리운 게 조금 불길해 보입니다. 소설 속에도 검은 사제복을 입은 듯 동네를 활보하는 까마귀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눈 속의 사냥꾼이라면서 사냥꾼은 어디에 있나요? 사실 표지는 전체 그림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피터르 브뤼헐의 원화는 폭 1.6m 높이 1.2m짜리 제법 큰 그림입니다. 아래에 크기를 비교할 수 있도록 사진을 첨부했습니다. 원화가 왠지 눈에 익다면, 맞습니다.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에 걸려있지요.  


Hunters in the Snow, Pieter Bruegel, 1565


피터르 브뤼헐은 종교적 주제가 더 이상 회화를 독점하지 않게 된 1세대 화가 중 한 명입니다. 그가 즐겨 그린 것은 농민들의 사실적인 삶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브뤼헐이 그림을 그렸던 16-17세기 유럽은 소빙하기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렇잖아도 힘들었던 농민의 삶이 더욱 굶주린 시기였습니다.


이 그림은 원래 여섯 개짜리 계절 연작 중 하나로 1월 풍경입니다. 이 연작에는 의뢰인이 있었습니다. 니클라스 용헬링크라는 안트베르펜의 부유한 은행가였죠. 은행가는 자신의 저택 식당에 병풍처럼 두르고 감상하기 위해 연작을 주문했습니다. 농촌의 고된 일 년이 따뜻한 벽난로 앞 의뢰인에겐 그저 감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눈 속의 사냥꾼》은 지금도 크리스마스 카드 단골 디자인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브뤼헐의 작품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조감 시점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아래를 내려다보듯 한눈에 전경을 파악하게 해 줍니다. 그림 속 까마귀처럼요. 이런 높은 시점은 전체 상황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두 번째는 스냅샷을 찍듯 디테일한 인간군상입니다. 그림 속 얼음을 지치는 동네사람들만 봐도 달리는 친구부터 자빠진 친구, 기차놀이 커플에 컬링 동호회까지 다양합니다. 이런 세밀한 묘사는 한 명 한 명의 존재를 주관적으로 인식하게 해 줍니다.



이번엔 좌하단에서 큼지막하게 들어오는 사냥꾼 무리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사냥꾼들은 숲에서 사냥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는 중입니다. 그런데 큼지막한 구도에 비해 뒷모습이 초라하고 고단해 보입니다. 어깨에 작은 여우 한 마리 겨우 얹은 걸 보니 수확도 그리 신통치 않은 것 같습니다. 개들도 고개를 처박고 있네요. 이들 옆으로는 앞치마를 두르고 불을 피우고 있는 몇 사람이 보입니다. 사냥꾼들의 수호성인인 후베르투스가 간판에 그려진 선술집입니다. 그 간판마저 겨울폭풍에 한쪽이 떨어져 나가 비뚤어져버렸습니다.



다시 그림을 전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저 멀리 알프스 산자락마저 담길 정도로 큰 스케일인데도 구석구석 디테일을 놓치지 않은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브뤼헐은 왜 이렇게 커다랗게 전경을 그려 놓고서 그 안에 돋보기로 들여다봐야 겨우 보일만큼 조그만 사람들의 모습을 일일이 집어넣었을까요. 사진 찍듯 자신의 시대를 하나도 빠짐없이 역사에 남기고 싶었을까요?


화가는 농민에 대한 애정을 유머스럽게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그림 역시 비록 삶은 고되더라도 그걸 긍정해 내는 평범한 일상의 힘을 표현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신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주저앉아만 있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행동합니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행동을요. 그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인공 펄롱은 자신의 삶을 긍정했기에 자신이 목격한 고통도 외면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드릴까요? 그림 오른쪽 아래 귀퉁이를 확대해 보면 땔감을 한가득 지고 다리를 건너는 인물이 하나 보입니다. 우연일까요? 마치 마을에 석탄을 배달 중인 펄롱 같습니다. 온 세상이 눈 속에 파묻혀도 굴뚝마다 온기가 피어오를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마을사람 각자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며 최선을 다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 저 사냥꾼들이 다 펄롱이겠지요. 화덕 앞을 지키는 아낙네는 아일린이고요. 꽁꽁 언 호수 위 썰매를 타는 아이들 중엔 필시 펄롱네 딸들도 있을 겁니다. 남편이 수녀원에서 데려온 아이를 보고서 아일린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겠지요. 이 아이도 이젠 우리 아이라고.


펄롱, 또는 우리..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배로 Barrow 강은 


아일랜드 남동부를 흐르며 다른 자매 강들을 만나 수도 더블린에서 대운하를 타고 바다로 빠져나갑니다. 뭐 대단히 볼 것 있는 이름난 강은 아닙니다. 이 강 또한 수많은 이름 없는 작은 시내들이 모여서 흐르게 됐을 겁니다. 소설은  평범한 강줄기 위에 다양한 심상을 뿌립니다. 수녀원을 빠져나와 강어귀에서 잠시 길을 잃은 주인공에게 노인이 말합니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선 먼저 가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주인공은 갔고,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의 일은 알 수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막달레나 세탁소는 1996년까지 존속됐고 정부의 공식 사과는 2013년에야 나왔습니다. 소설은 현실에서 금방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강물은 조금씩 꾸준히 흘렀고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사소한 것들을 사소하지 않게 대하는 데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일단 한번 용기를 내고 나면 좀 더 큰일에 용기를 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소시민이 전심을 다해 품는 사소한 용기, 사소하지 않은 힘을 얘기한 클레어 키건의 짧고 묵직한 소설이었습니다. 


River Barrow, Ireland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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