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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Jun 29. 2024

"낙태시술받으러 먼 여행 가야 해요"

미, 작년에 17만 명 이상 낙태 위해 타주로 이동

1.


낙태는 현재 한국에서 여성의 선택적 권리로 인식되고 있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형사적 범죄로 규정하는 것이 위헌이라고 판시했으며, 정부가 후속 법규를 마련함에 따라 2021년 1월부터는 낙태가 합법화되었다.


낙태가 불법이었던 예전에도 한국의 여성들이 낙태를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낙태는 법적으로는 1953년부터 불법이었지만 실제로는 암암리에 비교적 자유롭게 시행되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낙태가 합법화되기 전인 2020년 한국의 인공임신중절 건수는 약 3만 2000건으로 추산된다. ('추산'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낙태가 '불법'이었을 때 낙태에 대한 정확한 통계 수치는 없을 것이다. 출산이 극적으로 줄어든 2020년에 이런 추산이 나왔으니, 출산율이 매우 높았던 과거에는 어땠을까.)


그러나 미국에서 낙태는 지금까지도 매우 심각한 사회정치적 이슈다.

미국에서 임신정지 또는 낙태는 2년 전까지는 자유로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현재 낙태에 관한 법률은 주마다 다르다. 어떤 주는 낙태가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이 자유롭지만, 어떤 주는 낙태를 법적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낙태는 주로 미국의 남부지방에서 불법인데 특히 텍사스주가 대표적이다. 텍사스주에서는 아이의 심장 박동이 시작하는 순간, 즉 마지막 월경일로부터 6주가 지나면서부터는 낙태가 불법이다 (Heartbeat Bill). 임신 6주는 여성이 임신을 인지하고 낙태를 하기 어려운 기간이므로 사실상 낙태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텍사스주는 심지어 강간과 근친상간이라 해도 낙태를 금지하고 있다. 나아가, 낙태를 돕는 어떠한 행위, 가령 택시기사나 병원 접수원까지도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렇게 강력한 낙태 규제 뒤에는 기독교가 있다.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는 낙태를 반대하면서 이를 불법화하려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다. 이들의 지원에 의존하는 보수적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로 낙태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진보적 또는 리버럴 미국인들은 낙태에 찬성하면서 이를 합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진보적인 정치인들도 낙태 찬성 입장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민주당과 리버럴(진보적) 미국인들은 여성의 선택권을 더 존중하지만, 공화당과 보수층은 태아의 생명권을 더 존중한다.


미국에서 낙태 문제는 오랫동안 풀기 어려운 사회정치적 종교적 골칫거리가 되어왔다. 낙태를 반대하는 Pro-Life 측과 낙태를 찬성하는 Pro-Choice 측이 양쪽으로 첨예하게 갈리고 대립하고 있어서 미국은 말 그대로 ‘낙태 전쟁’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2.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에서는 1973년에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합법화했던 판결 (로 대 웨이드 Roe v. Wade) 이후 낙태가 자유롭게 시행되어 왔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 시절에 보수적 성향의 판사들이 다수가 된 연방대법원은 2022년 여름 역사적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에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원했던 로(원래 이름은 노르마 맥코비)의 손을 들어주었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2년 전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불법화한 것은 아니다. 대법원은 낙태의 범위와 법적 결정권을 각 주에게 넘겨버렸다. 그때부터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인들과 정치인들이 득세한 주들에서는 적극적으로 낙태를 불법화하는 조치를 취해왔다. 주로 공화당이 강세인 남부와 중서부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낙태불법화로 인해 낙태를 금지하는 주에 거주하면서 낙태를 원하는 여성은 매우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그들은 결국 낙태 시술을 위해 낙태가 합법적인 주로 원정여행을 하게 되었다. 임산부들은 낙태를 위해 때로는 수일에 걸쳐 큰돈을 들여서 먼 길을 여행해야 한다.


지난해 텍사스주의 임산부 1만 4000여 명이 낙태 시술을 위해 접경한 주인 뉴멕시코주로 가야 했다. 낙태가 금지된 남부 지역에 있는 여러 주에서 낙태시술을 위해 일리노이주로 여행한 임산부 숫자도 1만 6000여 명에 이르렀다. 또 다른 임산부 1만 2000여 명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와 조지아주에서 노스캐롤라이나주로 가서 낙태시술을 받았다.


지난해에 이런 식으로 낙태를 위해 다른 주로 가야 했던 임산부 숫자는 무려 17만 1300명에 이른다. 이는 2019년의 7만 3100명에 비해 10만 명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3.


낙태를 금지하는 주들은 주로 보수적이고 기독교 영향력이 강한 남부 지방에 밀집되어 있는데, 낙태를 위해 여행하는 여성은 주말이나 휴가를 활용해서 먼 여행길을 다녀와야 하며 수천 달러를 지출해야 한다.


낙태가 허용되는 일리노이, 노스캐롤라이나, 뉴멕시코 주들의 대도시에서는 이들이 몰려들어서 낙태병원이 매우 분주해진 상황이다. 타주에서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정작 그곳에 거주하는 임산부들마저 먼 곳으로 낙태를 위해 여행을 떠나야 하는 웃지 못할 사정도 생긴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낙태시술병원은 종종 예약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포화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성건강과 생식권 향상을 연구하는 Guttmacher Institute의 자료에 따르면 2023년 뉴멕시코주에서 시행된 낙태는 2만 960건이며 그중 타주에서 온 환자가 71%를 차지했다. 이는 2019년에 비해 369%나 증가한 수치다. 2023년 타주에서 온 여성의 낙태 비율은 캔자스주(206%)와 버지니아주(110%)에서도 급증했다.


낙태 옹호론자들에게 약간의 희소식도 있다. 낙태약 이용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낙태를 원하는 여성은 현재 미 연방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경구 임신중절용 낙태약인 미페프리스톤을 이용할 수 있다. 미페프리스톤 사용을 중지시키려는 낙태반대단체들의 소송은 지난 13일 연방대법원에 의해 기각됐다. 2000년 이래 미페프리스톤 사용자는 600만 명을 넘어섰다. 


낙태약 사용 증가는 낙태를 막으려는 주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다. 낙태약을 이용하면 먼 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눈을 의식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낙태를 위해 일부러 먼 여행을 택하고 있다.


낙태 합법 주들은 이런 여성들에게 재정적 지원도 해주고 있다. 일리노이주만 해도 2022년 이후 낙태와 출산건강을 위한 예산을 2300만 달러나 지출했다. 클리닉 업무시간을 늘리고 인력도 보강하며 병원 연계도 늘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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