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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다르의 책방 Nov 08. 2024

거울단계에 관하여

에크리 : <나 기능 형성자로서의 거울단계> 논문의 쓸모 구하기

거울단계는 라깡의 이론 중 가장 말 많고 탈 많은 개념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태 접했던 라깡의 텍스트와 차이로서 그 이질성을 감지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의 작업을 계승하고 해체하는데 능했던 라깡이었지만, 에크리에 수록된 이전 논문에서 비판한 관념연합론으로부터 개념을 빌려와 발달심리학적 가정에 기대려는 모습은 한편 라깡답지 않게 어설프다. 아마 현대 라깡 연구자들도 이 점에서 거울단계의 한계를 느끼고 모른 채하는 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라깡은 이 논문의 쓸모를 다음과 같이 초석에 소개한다.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경험 속에서 나 moi 기능에 대해 이 개념이 비추어지는 빛으로 미루어보아 특히 오늘날 그렇다. 이 경험은 코기토로부터 직접 유래하는 모든 철학에 우리를 맞세운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 에크리 번역본 p.113”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어도 “생각하는 나”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근대적 주체, 일관성 있고 명증성으로 자리 잡은 주체조차 타자에 의해 구성된 분열된 주체라는 프로이트-라깡적 발명이 거울단계로 이어진다는 암시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나’는 코기토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작동한다. 그가 이전 논문에서 언급한 바, 정신분석은 ‘환자의 말을 잘 듣기 위한 실천’으로서, 그 실천은 환자의 말을 관념연합론, 곧 기계주의적 유물론-논리 선점의 오류의 틀에 끼워 맞춰 재단하도록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49년 IPA에서 발표된 이 논문에서 쓸모를 구하고자 한다면 거울단계가 정신분석적 실천으로서 무엇을 논증하기 위한 시도였는지를 밝혀내는 게 가장 유익하리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거울단계

라깡의 거울단계는 인간이 자아를 처음 인식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보통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기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저게 나구나!”(Aha-Erlebnis, 아하-체험, 쾰러의 통찰학습 개념)하고 깨닫는 순간이 자아 형성의 시작이 된다고 라깡은 주장한다.


하지만 이 자아는 아기의 내면에서 자연발생하는 게 아니라 거울 속의 외부 이미지에서 비롯된다. 이 과정에서 아기는 아직 몸을 온전히 조정할 수 없어서 분리된 감각과 움직임을 경험하고 있지만, 거울 속의 모습은 통일된 형태로 보인다. 아기는 이 통일된 이미지를 자신의 자아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자아는 실제로는 거울 속 이미지, 즉 외부에서 온 것이다. 이 관점에서 거울이미지를 통한 자아 형성은 외부 이미지에 의한 환상, 곧 온전히 내가 아닌 것(pas tout)을 ’나‘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자아란 타자적 자아이며, 그 자체로 고유한 실체가 아니다. 파편화된 신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상상계적 단계이다. 아기가 거울 속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 자아는 일관되고 온전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욕망, 타자의 시선에 의해 재단된 허구적 자아다. 이 시기 라깡은 이후 아이의 성장에 따라 상징계에 진입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레퍼런스의 문제

라깡이 여러 이론을 끌고 들어오는 것은 명백히 설득력을 얻기 위함이다.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히스테리 환자의 꿈에 대한 묘사 이후) 만약 이러한 주관적 자료에만 근거한다면 그리고 이 기술을 언어의 기술로 보도록 만드는 경험 조건으로부터 이 자료를 조금이라도 해방시킨다면 나의 이론적 시도들은 절대적 주체라는 사유불가능한 것 속으로 자기를 던진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에 계속 노출될 것이다. 내가 객관적 자료의 합치에 근거한 현재의 가설 속에서 상징적 환원의 방법을 안내 격자로 찾아온 것은 이 때문이다. - 에크리 번역본 p.118”   

  

라깡은 논문 초반에 볼드윈과 쾰러를 언급하며 어떤 가정 하에 논문을 전개하는지 짐작케 한다. 볼드윈의 경우 아이들이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고 이를 통해 자아(나)를 확립하며, 어린 시절부터 인간이 타자의 시선을 내재화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볼프강 쾰러(Wolfgang Köhler)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주로 침팬지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그중에서도 침팬지의 자기 인식 실험이 거울단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곧, 침팬지 이마에 낯선 표시를 붙여두고 이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지 관찰하여 나 moi 개념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해당 실험은 거울을 통해 자아 인식이 외부 이미지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결론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런 맥락에서 라깡의 거울단계는 주체의 형성을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 특히 타자의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통한 자아 형성 과정을 탐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의 논문에서 거울단계는 어린아이(약 6개월에서 18개월)가 거울을 통해 외부에서 비친 자신을 인식하면서 ‘나’에 대한 개념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것이 아닌, 거울 속 이미지와 동일시를 이루는 과정으로, 여기서 자아는 타자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지점에서 라깡이 논증하려는 바는, 자아가 자기 내면의 순수한 발현이 아니라, 외부 이미지(타자의 시선)와의 동일시를 통해 형성된 허구적 자아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라깡의 이론적 근거를 타 학문 분야에서도 뒷받침해 준다는 식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이후에 사례들과 발생학, 기타 학문적 근거를 끌고 들어오는 대목과  그것이 이끄는 방향이다. 정신분석에 불필요한 사족을 끌고 들어왔다고 말해볼 수도 있겠다.


‘인간의 특수한 조산성’이라는 신경해부학적 개념부터 타종(他種)의 행동양식, 발생학에 이르기까지 언급한 것은 분명 현대까지 이어지는 관념연합론의 사조에 편승한 대목이다. 예컨대, 당시 서구권 학풍은 물론 오늘날 생물학과 신경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라깡이 언급한 발생학적 설명에서 발전한 형태에 불과하다. 복잡한 인간 심리활동을 셀 수 있는 원칙들도 환원시키고자 하는 기계주의적 태도 말이다. 그로 인한 윤리적 문제와 부정확성은 물론, 신경해부학적(발생학적) 설명은 그 자체로 순환논증이다. 짧게 언급되었지만, 뇌의 특정 기관과 그가 상상계라 부르는 영역을 연결시키는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뇌의 특정 부위가 감정이나 자아 형성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면, 뇌 구조로 환원하는 동시에 이를 근거로 다시 자아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라깡이 이와 같은 근거를 차용한 것은 단순히 설득력을 획득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라깡의 원래 의도는 외부 이미지와의 동일시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복합적 심리 구조를 설명하려는 데 있었으며, 이를 통해 자아가 주체적이고 일관된 실체가 아닌, 타자적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 분열된 존재임을 드러내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에 과도하게 신경학적, 생물학적 설명을 도입하면서 자칫 거울단계가 인간의 자아 형성을 생물학적 환원주의의 틀 안에서 설명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논문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하듯, 그는 거울단계를 ‘자연과 문화의 교차점’으로 보고 있다. 언어적 인간으로서 상징계에 들어선 주체 이전의 주체, 라깡은 그 기원을 탐사하고자 그런 개념을 주창한 것으로 보인다. 보다 정확한, 혹은 더욱 편협한 변호를 위해서라면 그가 대여한 발달심리학적 개념은 실수에 불과하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한 설명도 한편 유효하다.     


오이디푸스적 어머니의 부정     

거울단계가 시대사조에 편승한 실수가 아니라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코기토에 맞서는 실천으로서 정신분석가, 라깡은 거울단계에 관해 무엇을 말했는가.     


여기서는 거울 단계를 정신분석이 이 용어에 부여하는 온전한 의미에서 동일화로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즉, 주체가 어떤 이미지를 받아들일 때 주체에게 생겨나는 변형 말이다. - 이 단계에서 이미지는 분석 이론에서 ‘이마고’라는 고대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이 잘 보여주듯이 그러한 예정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게는 타자와의 동일화의 변증법 속에서 대상화되기 전에, 그리고 언어가 보편성 속에서 나에게 주체로서 기능을 회복시켜 주기 전에 원초적 형태로 ‘나’가 재촉되어 들어가는 상징적 모체를 전형적인 상황에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 번역본 p.114.     


라깡은 이 동일화 과정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이마고를 언급한다. 이마고는 여기서 주체가 외부 이미지(거울 속의 자기 모습)와 동일시할 때 나타나는 특정한 예정된 형태로, 주체의 자아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마고는 주체가 외부 이미지와 동일시하면서 자아를 형성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 단계에서 주체는 이마고에 의해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다.


라깡은 거울단계에서 주체가 외부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순간이 아직 타자와의 동일화의 변증법이나 언어의 보편성을 통해 자아를 온전히 형성하기 이전이라고 설명한다. 즉, 주체는 아직 언어 체계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지 않았고, 이러한 상징적 구조로 들어가기 전에 원초적 형태로 자아를 재촉하여 형성한다. 이때 주체는 자신을 상징적 모체 속으로 밀어 넣는다.


여기서 라깡의 프로이트적 오이디푸스 서사에 대한 부정이 예고된다. 이마고는 왜 예정되어 있는가? 그것은 어머니 뒤에 숨은 아버지의 이름, 곧 상징적 모체의 역능이다. 프로이트적 가족소설에서는 어머니란 아버지에 의해 영원히 상실된, 그리고 항상 되찾길 바라는 대상이다. 잃어버린 대상과 그것을 되찾기 위한 반복강박의 여정. 그것이 프로이트식 신경증적 구조라고 말할 수 있는 한편, 거울단계는 조금은 다른 뉘앙스의 서사를 이야기한다. 즉, 어머니도 아버지의 그림자다.     


“게다가 이 형태는 (···) ‘이상적 자아’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형태는 자아로 알려진 심급을 이 심급이 사회적으로 결정되기 전에 어떤 단일한 개인에게 환원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영원히 남게 될,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체가 나로서 자기에게 고유한 현실과의 불화를 해소하도록 해주는 변증법적 종합이 아무리 성공적이더라도 단지 점근선적으로 주체-되기에 접근하게 될 어떤 허구적 방향 속에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번역본p.114-115.”     


거울단계로 득한 자아란 ‘이상적 자아(Ideal-Ich)’다. 곧, 이상적 자아란 자아가 모든 욕망을 이루고 이상적 존재로 나아간 상태라기보다는 부모의 승인에 맞춰 형성된 자아다. 여기선 아버지의 법, 곧 언어가 들어서기 이전의 자아이므로 어머니의 승인을 말하지만, 그다음 단계로서 상징계로 이행이 예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예고한다. 따라서 어머니와의 온전한 합치, 혹은 대상의 완전한 획득과 같은 이상적 단계를 도달했다기보다는 거울단계에서 부-모의 승인 첫 단계가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게 더 그럴듯하다.


따라서 이러한 동일시는 이상적이기보다 어디까지나 허구적이며, 자아는 오인의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안나 프로이트가 자아의 방어 기제를 설명하며 보여주었던 것처럼, 자아는 자신을 방어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불완전함을 감춘다. 라깡은 자아를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실체가 아닌, 상징적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주체로 이해해야 함을 강조한다. 자아는 상징계와 타자의 시선, 사회적 규범에 의해 항상 결핍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이 결핍 속에서 끊임없는 오인과 방어를 통해 스스로를 유지한다.


2세대 정신분석가들이 가정하는 이상적 자아의 달성도 허구적이라는 사실, 이 지점이 ‘프로이트의 후예’를 자처하는 자들과 라깡의 근본적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의 여정은 그 허구적 환상의 횡단까지 이어진다.     


주체-주체 사이의 의지 속에서 정신분석은 죽을 운명이라는 환자의 암호가 드러내는 ‘너는 이것이다’는 황홀경 극단까지 환자를 동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으로 환자를 이끄는 것만이 임상가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니다. - 번역본 p.121. 

    

임상적 차이     

정신분석의 미국적 판본이라 알려진 자아심리학(과 이 흐름을 반대, 한편으로 계승한 대상관계이론에 이르기까지)의 입장에서는 자아란 현실을 고려해 내적 욕동의 압력을 억압하고 그 방향을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후 스피츠, 하트만과 마가렛 말러가 아동기에 대한 관찰을 중심으로 발달적 정신분석을 심화시키면서도 이런 흐름은 지속된다. 아동기의 환상을 찾아낸다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와 완전히 동일한 설명은 아니다. 프로이트가 이드, 원본능의 ‘발견’을 통한 카타르시스적 리비도 해제 반응을 유도했던 것과 달리, 안나 프로이트를 비롯한 자아심리학자는 후기 프로이트의 심리지형적 설명(초자아, 자아, 원본능(이드))을 계승해 세 심리지형의 균형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동기에 겪었을, 혹은 그로부터 비롯된 트라우마나 환상을 가정해 그것을 적중시켜 치료한다는 발상은 여전히 똑같다. 사실 자아가 욕동을 억제하고 현실에 맞춰가도록 임상의 목표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균형을 강조했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더 건강한 자아란 가상의 권력, 혹은 이미지에 완전히 복속되며, 균형과 같이 모호한 말로 쾌락원칙 혹은 현실원칙의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현혹한다. 하지만 자아란, 라깡이 안나 프로이트를 언급하며 이야기하듯이, 본질적으로 오인의 형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라깡의 거울단계에 관한 설명은 그런 식의 치료가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프로이트식 치료가 실패했던 것처럼, 실존하지도 않는 환상에 다시 내담자를 가두는 행위는 윤리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어머니의 승인은 그 뒤에 서있는 아버지의 그림자로 인해 허구적이므로, 아동기에 겪었던 일화나 심상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고 행위조차 허구적 회귀에 불과하다. 반면 주체가 무의식적 결핍과 상징적 구조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허구적 자아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즉, 주체의 욕망을 적중하고 ‘균형’을 유지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대상은 오로지 무(無)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이는 라깡의 실재(réel) 개념을 예고한다. 실재는 인간의 근본적 결핍을 인식하기에 유용하다. 언제나 미래형으로서, 도래할 무엇이 있다는 듯 유혹하는 허상에 ‘나’를 가두기보다 결핍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 현상학적 경험으로서 말하자면 주체는 외부 세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항상 결핍된 상태로 존재하며 지각·감각·사고의 왜곡을 겪어 자신과 세상을 인지한다. 의식은 대상에 대한 지향성을 통해 존재하듯, 거울단계의 주체 역시 타자적 시선을 통해 자신을 구성한다. 결핍을 인정하는 순간에야말로 상징계나 상상계에 의해 감추어진 근원적 공백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항상 미결된 상태로 매듭짓는, 완성될 수 없는 구적법의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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