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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라깡 세미나 XX Encore : 4

본 연재물은 저자가 프랑스어와 정신분석을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에 되지도 않는 프랑스어로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오역 가득한 번역본으로 해석에 적잖은 혼란을 줄 여지가 있습니다. 공식적인 참고문헌으로 삼기보다는 단순 참고자료로 봐주세요. 오역에 관한 지적은 항상 환영합니다. 전 편에 이어서 진행됩니다.


확실히, 신체에 (성적인 특질인) 수수께끼의 형태로 - 이는 단지 이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 그 존재를 성적으로 만듭니다. 틀림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신체의 주이상스인데, 다시 말해 무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적 주이상스라고 부르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 의해 낙인찍히고 지배당하기 때문입니다 : 말하는 것 내에 무(無)를 짓고, 오직 일자가 우리에게 관심을 제공하는 것,  성적 관계의 일자에 의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분석담화가 보여주는 바입니다. 성적인 존재 중 하나(남자라면 남근적인 기관이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저는 '말했다'라고 말했습니다)에게는 신체의 성(性)이, 다시 말해 여성(女性)의 성(性)이 - 저는 여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성은 없으며, 여성은 전부가 아닙니다 - 그녀에게는 육체의 향유를 매개로 한다는 점 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분석담화는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하는데 - 내가 이런 형식으로 말하는 것에 양해를 구합니다 - 즉 남근이, 두 성적 존재 중 하나에 의해 타자에 의무를 다하기를 양심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내게 여성의 2차 성징에 관해 논하지 마십시오. 새로운 질서가 찾아오기 전까지 집에서는 어머니의 특성이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섹스를 제외하고는 여성을 성적인 존재로 분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남근의 즐거움은 남자가 여자의 몸을 즐기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즐기는 건 여자의 몸이 아닌 남근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지적한 초자아가 '즐겨라!'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대타자의 신체, 대타자의 주이상스가 무한성에 의해서만 촉진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시인 거세의 상관물입니다. 나는 제논의 역설을 뒷받침하는 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역자 주 : 제논의 역설 中 가장 유명한 예시) , 이는 성적 존재의 일면을 향유하는 구도입니다. 아킬레우스가 한 걸음 내디뎌 브리세우스(역자 주 : 브리세이스의 원래 이름은 히포다메이아(Ἱπποδάμεια)로, 아버지 브리세우스의 이름에서 '브리세우스의 딸'이라는 뜻의 브리세이스로 통상 불린다.  리르네소스 출신으로, 아킬레스가 그 도시를 정벌한 후 그녀를 전리품으로 취했다. 아킬레스는 이때 브리세이스를 사실상 자신의 아내라고 표현하며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고백한다.)와 동침하고자 한 걸음 내디뎠을 때, 그녀는 거북이처럼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녀는 (그에게)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킬레스는 두 번째 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이는 단지 우리의 주이상스와 같으며, 수(le nombre, 數), 진실, 더 나은 방식으로 말하자면 '실재'를 정의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논이 보지 못한 것, 그것은 거북이도 아킬레스를 짓누르는 운명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이며,  브리세이스에 대한 발걸음의 폭도 점차 작아져 결코 그 한계에 다다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든, 이것이 실재라 부를 수 있다면 수를 정의하는 방식이겠죠. 한계에 다다른 수, 이러한 방식으로 무한이 정의됩니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만 있고 그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그는 거북이에 무한으로써만 도달합니다.


이는 주이상스에 관한 말, 즉 성적인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주이상스는 그 구멍, 팔루스(남근)적 주이상스 외 다른 것은 남겨두지 않는 그 구멍에 의해 표지 됩니다. 반면에 지금까지는 비약에 불과했던 것, 주이상스 내부의 틈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말해주는 그 무엇이 성취될 수 있을까요?


매우 기이한 일이지만, 이는 정말이지 외부의 관찰에 의해서만 제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관찰'이란 말은 스스로 무너질 수 있는 말입니다. 천상의 존재, 이는 대안이라고 할만한 것이 이전에 언급한 앵무새와 같이 어리석게 되는 것에 반대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주이상스는 신체의 주이상스 내에서 막다른 곤경에 의해 드러난 존재의 특권을 갖는다는, 이 아이디어가 영감을 주는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이 주이상스의 공간 안에 무언가를 경계 짓고 굳건하게 만드는 것, 이곳은 어떤 장소이며, 이 장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위상(la topologie)입니다. 여러분이 보게 될, 내 작년 세미나에 이은 글에서 나는 구조와 위상의 동등성을 입증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면, 익명성으로부터 우리가 주이상스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법이 명령하는 그것을 구별해 내는, 그건 기하학입니다. 기하학, 이는 장소의 이질성이며, 다시 말해 그곳에 대타자의 장소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대타자의 장소(성으로서의 타자, 절대적 타자의 장소)로부터, 가장 최신의 위상학(la topologie)의 발전은 우리가 무엇을 진전시키게끔 해주는 거죠?


나는 여기서 밀도(la compacité)의 용어를 진전시키고자 합니다. 공백만큼 밀도 높은 것도 없습니다. 거기에서 닫힌 모든 것의 교집합이 무한한 수의 집합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면 교집합은 무한대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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