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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인형 May 17. 2022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문장들은 쓰레기였다

[완독 일기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곰출판

힘들었다. 여기저기 스포일러 지뢰가 넘쳐나는 가운데 조심조심 발을 떼야했으니까. 책과 관련된 인터넷 플랫폼에 보라색 인어 그림만 보였다 하면 바로 창을 닫아야 했다. 애서가들에게 회자되는 책인 만큼 감상평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비 사이로 요리조리 몸을 피해 가며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책의 곳곳에 붙여둔 플래그를 하나씩 떼며 관련 내용을 컴퓨터에 옮겨놓는 것이었다. 여기서 평소와 달랐던 매우 중요한 포인트는 책의 맨 뒷부분에 있는 플래그부터 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평소에 책을 읽을 때 인상적인 부분이나 기억해두고 싶은 곳에 플래그를 붙인다. 완독 후에는 플래그를 하나씩 떼면서 한글파일로 만들어둔다. 여기에 책을 읽으며 메모해 둔 키워드들을 더해서 리뷰를 쓴다. 리뷰를 쓰지 않더라도 나중에 다시 찾아보기 위해 꼭 하는 일이다. 습관적으로 책의 앞부분에 있는 플래그부터 차례로 떼면서 타이핑을 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 독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뒷부분에 있는 플래그부터 떼어낸 책이다. 게다가 책의 앞 쪽에 붙여둔 플래그들 중 상당수는 떼기만 했다. 그러니까 내용을 컴퓨터에 옮기지 않고 버렸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왜 그랬는지 단번에 이해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쌓아 올린 텍스트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 이것도 가져야지, 저것도 가져야지 하며 문장들을 주머니 여기저기에 마구 쑤셔 넣었는데 나중에 보니 다 쓰레기였다는 이야기.


격자무늬처럼 동서남북 구획을 지어서 카테고리별로 물건을 정리하고 이름표도 붙여놨는데 나중에 보니 그 물건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었다는 이야기. 질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알고 보니 혼돈이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우리가 자연에 그은 선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어떻게 우리의, 아니 적어도 나의 뒤통수를 쳤는가에 대한 이야기.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독서의 흐름을 오랜만에 경험했다. 도대체 이 책의 장르가 뭐지? 과학책인가, 평전인가, 에세이인가 싶었다. 인생의 무의미함, 혼돈, 질서를 향한 열망을 말하려는 건가 싶다가 어느 순간 살인, 독, 은폐 등의 단어가 전면에 등장하는 추리물로 바뀐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인물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자기 계발서를 읽는 것 같기도 하다. 만인에게 추앙받던 인물이 빌런이 되는 순간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경이로움이다.


이쯤 되면 여러분들도 어쩔 수 없지 않겠나. 이 책을 읽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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