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아무튼 너희 둘 다 이대로 잊어버릴 생각은 없지?”
“당연하지.”
도희는 씩씩하게 받아쳤고 해주는 민망한 듯 웃는 것으로 대신 대답했다.
하리는 한숨을 참으며 아이스티를 쭉 들이켰다. 과일 토핑이 올라간 치즈 케이크를 한 입 크게 먹자 팽팽 돌아가던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조각나 있는 단서들을 돌아보며 다음 계획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일단 문이 또 열릴 거라는 보장이 없어.”
애초에 잠겨져 있는 문이 어떻게 열렸는지도 알지 못했다. 한을 품은 영혼이 그들을 부르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닐지 추측할 뿐이었다.
“배부터 좀 더 채우자.”
피를 흘려 창백해진 해주의 얼굴과 결과야 어찌 됐건 영혼과 접촉해 홀쭉해진 하리의 볼을 쳐다보던 도희가 팔짱을 끼고 근처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노래방에서 신나게 논 다음 꼭 방문하는 장소였다.
도희의 우렁찬 인사를 듣고 요리하던 사장님이 활짝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도희 오랜만이다. 오늘은 다른 친구들이랑 왔네?”
“이제 자주 올 거예요.”
도희는 자연스럽게 수저와 물컵을 나누어 주고 메뉴판을 보지도 않은 채 주문을 마쳤다.
“여긴 무조건 치즈떡볶이에 튀김 세트야. 감자튀김도 넣어주셔.”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심각한 표정들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이 등장하자 금방 사라졌다. 가장 행복해 한 사람은 해주였다. 끼니를 거르던 것이 습관이 되어 평소에도 입이 짧은 해주가 볼이 빵빵해져서 떡을 씹는 모습에 하리는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도 있어.”
“아니면 그 범인을 직접 만나야 할지도 모르지.”
통통해진 배를 두드리며 제삼자에 미성년자인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떠올렸다. 딱히 효과적인 방안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모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의무감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책임감이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집에 가서 쉬고 다음 주에 보자.”
내일이 주말이라서 푹 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하리 밖에 없었다. 해주는 아쉬움을, 도희는 찝찝함을 안고 겨우 잠이 들었다.
꿈속의 하리는 피아노 학원 가방을 들고 길가에 서 있었다. 학원에 가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배가 고파서 간식을 사 먹을 예정이었다. 그때 지나가던 남학생들이 돼지라며 하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덤덤하던 하리의 얼굴이 누군가를 보고 활짝 펴졌다.
하리야.
다정하고 씩씩한 그 목소리가 얼마나 그리운지, 꿈이라는 걸 인지하자마자 흐려지는 형체를 조금이라도 더 붙잡으려 애썼다.
귀걸이… 찾아… 가까운 곳…
잠에서 깬 하리가 마지막 얼굴이 어땠는지를 떠올렸다. 안개가 낀 듯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리는 한참을 웅크리고 앉아 그리움에 허우적거렸다.
“남은 귀걸이를 찾아야 할 것 같아.”
길었던 주말이 끝나고 등교하자마자 모인 친구들에게 하리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고 도희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찾아야 하지?”
“가까운 곳…. 혹시 그때 주운 귀걸이 가져왔어?”
“응. 이거 계속 갖고 있었는데 주말 내내 아무 일도 없었어.”
해주가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귀걸이를 꺼냈다. 흔한 디자인에 녹이 슨 싸구려 제품이라 파는 곳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 범인 행방을 알면 좋을 텐데.”
“기사가 남아 있지 않을까?”
“우리 도서관 가?”
도서관 투어가 인상 깊게 남았는지 해주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도희는 귀걸이를 들고 노래방 근처 가게들을 둘러보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야자를 빠지기로 한 셋은 하교 후에 바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2층이었던 거 같은데.”
한번 와 봤다고 익숙하게 열람실을 들어가는 해주를 보고 하리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신문만 살펴보면 되었기에 둘은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날짜를 설정했다. 스크롤을 얼마 내리지 않아 노래방, 살해, 연인 등의 단어가 나타났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침묵이 깔렸다.
“저런 걸 연인사이라고 적어놔도 되는 거야?”
“끔찍해.”
“그래도 바로 잡혔네. 형량은 얼마 안 나왔지만. 아직 감옥에 있겠는데.”
남자가 평소에는 착한 사람이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과 여자가 우울증 약을 복용 중이었다는 증거로 인해 우발적인 살인으로 결론이 내려졌다는 기사였다. 유력한 용의자인 남자는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검거되었고 범행을 인정했다. 사건의 잔인함에 비해 조사와 형 집행은 빠르게 흘러갔다.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 둘은 사건 현장이 찍힌 사진에서 피 묻은 노래방 바닥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범인 말이야. 술에 취해 있었고 귀신 본다고 막 정신이상도 주장해서 보호 감호소로 갔다가 조기 출소했대.”
“뭐?”
새롭게 얻은 정보를 들고 노래방 근처 카페에 모이자마자 다급하게 말을 쏟아내는 도희 덕분에 하리와 해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리고 바로 잡힌 게 아니라 도망쳤다가 노래방에 무단침입해서 잡힌 거래.”
도희가 귀걸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걸 찾으러 갔던 걸 거야. 분식집 사장님이 그 남자가 잡혀가면서 막 귀걸이가 어쩌고 소리치는 걸 들으셨어.”
하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귀걸이가 중요한 열쇠인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럼 남은 한쪽을 찾을 수는 없는 거겠지?”
“소문이긴 한데 워낙 질이 안 좋고 여기저기 시비 걸고 다니는 걸로 유명해서 이 근처 매장에 범인 얼굴을 아는 분들이 꽤 있다더라고. 저기 편의점 사장님은 심지어 몇 달 전에 근처에서 마주쳤다고 하시던데?”
“그런 짓을 하고도 여기에 살아?”
해주가 속이 안 좋아져 에이드를 쭉 들이켰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잘살고 있진 않겠지.”
하리는 목이 막혀 꺽꺽대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렸다.
“우리도 마주칠 수 있겠다. 근데 못 알아보면 어떡해?”
기사에 실린 범인의 사진은 흐릿했고 세월이 흘러 외모가 변했다면 더욱 알아챌 수 없을 거라는 걱정이 들었다.
“내가 빙의해서 마주친다면….”
“위험한 건 최대한 피하자.”
하리와 도희가 곧장 반대했지만 이번에는 해주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리 혼자서 해결할 수도 없잖아. 나는 그분 기억을 볼 수 있고, 저번에도 괜찮았어. 또 너희가 옆에 있으면 더 괜찮을 거야.”
“아직 몸도 약하면서.”
하리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당당하게 자신을 지켜달라는 해주에게 끝까지 반대하기도 어려웠으므로 실랑이 끝에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면 다시는 이런 일에 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세 사람은 카페를 빠져나왔다. 다음 목적지는 노래방이었다. 늦은 시간에 방문한 그들을 의아하게 반겨준 사장님은 긴장한 셋이 사건 이야기를 꺼내자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어휴, 얘들아.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사장님. 이상한 일 겪으셨던 거 말이에요.”
“원래 이런 지하에 있는 건물이 음기가 강해서 그럴 수 있다더라. 그 일이랑은 관련 없는 거야. 그리고 내가 피곤해서 착각한 걸 수도 있고, 그러니까 더 얘기하지 말자.”
완곡하지만 쉽게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은 사장님의 태도에 도희도 더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하리는 그동안 복도를 노려봤다. 알록달록한 불빛들 너머 끝 방은 홀로 어둠을 토해내고 있었다. 틱. 스윽. 웅웅 거리는 노랫소리 사이로 작은 소음을 들은 해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사장님… 그 여자분이 많이 아프대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해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빙의는 아니었지만 혼자 죽어간 여자의 고통이 여전히 온몸에 남아있었다. 잘게 떨리는 몸을 본 사장님은 잠시 고민하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뭘 알고 싶니? 그때 이야기를 해주면 될까?”
“저 방에 다시 한번 들어가게 해 주시면 돼요.”
도희가 사장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마냥 아기처럼 보이는 셋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도희까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결국 열쇠를 전해줄 수밖에 없었다. 잘못 본 거라고 믿고 싶어도 사장님 역시 가끔씩 그 여자가 나오는 꿈을 꿨다.
“정말 괜찮겠어?”
해주는 더 이상 하리의 만류에 약해지지 않았다.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열쇠를 꽂기도 전에 문고리가 돌아갔다. 하리와 도희를 한 번씩 쳐다본 해주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