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응. 고생했어. 이제 안전한 곳으로 가자.”
저 빛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은 저 너머의 존재보다는 지금 여기 있는 우리를 위한 행위이기도 하고.
횡단보도 앞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도로를 달리는 차를 노려보던 피투성이 꼬마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 한 번에 말간 얼굴이 되고, 조심스럽게 안아주면 인상을 풀고 눈물을 쏟아낸다.
한을 풀어놓는 짧은 시간이 흐르고 저 멀리 눈 부신 빛이 나타나는 순간 아이가 서서히 사라진다. 잠시 후 혼자 서 있는 하리 옆에 남은 것은 허기다.
귀신은 고칼로리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속담의 틀린 맞춤법이 아니라 정말로 칼로리가 높다.
이러다가 정말 90kg을 찍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하리는 견과류가 잔뜩 들어간 초코바를 베어 물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언제나 한 개 이상 잡히는 하리의 원픽 초코바는 약간 녹아 있어도 어깨에 쌓인 피로를 날리기에는 충분했다. 오늘따라 등굣길에 여러 명의 귀신을 마주쳐서 더욱 피곤한 참이었다. 하리는 한동안 적당히 넘기며 요령을 부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침 조회 시간이 가까워진 만큼 시끌벅적한 교실 안으로 들어서자 반 친구들의 시선이 하리에게 모여들었다. 가볍게 손을 들면 여기저기서 ‘안녕’, ‘늦었다’, ‘고하리, 오늘은 뭐 먹어?’ 등등 반겨주는 소리가 들린다. 친구들 한 명 한 명에게 시선을 맞춰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타이밍 좋게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자리를 바꾸는 날이라 평소보다 이른 등장이었다.
친구들은 각자 머릿속에 이상적인 배치를 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금방 얌전해진 반 아이들을 쭉 훑은 담임 선생님의 고개가 교실 바깥쪽으로 돌아갔고 끄덕하는 신호와 함께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쭈뼛거리는 두 발이 들어온 찰나의 순간 교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쟤 대체 뭘 달고 다니는 거야?”
하리만이 변화를 알아채고 작게 중얼거린 말은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자, 이 친구는 몸이 안 좋아서 작년에 휴학했다가 오늘부터 다시 나오게 됐어. 다들 무리도 생기고 서로 친해졌겠지만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줘. 알았지?”
네, 하는 대답이 끝나자 딱딱하게 굳은 학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빛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뻣뻣한 자세까지 여러 의미로 자기소개를 확실하게 하는 소녀였다. 하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수상한 새 친구를 살폈다.
“어… 나는 구해주라고 해. 몸이 좀… 약해서, 어, 그…. 자, 잘 부탁해!”
주번이 새 책상을 가져와야 했기에 해주는 자리 뽑기가 끝날 때까지 교탁 옆에 서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는 바람에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반 아이들 모두 해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17번 뽑은 사람 누구야?”
반장의 부름에 하리가 손을 들었다. 묵직한 가방을 들고 자리로 가니 멀뚱멀뚱 서있던 해주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새로운 짝꿍은 가까이서 보니까 더욱 심각한 상태였다. 햇빛을 자주 못 보는지 창백한 피부는 바짝 말라 있었고 입술은 피딱지가 앉은 상태로 오래 방치된 것 같았다. 살을 뺀다거나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마른
친구들은 더러 있었지만 학생 특유의 생기까지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뚫어지게 쳐다보면 긴장한 해주가 또 입술을 씹을까봐 하리는 웃으며 초코바를 내밀었다.
“고하리야. 반가워.”
“아, 어, 어…….”
대비되는 손가락들이 스치고 하리의 귓가에 작은 소리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노이즈가 강하게 섞여 더듬더듬 말하는 것 같은, 하리에게는 익숙한 소리였다. 해주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눈동자를 굴린 하리가 기지개를 켜며 해주의 어깨를 살짝 쳤다. 동시에 해주의 목을 감싸는 손이 사라졌다.
“헉…!”
귓가에 숨결이 닿고 연달아 자신을 덮칠 고통을 대비하던 해주는 갑자기 어깨가 가벼워지자 의아해졌다. 옆자리에서 시원한 비누향이 풍겨왔다. 특이한 이름을 가진 짝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분 탓인가. 어쩐지 낯선 교실이 마냥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리는 원래부터 집중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유독 거슬리는 것들이 많았다. 수업 시간마다 바뀌는 선생님들처럼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귀신들 때문에 자꾸 고개가 돌아갔다. 볼펜을 줍는 척, 스트레칭을 하는 척, 다른 친구를 부르는척, 실수인 척 해주에게 붙은 귀신을 톡톡 털어내느라 점점 배가 고파졌다.
영문을 모르는 해주는 그저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가 보다고 생각하며 가벼운 얼굴로 수업을 들었다. 결국 허기를 참다못한 하리가 화장실을 가는 해주를 따라 나왔다.
“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어?”
손을 씻다 깜짝 놀란 해주가 하리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가 얼마나 깊은지 순간적으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하리는 아차 싶어 표정을 풀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 음. 그러니까, 내가 뭘 좀 보는데. 아, 혹시 평소에 두통이나 어깨 결리는 것 심하지 않아? 치료받아도 소용없고.”
2012년의 흔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이 흔히 겪는 증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하리의 말이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해주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제 것이 아닌 차가운 감촉이 등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가 하리가 한걸음 가까워지자 사라졌다.
“… 네가 한 거야?”
하리가 눈을 접으며 활짝 웃었다. 둥근 뺨이 갓 구운 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놀란 해주가 더 대화를 나눠보려는데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하리는 먼저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이제는 해주가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이것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라지게 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물어보고 싶은 질문들이 한가득 떠올랐다. 유독 느린 듯한 50분을 힘겹게 견디고 있는 해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리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