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다르의 책방 Aug 25. 2024

일탈의 역설

20대 초반, 자주 어울리던 친구와 하던 놀이가 있다. 매번 만나서 같은 이야기, 같은 레퍼토리로 시간을 보내던 게 지루해져 고안해 낸 게, 만나자마자 필터링 없이 내뱉은 걸 해보는 거였다. 무계획 여행처럼 따분한 소재는 아니었다. 예컨대 어느 날 건대역 앞에서 만나 '뭐 할까' 묻는 친구에게 난 '당근이나 사지 뭐'라고 답했다. 그대로 건대 이마트로 향해 당근을 사고 나서 친구는 또 물었다. '이제 뭐 하지.' 난 또 말했다. '버려 그거.'


나도 무계획 여행이나 주변 사람들이 흔히 해보지 못한 경험,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에피소드는 적지 않게 담아두고 있다. 남들만큼이나 나도 평범한 일상을 떠나 일탈이라고 해볼 법한 일들에 과감히 뛰어들었으니까. 하지만 되려 뻔한 그런 경험을 나누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 뿌듯해하기보다는 친구와 했던 부질없는 짓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뻔한 게 싫어 뛰어든 것이, 남들이 박수갈채 보낼 법한 일이라 오히려 뻔한 경험이 되어버린다는 게 말이다.


SNS에서는 '뻔한 것으로부터 탈출'이라는 뻔한 소재가 인기가 식을 줄 모르고 끊임없이 소비되는 모양새다. 나도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떠나봤으면 진정한 행복을 알 수 있을까? 절에 들어가는 건 어떨까? 시간을 갈아 넣어 자랑할만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일은? 많은 돈을 벌어 평범한 직장인이 상상도 못 할 차를 끌고 다니며 여자를 꼬시는 건? 우리 모두 짐작하듯이, 그 모든 쾌락이 잠깐은, 혹은 아주 오랫동안 제 삶을 구원해 준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결국 또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여정을 떠나게 된다.


인간은 만족을 모른다는 걸 알아야 한다. 특히 의미에 관해서 말이다. '인생에 정답은 없지'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을 한 군데 고착시켜 줄 만한, 강력한 의미를 찾아 헤맨다는 게 참으로 덧없는 일 아닌가. 남과 공유할 수 있는 그것으로 회귀한다는 게 말이다. 우리는 꼭 새로운 의미를 찾더라도 남들에게 납득할만한 소재를 찾아 나선다.


꼰대비판을 하려는 건 아니고, 흔해빠진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들을 변호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 여집합의 몸 둘 바 모르는 방황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당신이 말하는 그 일탈과 방황, 깨달음이나 사상이야말로 참으로 뻔한 게 아닌가? 어쩌면 뻔하지 않은 자신을 보며 자랑스러워할 뻔한 서사의 재생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고민은 해보지 않았던가.


내게 친구와 했던 유치한 놀이가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은 거기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린 단지 심심했고 무의미한 그 상황을 즐겼다. 남들이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묻든 말든 말이다.  내 경험이 더 고차원적 윤리적 방향을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을 할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미를 견디기 힘든(적어도 그렇게 여겨져 왔던) 인간본성에 다른 길이 있지 않냐는 가능성은 제기해 볼 법하다.


시적 언어의 실천이라는 정신분석적 교훈이(혹은 하이데거의 가설이) 너무 진부하게, 혹은 지루하게 여겨질 수 있을 거 같아 심심한 푸념을 늘어놔 보았다. 권력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주체의 안쓰러운 못한 몸짓이 다시 권력으로 돌아오는 역설.


인간은 참으로 안쓰러운 존재다.

작가의 이전글 말장난과 정신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