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바보 같은 내 모습을 바로잡아 준, 당장 지금 대답해 달라는 단장 오빠 덕분에 우리는 그날부터 사귀게 되었고 그 주 주말에는 커플로서의 공식적인 첫 데이트가 있었다. 그 당시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잠실 롯데월드몰에 가기로 했는데 우리 학교 앞에 바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거기서 만나 같이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동안 10번 넘게 둘이 만나 놀았지만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되어 하는 첫 데이트라니 왠지 모르게 긴장됐다. 아직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학교 앞에서 둘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누구한테 들킬까(?) 하는 괜한 걱정도 들었다. 들키는 걸 걱정했던 이유는 어딘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아무도 안 물어본 나에 관한 정보를 하나 풀자면 나는 특히 연애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관계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주변에 알리지 않는 편이다. 8년 가까이 연애하는 동안 그 흔한 인스타그램 #럽스타그램 피드 하나조차 올린 적이 없다.
그렇게 여러모로 떨리는 마음으로 버스정류장에 나가보니 우리 학교 앞인데도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눈에 들어오는 그의 옷차림. 나는 또 한 번 반하고 말았다. 체격이 좋고 훤칠한 오빠는 평소 대충 봐도 옷 핏이 좋았는데 이전까지는 맨투맨이나 후드티 등 편한 옷을 입은 모습만 봤었다. 그런데 우리의 첫 데이트날에 그는 소라색 옥스퍼드 셔츠에 네이비 슬랙스, 그리고 단정한 흰 스니커즈를 신고 팔에는 선선할 때를 대비한 베이지 카디건을 두르고 있었다. 지금 대충 다시 떠올려 봐도 대단히 멋 부린 것은 아니지만 실패하기 어려운 어려운 센스 있는 조합이다. (지오다노 남자 모델 st)
"어, 왔나~?" (경상도 사투리)
"네 오빠 먼저 와 있었네요?" (아직 존댓말 씀)
"얼마 안 기다렸다ㅋㅋ 버스 곧 온대"
곧 우리가 탈 빨간 버스가 도착했다. 중간보다 조금 뒤쪽 자리에 양 옆에 나란히 앉았는데, 조용한 시외버스에서 소곤소곤 대화하는 것도 뭐해서 그냥 조용히 휴대폰만 보면서 가던 길의 어색함이 기억이 난다. 차라리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면 별 이야기라도 다 하면서 안 어색한 척 정적을 깰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고질병: 정적 못 견딤)
잠실에 도착해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쇼핑몰에 들어가 밥 먹고 커피도 마시고 이것저것 구경도 하다 보니 정말 우리가 연인이 된 느낌이 났다. 어깨동무를 한 적은 있어도 손잡은 적은 없었는데 어느새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도 잡고 걸어 다니고 있었다.
손을 잡으니 내 속에서 더 큰 용기가 솟았나 보다. 한 줄로 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는데 단장 오빠는 나보다 한 칸 앞에, 나는 바로 그 뒤에 서 있을 때였다. 나도 모르게 뒤에서 단장 오빠의 어깨와 목을 꼬옥 껴안고 백허그를 했다. 그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살짝 뒤를 돌아 나를 보고 미소를 띠었다. 나는 거기서 한 술 더 떠 나를 돌아보는 오빠에게 쪽 입술뽀뽀를 했다.(에스컬레이터에서 죄송합니다) 우리의 첫 뽀뽀였다. 당황한 단장 오빠는 정말 그대로 표정이 굳어 약 2초간 시공간이 멈춘 듯 가만히 있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으로 돌았다.
'뭐지? 왜 아무 반응이 없지? -_-'
웃는다거나 귀여워한다거나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잔뜩 굳은 표정으로 다시 앞을 보고 서 있던 단장오빠. 이제 에스컬레이터를 다 내려가 옆에 나란히 서면 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방금 이거 없던 일로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면 되나? 마저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둘 다 방금 전 일에 대한 언급 없이 다시 손을 잡고 걸었다. 민망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렇게 조금 걸으니 1층 메인 입구 쪽에서 작은 카드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나무에 걸어 소원을 비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저거 하러 갈까?"
"(다행이다 지금은 뭐라도 해야만 해) 좋아요!"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화제가 전환될 만큼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싶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 천천히 적었다. 아마 대충 '우리의 첫 데이트! 밥도 맛있었고 커피도 맛있었고 날씨도 좋고 기분 최고! 다음에도 또 놀러 오자~♡'따위의 상투적인 내용을 적었던 것 같다.
한 칸 떨어져 카드를 쓰고 있는 오빠를 보니, 카드의 여백은 아직도 휑하게 비어있는데 뭔가를 아주 깊게 고민하는 듯 펜을 쥐었다 놨다 하며 좀처럼 적지 못하는 듯 보였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쓰려고 그러지!'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그를 보며 자꾸만 웃음이 났다.
먼저 나무에 내 카드를 걸고 멀찍이 떨어져 오빠를 기다리는데, 그제야 오빠도 다 썼는지 카드를 매달고 내게 걸어왔다.
"오빠, 뭐라고 썼어요? ㅋㅋㅋ"
"비밀이제"
"아 그런 게 어딨어, 제 거 보여줄 테니까 오빠 것도 보여줘요!"
그의 손목을 붙잡고 내가 카드를 걸어둔 나무로 걸어가 활짝 펼쳐 보여주니 그저 엷은 미소를 띠던 단장 오빠. 사실 뭐 대단한 내용도 아니니 괜찮다. 나의 온 관심은 그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가 그렇게 그렇게 고심해서 쓴 카드로 쏠려 있었다. "직접 가서 봐라" 한 마디를 하고는 멀찍이 떨어져 괜히 딴청을 부리는 모습에 뭔가 오글거리고 민망한 내용을 썼을 것 같아 매우 기대가 됐다. 이상한 얘기면 놀려야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