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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아 Nov 08. 2024

귀신이 고칼로리 15

상아 경장편 소설

여자는 사랑은 사람에게 가장 해로운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추위를 막아주던 손이 공기보다 차가워졌을 때 그렇게 느꼈고, 눈물이 떨어져 꽃잎에 부딪힐 때 확신했다. 그럼에도. 무덤을 파내리는 손은 결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노래방 가자!” 


지루한 기말고사가 끝이 나고 가벼워진 가방을 흔들며 도희가 외쳤다. 몇몇이 힐끔 거리면서 지나갔지만 도희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고 해주와 하리를 잡아끌었다. 볼 살이 조금 들어간 하리가 밀린 잠을 자야 한다며 손을 저으려다 내심 기대하는 얼굴의 해주와 눈이 마주쳤다. 


“대신 도희가 간식 사.” 


“콜!” 


도희는 용돈을 받아 두툼해진 지갑을 흔들었다. 마침 단골 노래방 근처에 도희가 자주 가는 프랜차이즈 카페도 있겠다, 오늘은 친구들을 데리고 신나게 놀 작정을 하고 등교한 참이었다. 


“나 노래방 처음 와봐.” 


“재밌을 거야. 좋아하는 노래는 있어?” 


어두운 지하로 성큼성큼 내려가는 도희 뒤로 해주가 가까이 붙었다. 눅눅한 냄새와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들렸다. 


“내가 또 한 노래 한단 말이지.” 


익숙하게 사장님과 인사를 나눈 도희가 9번 방으로 향했다. 말없이 초코바를 우물 거리던 하리가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가 자연스럽게 해주를 감싸듯 몸을 돌렸다. 해주는 쭈뼛거리며 작은 쇼파에 앉았다. 

노래방이 처음인 해주를 위해 도희가 주로 마이크를 잡았다. 심드렁한 표정이었던 하리도 흥이 오르자 책자를 뒤적이며 선곡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신기한 해주는 친구들의 노래에 맞춰 어설프게 탬버린을 흔들었다. 어둡고 습한 공기가 낯설었지만 반짝이는 미러볼 아래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 덕분에 노래방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생기고 있었다. 




단골이라는 말이 허풍은 아닌지 계산한 시간보다 더 많은 서비스 시간이 들어왔고 땀이 잔뜩 맺힌 도희가 물을 받아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하리도 집중해서 책자를 보느라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음?” 


하리의 옆에 앉아 책자를 살피면서 아는 노래가 있는지 구경하고 있는데 문 쪽에서 작은 소음이 들렸다. 무슨 소리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화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른 방에 손님이 왔나 보다 하며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찰나 짝! 하는 소리가 들렸고 해주는 본능적으로 뛰쳐나갔다. 

기분 나쁜 계집애, 너 때문에 재수가 없어. 비웃는 말과 따라오던 손찌검을 해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뺨을 때리는 소리였다. 

하리도 바로 일어나 해주를 따라 나왔다. 해주는 맞은편 방문 앞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불이 꺼진 빈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해주의 어깨를 붙잡아 돌리자 아직 진정되지 않아 커져 있는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물통을 들고 돌아오던 도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방, 기계 고장 나서 안 쓴 지 꽤 됐어.” 


9번 방의 맞은편, 구식 노래방의 가장 안쪽에 있는 그 방은 오래전부터 굳게 잠겨있었다. 도희는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많은 날에는 사용했었는데 노후된 시설 때문에 손님이 줄어들면서 고장 난 기계를 방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누가 맞는 소리가 났어.” 


“뭐?” 


해주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었다. 어느새 손님들이 다 빠져나갔는지 노래방은 고요했다. 정말로 누군가가 맞았다면 큰 소란이 이어졌을 상황이었다. 


“아무도 없는데? 사장님도 못 들으신 것 같고.” 


셋의 시선이 마주쳤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하리는 해주를 끌어당겨 반걸음 뒤로 보냈고 도희는 문에 가까이 갔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정해진 포지션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반투명한 문에 얼굴을 붙이고 휴대폰 불빛에 의존해 어두운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도희가 문고리를 잡았다. 


“왜? 뭐가 보여?” 


도희는 말없이 손잡이를 돌렸다. 잠겨 있다는 문이 쉽게 열렸다. 새카만 어둠이 세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주춤거리지 않고 들어간 도희가 쇼파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딱 봐도 수상한 냄새가 나지?” 


먼지를 털며 나온 도희의 손에 작은 귀걸이 하나가 놓여있었다. 동시에 하리가 코를 막으며 해주를 가리고 섰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던 역한 피냄새의 근원이 이 귀걸이였다. 하지만 하리의 주의를 끈 것은 따로 있었다. 


“이거 그쪽 거 맞죠?” 


노래방을 들어오면서부터 느꼈던 위화감과 방 안으로 향할 때 복도에 흐르던 분노, 맞은편 방문에 달라붙어 셋을 쳐다보는 여자까지. 친구들 때문에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도희가 들고 나온 귀걸이 쪽으로 손을 뻗는 여자를 막아야 했다. 잠시 멈칫한 여자가 귀걸이를 돌려달라는 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리의 시선이 귀걸이로 향하자 눈치 빠른 도희가 잽싸게 귀걸이를 건네며 해주 옆으로 물러났다. 


“맞는 소리, 물어보면 안 돼?” 


옷자락을 잡는 힘이 느껴졌다. 해주가 뛰쳐나간 순간부터 결심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여자는 귀걸이를 받아 한걸음 멀어졌다. 하리가 다시 질문을 하려는데 여자가 먼저 입을 벌렸고 울컥하고 피가 튀었다. 곧이어 드러나는 여자의 입 안에는 피에 젖은 하얀 천 같은 것이 뭉쳐진 채 목구멍을 막고 있었다. 꺽꺽대는 소리와 계속해서 쏟아지는 피에 하리가 뒤로 물러나면서 도희와 해주도 두어 걸음 밀려났다. 

잔뜩 굳은 얼굴을 살피다 도희를 한번 쳐다본 해주가 다시 하리의 옷을 당겼다. 


“내가 가까이 가볼….” 


“안돼.” 


단호한 말투에 당황한 해주를 감싸며 도희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런 소문이 있었어.” 


귀밑 5cm라는 두발 규정을 혼자만 착실히 지켜서 누가 봐도 모범생 비주얼이었던 14살 도희가 노래방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을 시기였다. 중간고사가 끝난 기념으로 친구들과 노래방에 도착했더니 내부 사정으로 한 달간 영업을 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살짝 들여다본 유리문 안은 그저 깜깜하기만 했다. 괜히 서늘해져서 돌아간 다음 잊고 지내다 보니 학교 안에 소문이 퍼졌다.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는 거야. 커플이었는데 여자가 바람을 피웠다고 엄청 싸웠대. 다툼이 지나치게 커진 거지.” 


노래방은 고지한 기간이 끝난 뒤 리모델링을 한 채 영업을 재개했다. 더 깨끗한 벽지와 신식 기계를 들여놓은 덕분에 아이들 사이에 돌던 소문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도희 역시 즐거운 취미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고 다만 잠겨있는 구석방에는 가까이 갈 때마다 찝찝한 기분이 들어 피하곤 했다. 그래도 노는 재미가 더 컸던 중학생에게는 단순한 도시 괴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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