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 세미나 24 : (1) '76.11.16.

하나의 착오로부터 아는 무지, 죽음을 향해 날개짓한다

by 숨듣다

L’insu que sait de l’une-bévue s’aile à mourre


자, 보시다시피! 이런 식으로 내건 표어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는 무엇으로 다가왔습니까?

‘무지가 아는 것’(l’insu que sait), 어쨌든 그건 쓸데없는 소리 같지만, 중의적으로 울립니다. L’insu que sait,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Unbewußt를 번역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프랑스어에서 부분관사 de가 쓰이는 의미에서 — “하나의-착오(l’une-bévue)가 있다”. 이는 Unbewußt(무의식)을 번역하는 데 있어 다른 어떤 번역과 마찬가지로, 특별히 무의식(l’inconscient)이라는 번역만큼이나 좋은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프랑스어에서도, 그리고 독일어에서도 사실상 '의식없음'과 중의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무의식(l’inconscient)은 의식의 부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편안하게 l’une-bévue(하나의 착오)라고 번역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는 즉각 몇 가지 점을 드러내는 장점이 있습니다. — 왜 우리는 꿈 분석에서, 꿈이란 다른 무엇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착오, 하나의 행위착오(acte manqué)라는 점에서, 예외적으로 거기에서 무언가 자신을 알아보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게 강제되듯이 매달리는 것일까요?


우리는 재치 있는 농담, 즉 말장난(trait d’esprit) 속에서 자신을 알아봅니다. 왜냐하면 말장난은 내가 라랑그(lalangue)라 불러온 것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 미끄러지듯 들어갑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프로이트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몇 가지 고찰을 남겼습니다. 즉, 무의식에 대한 말장난의 흥미로움은 분명히 라랑그의 습득이라는 특수한 사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 꿈 분석에 있어 반드시 전날 있었던 일에 매달려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코 자명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하나의 규칙으로 삼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어떤 것들이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또 그것이 무의식의 “직물 자체”라 부를 수 있는 것과 관계한다는 점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행위착오(/실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분석되어야 할 문제라고 할 때, 그것이 전날이 아니라 이번에는 당일 있었던 일과 밀접히 연결되어야만 하는가? — 이것이야말로 실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올해, 다시 말해, 이 “무지가 아는 것(l’insu que sait)”의 하나의-착오(l’une-bévue)로 나는 무언가를 도입해보려 합니다. 그것은 무의식을 넘어서 더 멀리 가는 무언가입니다. 즉, 우리는 ‘내부’라 불리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이를 심리(psychism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심지어 프로이트는 “엔도(endo)”, 즉 내심적(endopsychique)이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ψυχή(psuké, 프시케)가 곧 “내부”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습니다. 그 “내부”라는 것을 우리가 짊어져야 한다는 것 역시 자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내부(endo)”와, 우리가 흔히 동일시(identification)라 부르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이번에 만들어 붙인 이 제목 아래에서 내가 다루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일시라는 것은 분명히 정체성(identity) 속에서 굳어지는 것입니다.게다가 이 “-fication”이라는 프랑스어 접미사는 독일어에서는 다르게 표현됩니다. 프로이트는 Identifizierung(동일시)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 대목을 직접 찾아가 보았는데, 왜냐하면 내가 예전에 동일시를 주제로 세미나를 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지 못했다” — 그래도 그 장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한 해 동안 전부 다뤘다는 것은 몰랐던 것이지요.


어쨌든 나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프로이트에게는 최소한 세 가지 동일시 방식이 있다는 것을요.

– 첫째, 그가 —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 “사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둔 동일시.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입니다.

– 둘째,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참여(participation)로 이루어진 동일시. 그는 이것을 가리켜 히스테리적 동일시라 명명합니다.

– 셋째, 그는 하나의 특징(trait)으로부터 형성되는 동일시를 구상합니다. 나는 이를 오래전에 일자적 특징(trait unaire)이라 불러왔습니다.


이 일자적 특징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 프로이트가 강조하듯이 — 그것은 특별히 사랑하는 인물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물은 무관할 수 있으며, 단지 하나의 일자적 특징이 동일시의 토대로 선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이 지도자의 작은 콧수염에 동일시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으니까요. 그 콧수염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는 누구나 아는 바입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주장들에 따르면, 분석의 종착점이란 분석가에 대한 동일시라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발린트(Balint)는 여전히 그것을 옹호했고, 이는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분석이 끝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에 동일시하게 되는 것일까요? 자기 자신의 무의식에 동일시한다는 것일까요? 나는 그렇게는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여전히… 나는 “여전히 남는다(reste)”라고 말하지, “영원히 남는다”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이라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은 여전히 대타자(Autre, A)입니다. 무의식에서 문제 되는 것은 바로 이 대타자입니다.


나는 무의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이 대타자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 즉 기표들을 지니고 있는 그 대타자 속에 위치시키는 것 외에는요.


그 기표들이 우리가 경솔하게 불러온 — 경솔하게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그 순간부터 주체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체는 대타자에 너무도 철저히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분석이라는 이 표지(repérage)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동일시… 일종의 거리 두기 속에서 보증을 취하면서… 자신의 증상(symptôme)에 동일시하는 것일까요, 혹은 아닐까요? 나는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증상이라는 것은 — 흔히 통용될 수 있고, 또 교환 가능한 — 성적 파트너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내가 말한 바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 여러분이 경악의 비명을 지르지 않은 채 내가 내뱉은 바 있듯이. — 사실 나는 이렇게 내뱉었습니다. 증상을 이런 의미에서 파악한다면 그것은, 알다시피 알고 있는 것(connaître), 심지어는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이 그리 멀리까지 가는 것은 아닙니다.

알다(connaître)는 엄밀히 그 의미밖에 없습니다. —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여인과 동침하면 우리는 그가 그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는 그 반대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애써도 — 사실상 나는 여자가 아니므로 — 여성이 남자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그것은 훨씬 더 멀리까지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성이 남자를 창조한다는 데까지 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아이의 경우조차도 그것은 일종의 기생(parasitisme)으로 나타납니다.


여성의 자궁 속에서 아이는 기생적 존재입니다. 모든 것이 이를 가리킵니다. 그 아이와 자궁 사이에서 사태가 매우 나쁘게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안다(connaître)”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안다”는 것은 곧:

– 그 증상과 함께 다룰 줄 아는 것,

– 그것을 풀어낼 줄 아는 것,

– 그것을 조작할 줄 아는 것을 뜻합니다.


알 줄 안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이미지와 더불어 하는 어떤 것과 상응합니다. 즉, 증상과 함께 자신이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상상하는 것 말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2차 자기애(narcissisme secondaire)가 문제 됩니다. 근본적 자기애, 이른바 원초적 자기애(narcissisme primaire)는 이번 경우에 제외됩니다. 자신의 증상과 잘 지낼 줄 아는 것, 이것이 분석의 끝입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짧습니다. 결코 멀리 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실제로 어떻게 실행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이 군중 속에서 전하려 애쓰는 바입니다.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내가 자극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르니카르(Ornicar?)』라는 잡지의 어떤 특별호에 실린 53년 분열(=정신분석학계의 분열, 1953년)을 둘러싼 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 그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훨씬 더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실재계(le réel)에의 접근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통용되는 은유는, 흔히 “모델(le modèle)”이라 불립니다. 켈빈(Kelvin)이라 불린 인물이 있었습니다 — 심지어 그는 경(Lord Kelvin)이라는 칭호까지 가지고 있었지요 — 그는 과학을, 어떤 모델이 작동하는 체계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델을 통해 실재가 작동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에 대한 어떤 관념을 얻기 위해 상상적인 것(l’imaginaire)에 의지합니다. “관념을 만든다(se faire une idée)”라고 방금 말했는데, 여기서 “se faire”를 “sphère(구, sphere)”로 적어보십시오. 그래야 상상적인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보로메오적 매듭(nœud borroméen)으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함께 엮어 제시했던 것은, 바로 이 세 영역(sphères)을 구별하고, 그다음에 다시 결합하는 것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 개의 공(boules)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Le Symbolique, l’Imaginaire, et le Réel)”라는 말을 1954년에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 이름을 제목으로 삼아 개회강연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세 이름은, 프로이트가 말한 고유명사(noms propres)와 같은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고유명사를 세운다는 것은, 조금은 자기 자신의 고유명성까지 높이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유일한 고유명사는 나의 이름입니다. 상징계·상상계·실재계에 “라캉(LACAN)”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 — 이것이야말로 이 세 용어가 성립하도록 하는 것이며, 나는 그것을 특별히 자랑스럽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결국 consister(성립하다, 존속하다)라는 것이 무언가를 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우리는 몸(corps)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에는 다음이 있습니다:

– 상상계의 몸,

– 상징계의 몸, 그것은 라랑그(lalangue)입니다,

– 그리고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 수 없는 실재계의 몸.


이것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복잡성이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문제되는 것 자체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 다른 사람이 말했듯이 —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지탱하는 그 사유와 맞닥뜨렸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답변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응답하려 했던 것입니다.


즉, 프로이트가 “깨달아 본 것(avision)”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 그 깨달음이 각자 안에, 군중 속에 있는 각각의 사람 안에,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하나의 단위라고 믿는 바로 그 내부에 무엇인가가 들어있다는 것과 관련된다고 상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입니다.


이 군중(Masse)이라는 개념을 번역할 때, Massenpsychologie는 그대로 “군중심리학”이라 불려야 합니다. 그런데 번역자들은 그것을 Psychologie collective et analyse du moi(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라 옮겼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프로이트가 분명히 출발점을 구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이 명시적으로 “군중심리학”이라 불렀던 것에서 취했음에도, 굳이 “집단심리학”으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집단이라… 아마도 진주 알갱이들의 수집품(collection) 같은 것일 겁니다. 각자가 하나의 진주가 되어 모여 있다는 식으로요. 그러나 문제는 바로 군중 안에서 “자아(moi)”라 불리는 무엇이 성립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아”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나는 올해 이른바 위상수학(topologie)이라는 것을 사용해보려 했습니다.


위상수학이란… 여러분이 일반 위상수학(Topologie générale)이라고 불리는 어떤 책이라도 펼쳐본다면 곧 알 수 있겠지만, 항상 하나의 토러스(tore, 원환체)를 토대로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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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토러스가 가끔 클라인(Klein)의 병일지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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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의 병은 토러스, 즉 자신을 통과하는 토러스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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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이야기했습니다.

자, 여기, 이 토러스 안에는 절대적인 내부를 나타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공 속에 있을 때, 즉 토러스가 형성할 수 있는 빈 공간 속에서 말입니다. 이 토러스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밧줄일 수 있지만, 밧줄 자체는 꼬이고,그리고 밧줄의 내부로 그려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매듭으로 표현된 것을 활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즉, 분명히 두 가지가 있습니다. 두 종류의 구멍[c와 E]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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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외부[E]라고 부르는 것에 열리는 이 구멍은, 공간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문제를 제기합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공간은 연장(étendue)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신체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종류의 공간 개념을 근거지어 줍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우리가 보통 신체라고 부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 되는 그 토로스(환면, tore)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곧 알게 될 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뒤집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다만, 그것은 구가 뒤집히는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토로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뒤집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여기서, 내가 한 구체가 다른 구체의 내부에 있다고 상상한다고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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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느끼게 해주려는 것과 비슷한 어떤 것도, 단순한 구(球)와 구 사이에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다른 구에 구멍을 하나 낸다면, 그 구는 마치 방울처럼 밖으로 튀어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토로스입니다. 토로스라 함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작은 타이어의 공기 주입용 고무 튜브(chambre à air) 하나만 가져다가 직접 실험해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 튜브가 바로 이런 방식으로… ― 보시다시피, 내가 지금 그것들을 다루는 데 애를 먹고 있는데 ― 이 튜브는 우리가 여기서 만든 그 절단(coupure)이 제공하는 출구로, 말하자면 스스로를 집어넣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설명을 계속 이어간다면:
가령 그 절단이 여기서 다시 접혀지고, 다시 뒤집힌다고 가정한다면, 여러분이 얻게 되는 것은 토로스와는 다른 것 ― 겉보기에는 다른 무엇 ―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토로스 그대로입니다. 단지 이번에는 단면(coupe)으로 본 것이기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이 토로스를 여기서 잘라본다면 얻어지는 바로 그것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눈치채셨을 겁니다. 우리가 토로스에 뚫은 그 구멍을, 마침내 다시 접어서 닫아버릴 때까지 이어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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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우리가 얻는 모양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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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감히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꽤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한번 시도해 보세요. 여기 두 개의 토로스가 있는데, 하나는 일어난 일을 나타내고 다른 하나는 원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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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이 토로스 중 하나에서 같은 방식으로 결합한다면 - 이것은 우리를 다른 것으로 이끌 것입니다 - 이 결합된 토로스 중 하나에서 제가 여기서 설명한 조작을 수행하면 됩니다. 즉, 거기에 절개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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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작업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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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토로스들이 서로 결합(couplés)되어 있다는 것은, 이들 중 하나의 토로스 내부에 또 다른 토로스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두 번째 토로스는 내가 여기 [노란색으로] 그려둔 것과 같은 종류의 토로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첫 번째 토로스 [파란색]에는 내가 그것의 내부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토로스 내부의 어떤 것이 뒤집혔는데, 그것은 첫 번째 토로스의 내부로 남아 있는 것과 정확히 연속성을 이룹니다. 이 토로스는 그런 의미에서 뒤집혀, 이제는 그 내부가 외부로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란색] 토로스를, [파란색] 토로스가 그 주위를 뒤집히는 중심으로 지칭한다면, 우리는 이 [노란색] 토로스 자체는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여전히 자기 고유의 첫 번째 외부―고리(loop) 속에서 자리 잡은 그 외부―를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그 위치는 바뀌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중 하나에서 뒤집힘(retournement)이 발생한 것입니다.


나는… 비록 이러한 것들을 상상하는 일이 대단히 불편하고, 크게 제약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러분에게 이번 경우에 내가 다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그것에 관해 ― 바라건대 ― 이해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비록 이것이 문자 그대로 하나의 토로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같은 모양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막대기(trique)처럼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토로스에 다름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이미 여기서 보셨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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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된 산물은 첫 번째 프레젠테이션과 더 이상 관련이 없는 것, 두 토로스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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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 제가 첫 번째 토러스[파란색]라고 부르는 것이 반전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사슬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첫 번째 토러스, 즉 같은 토러스와 관련하여, 제가 이렇게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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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le même)에 비추어 볼 때, 토로-트리크(le tore-trique)는, 우리가 그 동일한 것(le même)을 기억한다면, 바로 그에 관련하여 놓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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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로-트리크는 여기서 등장합니다. 즉, 사태를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여기서 지목한 토로스에 내야 할 그 구멍은, 토로스 어디에서나 만들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 이 부분을 잘라내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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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 경우, 이 잘린 토로스가 동일한 방식으로 뒤집힐 수 있음이 전적으로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개의 절단을 이어 붙임으로써 우리는 이 형상(aspect)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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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이 토로스를 여기서 절단하면, 나는 그것을 “막대기(trique)” 형태의 제시라고 불렀던 것을 얻게 됩니다. 즉, 토로스에서 두 개의 절단을 통해 드러나는 어떤 것이, 접힘(rabattement)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며, 이는 단일한 절단 ― 내가 여기서 보여준 그 하나의 절단 ― 을 닫음으로써가 아니라, 두 개의 절단을 이어 붙임으로써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여전히 토로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대기(trique)라고 부른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인정하건대, 이것이 결코 쉽고 가볍게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음 시간, 즉 12월 두 번째 화요일에,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로부터 제가 듣고 싶은 것은, 이 두 가지 방식의 토로스 접힘에 더해 제시될 세 번째 방식, 곧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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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우리가 하나의 토로스 속에 또 다른 토로스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동일한 조작은 이 두 토로스 모두에 대해 상정될 수 있습니다. 즉, 이 [첫 번째] 토로스에서의 하나의 절단과, 저 [다른] 토로스에서의 또 하나의 절단 ― 그것은 동일한 토로스가 아니므로 별개의 절단 ― 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그것은 전적으로 분명합니다. ― 나머지는 여러분이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이

두 토로스의 접힘(repliement)이 우리에게 동일한 ‘트리크(trique, 막대기 형태)’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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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 막대기(trique) 안에는 유사한 내용이 담기게 된다는 점,
–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이번에는 내부가 외부가 되고, 그 내부의 토로스 또한 마찬가지가 된다는 점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던지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 히스테리적 동일시(l’identification hystérique),
– ‘아버지에의 동일시’라고 불리는 애정적 동일시(l’identification amoureuse dite « au père »),
– 그리고 내가 중립적 동일시(l’identification neutre)라고 부르는 것, 즉 둘 중 어느 것도 아닌, 특정한 하나의 특징에 대한 동일시, 내가 Einziger Zug(유일한 특징)을 이렇게 번역했던, 곧 ‘어느 특정한 특징에 대한 동일시(l’identification à n’importe quel trait)’.


이 세 가지 토로스의 뒤집힘을, 각각의 실천 속에서 어떻게 배치할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하나의 토로스와 다른 토로스 사이의 대칭성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이들을 서로 상응하는 방식으로 지칭할 수 있겠습니까?
– ‘부계적 동일시’,
– ‘히스테리적 동일시’,
– ‘특징에 대한 동일시’, 그것이 단순히 동일한 특징이라는 점에서.


바로 이 문제에 대해, 다음번에는 여러분이 기꺼이 입장을 취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