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하리는 종종 바라는 것 없이 악의로 가득 찬 영혼을 만나기도 했다. 지하철도 없는 작은 도시에 뭐 그리 깊은 원한을 갖고 있는지 그들은 무작정 공격을 하거나 하리의 몸을 차지하려고 들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하리보다 강한 귀신을 만난 적은 없어서 큰 피해를 입은 적은 없었지만 하리는 그날 이후로 언젠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을 마주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진짜 귀신이 있었구나.”
하리는 여전히 여자를 마주 보고 방벽처럼 서 있었고 해주가 초조한 티를 내기 시작했다.
“하리야….”
“말을 할 수가 없는 것 같아.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해주는 그럼 역시 빙의되어서 직접 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친구들을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과 안타까운 영혼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다투기 시작했다.
“그냥 갈 거야 그럼?”
도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계속해서 피를 토하는 여자와의 기묘한 대치 상황 속에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해주였다.
“아파 보이잖아.”
해주는 크게 한 걸음을 내밀었다. 자기 통제를 잃는 기분은 결코 좋지 않았고 정신이 들었을 때 자신을 쳐다보는 걱정 가득한 표정을 마주하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했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정신 차릴 수 있어.”
“해주야!”
오늘따라 유독 행동이 빠른 해주가 하리와 도희가 말릴 새도 없이 귀걸이를 쥐고 있는 여자의 손을 붙잡았다. 하리의 외침과 함께 해주가 휘청였다.
붉어진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든 해주의 코에 피가 흘렀다.
“구해주, 괜찮아?”
“… 아파… 아파….”
낮은 목소리는 해주의 것이면서 해주의 것이 아니었다. 하리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막지 않았다. 도희는 손수건을 꺼내와 꼼꼼하게 해주를 살폈다.
“혹시 뭐 떠오르는 거 있어… 요?”
“… 너무 아파….”
해주의 코를 감싼 도희의 손수건이 금방 젖어들었다. 여전히 탁한 목소리로 해주가 손을 흔들었다. 하리는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갔고 따라 들어온 도희가 문을 닫았다. 기계마저 꺼져있는 방 안은 희미한 바깥의 불빛 외에 어둠에 잡아 먹힌 상태였다. 안으로 들어오니 악취가 더욱 강해졌다.
“리모델링했는데 이 냄새는 뭐지….”
“실제 냄새가 아니라 원한의 흔적일 거야.”
도희의 혼잣말에 대꾸한 하리가 자꾸 돌아가는 해주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코피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와 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피가 넘어가지 않게 잡아주며 막막함을 느꼈다. 지난번 화장실 귀신처럼 자신의 접촉에도 빙의가 풀리지 않는 경우가 늘어가면 어떻게 해주를 지켜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어, 괜찮아지나 봐.”
코피가 멎고 해주의 시선이 서서히 돌아왔다. 하리가 신중한 얼굴로 해주의 볼을 쓰다듬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 해주가 검은색 핏덩어리를 뱉어냈다. 손에 잡고 있던 귀걸이가 떨어져 작은 소리를 냈다. 도희가 귀걸이를 줍는 동안 해주는 자신이 본 장면을 이야기했다.
“온몸이 너무 아팠어. 맞는 것도 무서웠는데 그 눈빛이….”
온갖 달콤한 사랑을 가득 담아 토해내던 입술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칼날 같은 눈빛을 함께 갖고 있던 남자는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여자를 쥐어짰다. 목에 사슬이 걸린 것처럼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이 무기력해졌다. 여자가 도망치려는 낌새만 보여도 남자는 결백한 피해자로 변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남자가 노래를 부를 때 휴대폰을 봤다는 것이 문제였다. 집에서 온 짧은 문자 하나 때문에 여자는 선물로 받은 싸구려 귀걸이를 쥔 채 쓰러졌다. 술에 취한 남자는 힘 조절을 하지 못했다.
“완전 미친놈 아냐! 그 새끼 지금 어딨을까? 죽었나? 죽었으면 좋겠는데?”
해주의 이야기를 듣고 잔뜩 화가 난 도희가 발을 세게 굴렀다. 하리는 해주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해주야, 나 봐봐.”
“응. 이제 괜찮아.”
해주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천천히 정리했다. 여자가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복수를 위해서? 억울하니까? 죽음이 묻혔나? 노래방에서의 기억이 끝이었기에 여자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아, 혹시.”
빠른 속도로 흐려져 가는 잔상을 되새기던 해주가 문득 기억 속의 여자가 한 말을 떠올렸다.
“돌려달라고 했어.”
“뭐를?”
셋이 동시에 한 짝만 남은 귀걸이를 쳐다본 그때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아 이상함을 느낀 사장님이 문을 두드렸다.
“아니, 여기 잠겨있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대? 위험하니까 얼른 나와.”
싹싹한 도희를 예뻐하던 사장님이었기에 의심스러운 얼굴로 셋을 부르기만 했을 뿐 혼이 나지는 않았다.
도희가 방을 정리하는 사장님을 도우며 은근슬쩍 운을 띄웠다.
“사장님, 근데 저 방은 왜 잠가두시는 거예요? 아깝잖아요.”
“기계 바꾸는 돈이 더 들어서 그렇다니까. 손님도 줄었는데.”
“흠, 진짜 그게 다예요?”
가는 눈꼬리가 더욱 가늘어지며 도희를 향했다. 팔짱을 낀 사장님이 하리와 해주를 슬쩍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우리 사장님, 장사하기 많이 힘드실 텐데. 혹시 고민 같은 건 없으세요? 저희가 들어드릴게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서비스!”
잔망스러운 한 마디에 결국 웃음이 터진 사장님이 카운터로 돌아가 음료수를 꺼냈다. 시원한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음료수를 마시자 탁한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도희 너 아줌마가 귀신같은 거 안 믿는 거 알지?”
“맞아요. 늘 새벽까지 혼자 계시다가 퇴근해도 안 무섭다고 하셨어요.”
“에휴. 이걸 너희한테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사장님이 나긋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적막이 감도는 가게 안에서 방 하나하나를 들어가 기계를 점검하거나 뒷정리를 하다 보면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틱틱.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나 작은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가끔은 짝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방을 돌다가 가장 끝 방에 도착했을 때 흐릿한 형체가 바닥을 더듬고 있는 형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는 방이 꼭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 같아서 같은 일을 몇 번 겪은 뒤로는 소리가 나도 더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며 짧은 이야기가 끝난 후 멋쩍어하는 사장님을 도희가 다독였다. 음료수 캔을 마저 비운 뒤 노래방을 나서는 셋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왜 바닥을 기고 있었을까?”
“이거 때문이겠지.”
“그러고 보니까 남은 한 짝이 없었어.”
세 사람은 선뜻 이동하지 못하고 길 한쪽 구석에 서서 머리를 굴렸다. 사연이 있는 것은 알아냈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살인 사건이라면 경찰이 처리했을 것이며 완벽한 타인인 데다가 학생 신분인 그들로서는 개입할 기회를 얻기 어려울 것이었다.
“하리야. 예전에도 이런 귀신들 만난 적 있어?”
“…응.”
“그럴 때 어떻게 했어?”
해주의 질문에 하리는 기억을 되짚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꽤 많은 수의 귀신들은 대부분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사라졌고 자각이 있는 경우라면 원통한 마음을 털어놓음으로써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경우가 다수였다. 최근에 만난 영혼들처럼 원하는 것을 수수께끼처럼 알려주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야기만 들어줘도 사라지던데…. 나도 잘 모르겠다.”
“뭔가 더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천….”
하리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입 속에 왜 천이 있는 건지….”
“아… 그냥 천이 아니었어.”
하리가 중얼거린 말에 해주가 이마를 짚었다. 여자가 보여준 장면 속에서 취한 남자가 했던 기괴한 행동이 하나 있었다.
“양말이야….”
“미친….”
도희가 입을 틀어막았다. 하리도 인상을 세게 찌푸렸다.
그 당시 퍼졌던 소문과 해주가 본 기억대로라면 여자는 잘못 맞았거나 너무 심한 구타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하리가 집중하는 부분은 사인이 아니었다.
“아무리 노래방이 시끄러웠어도 사람이 맞는 소리는 들렸을 거야.”
“그럼 소리 안 나게 하려고….”
결국 도희에게서 거친 욕설이 쏟아졌다. 해주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사장님이 목격했다는 바닥을 기던 여자도 무언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면? 끔찍한 상상을 멈춘 하리가 근처 카페로 해주와 도희를 이끌었다. 열량 섭취가 필요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