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 여행 이야기 17
큰 아쉬움 없이 미술관에서 나온 우리는 바로 옆에 ‘국립현대미술관 미술디지털도서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건물 내부가 거의 모두 보일 정도로 도서관 외관은 온통 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여 있다. 이 도서관은 문자 그대로 미술에 관한 잡지와 책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도서관이 예뻐 보여서 그랬는지, 미란과 향숙이 갑자기 들어가서 잠시 독서를 하자고 했다. 난데없는 독서 타령에 나는 속으로 약간 당황했다. 아니, 독서를 좋아해도 그렇지, 네 명이 일 년 만에 만난 시점에 도서관에 들어가서 책을 읽자고 하다니.. 차분히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여학생들이 원한다고 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따라서 들어갔다.
하지만 나도 그리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책을 사랑하는 우리가 도서관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 우리가 도서관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났다. 습관적으로 매일 도서관에 가는 사람들은 각자 자주 가서 앉는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때때로 친구들을 찾아다닐 때 우리는 도서관 몇 층 어느 구석에 누가 앉아 있는지 거의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넓은 도서관에서 함께 앉아서 숨 쉬고 시간을 보냈던 것도 그림 같은 추억이 됐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리면서 미술 도서관의 매우 조용하고 낯선 분위기 속으로 들어섰다. 도서관 건물은 사방으로 창문이 많아서 매우 시원해 보였다. 나는 잡지들이 진열된 쪽으로 가서 천천히 살펴보았다. 길지 않은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은 어려울 듯했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향하는 투명한 창문을 통해 너무 강렬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에어컨이 작동되는 실내에서 직사광선이 들어오는 그 구역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에는 미술 도서를 보거나 읽을 일이 없으므로 나는 그곳을 방문한 것을 좋은 기회로 여기기로 했다. 수많은 미술 관련 도서들과 잡지들의 겉표지라도 대충 훑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여러 잡지들을 펼쳐 보았지만 내용들이 낯설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잡지들을 뒤적거렸는데, 문과 계통에 속하는 나는 미술이라는 영역 안에서 먹고사는 다양한 직종을 살펴보는 것만 해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이라고 할 때 나는 보통 회화만 떠올리는 좁은 시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안에는 회화와 건축과 조각과 공예와 인테리어와 디자인과 평론과 갤러리 등 다양하고 풍부한 소영역이 있다. 수많은 상품 디자인,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각종 수공업과 공장생산까지 모두 미술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곤 한다.
미술이 우리 생활에서 차지하는 영역은 의외로 매우 넓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음악보다 미술이 우리 생활에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 보인다. 혹시 자녀가 미술을 좋아하고 미술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면 직업 선택과 취직의 폭이 넓다는 의미에서 권장할 만하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디지털도서관에서, 파생과 영향력에 관해 생각하면 한이 없을 것만 같은 미술 세계로 잠시 빠져들고 있을 때 향숙이 오더니 갑자기 “이제 나가자”고 말했다. 잡지들을 살펴보는 동안 어느덧 한 시간도 더 지났다.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 각자 흩어져서 책들을 뒤적이던 친구들은 모두 조용히 도서관에서 나왔다. 시원한 미술관과 도서관에서 바깥으로 나오니까 다시 땡볕과 무더위가 우리를 엄습했다.
5.
“배고프지?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여기 뒷골목으로 가면 식당들이 있을 거야.” 향숙이 그 동네에 익숙한 듯 말했다.
삼청로에서 국립민속박물관이 보일 때 내가 물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생긴 자리에 예전에는 뭐가 있었는지 기억하니? 내가 어릴 적에 이 근처에 불란서문화원이 있었는데 미술관 자리였는지 헷갈리네. 고등학생이었을 때 거기서 불란서 영화를 자주 봤었거든.”
그때는 그랬다. 7,80년대에 불란서문화원은 독재군사정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프랑스에서 직수입된 영화를 일반인들에게 보여 주던 곳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외화가 수입되면 한국정부가 모두 검열했고 자기 입맛에 따라 영화 일부를 삭제해 버렸다. 영화에서 삭제되는 부분은 주로 독재와 권위주의에 저항적인 말과 행동 또는 노골적인 섹스 관련 내용이었다. 지나치게 잔인한 폭력적 언어와 행동이나 자살 같은 극단적 내용도 삭제되기 일쑤였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이따금 일요일 아침에 혼자서 불란서문화원을 찾아가곤 했다. 문화원에 들어가면 먼저 안내실과 티켓 부스가 있었고 그 옆에 영화 관람실이 있었다. 이제 기억이 희미하지만 관람실 안에 의자가 백 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앉기에 편하지는 않은 접이식 의자들 앞에 작은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고 하루에 영화 세 편인가 네 편인가를 상영했다. 스크린 하단에 영어 자막이 나왔으므로 내 앞에 키 큰 사람이 앉으면 자막을 읽기 어려웠다.
고등학생은 나밖에 없었을 때가 많았다. 하긴 그 시절에 일요일 아침부터 어느 빡빡머리 고등학생이 불란서문화원에 영화를 보러 간단 말인가. 나는 거기에서 숨죽이고 앉아서 당대 프랑스 최고의 배우 알랭 들롱과 장가방 등이 나오는 영화들을 보았다.
프랑스 영화는 한국영화에 비해 세련되고 과감하고 자유로웠다. 관객을 현혹하는 스토리와 예술적 장면들과 갱단과 형사의 폼나는 언행과 자유분방한 연애 장면 등이 특히 그랬다. 아름다운 여배우의 전라 노출과 섹스 장면도 거의 거침없이 나왔다. 검열과 삭제가 일상화된 한국영화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사춘기 후반기를 지나고 있었던 나는 미지의 프랑스를 향한 깊은 감동에 젖어들었다. 마침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웠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갔을지도 모른다. 시중에서라면 ‘청소년 입장불가’라고 붉은 글씨로 적힌 사인 앞에서 좌절하고 못 들어갔겠지만 아무도 지키지 않는 불란서문화원은 그 당시 영화를 좋아하던 나에게 천국과 같았다.
불란서문화원에 갈 때마다 나는 으레 티켓 두 장을 샀다. 그곳에서는 두 시간마다 새로운 영화를 상영했고, 나는 갈 때마다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로망스’라는 제목의 기타 연주로 유명한 영화 ‘금지된 장난’을 본 곳도 거기고, 주제음악이 유명한 ‘태양은 가득히’를 본 곳도 거기다. 그야말로 아주 세련된(?) 폭력과 범죄를 다룬 프랑스 르누아르 영화들이 세계 영화계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나는 예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자기 혼자만의 예술이라면 상관없지만,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될 때는 예술가들에게도 사회문화적 책임 같은 게 작게나마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예술의 자유는 아주 살짝 억압되거나 제한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종종 예술가에게 고민을 주고 때로는 사회적으로 갈등을 일으킨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사회문화적 절제와 책임은 요즘 유튜브나 SNS처럼 광범위한 전파매체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제국주의나 나치를 찬양하는 내용이 예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하에 무조건 용납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를 판단해야 하는가. 나는 그럴 때 사회문화적 제한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런 민감하고 어려운 주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길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런 제한은 사실 어느 사회에나 존재해 왔고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와 권위주의 시대를 겪으면서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너무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표현의 자유는 무조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변천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현재, 예술과 출판 등에서 표현의 자유는 그만큼 더욱 증진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하여간 내가 어릴 때 자주 갔던 불란서문화원은 1999년 숭례문 근처로 이전했다. 그래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 있는 지역에서 내 어릴 적 추억의 일부가 잘려나가기는 했지만, 그곳에 갈 때마다 나는 아직도 저절로 옛 추억을 떠올린다.
6.
경복궁 옆 삼청로에서 불란서문화원과 함께 남은 추억 중 하나는 비원이라는 찻집이다.
역시 내가 어릴 때 불란서문화원 맞은편에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가 있었다. 건춘문이었는지 지금 경복궁관리소가 있는 자리 부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티켓을 사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뒤쪽으로 간다고 해서 곧바로 경복궁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전면이 유리로 된 찻집이 보였다. 계절마다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었다. 그 안에 앉아 있으면 비가 오는 날에는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비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웠고 겨울에는 눈에 파묻힌 경복궁 마당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친구를 만날 때 일부러 불란서문화원 앞에 있는 ‘비원’에서 만나자고 말하고 싶었다. 특히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 그런 곳에서 만나면 매우 폼날 것만 같았다. 내가 그렇게 말해도 알아들으면 그 애 역시 제법 문화예술과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친구라고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실제로 그렇게 약속을 해서 만난 여자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을 보면 여러분은 나의 사춘기와 청춘이 불행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인데, 그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인 듯하다.
찻집 비원 위쪽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있었다. 지금은 국립민속박물관이라고 부르는 건물 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72년 발족 당시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에 들어섰고, 1986년에 중앙청으로 불리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로 이전했다. 1995년에 임시로 현 국립고궁박물관 건물로 이전했다가 2005년에 이르러 용산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수차례 위치와 명칭을 변경한 끝에 국립중앙박물관 소속에서 벗어나서 1993년에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이전했다. 그곳이 현재의 위치이다. 친구에게 말할 때 나는 보통 국립중앙박물관이라고 말하지 않고 팔상전이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거대한 팔상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 팔상전이 모방인 거 알지?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팔상전이 진짜야. 여기 있는 팔상전은 군사독재 시절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어.”
내가 그렇게 팔상전을 언급했을 때 역사를 잘 아는 향숙이 말했다.
팔상전의 비운일지도 모른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거대한 석재 기단 위에 팔상전과 미륵전 등 유명한 건축물들을 덥석 올려 세워 두었다. 박정희의 독재정치에 반대했던 역사문화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기단 아래에서 보면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그런 건축을 폄하하면서 권위주의의 상징처럼 인식된다고 비판했다. 순전히 건축과 역사적 관점에서 그런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저런 모조품이 법주사에 있는 팔상전 건축의 본래적 의미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거대하고 근사하고 번쩍번쩍한 것은 오히려 천박한 모조품의 상징 아니던가.
애초에 건축가가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때는 주위 환경 조건과 건물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생각하면서 짓기 마련이다. 만약 광화문광장에 에펠타워나 자유여신상 모형을 갖다 놓는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그렇게 외국 유명 건축물은 너무 동떨어진 느낌이 들 테니까, 국립박물관 고유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팔상전을 설치했다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면 왜 상상의 황룡사구층탑을 설치하지 않았는지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모조품이 아니라 새롭게 구상한 예술적 건축물을 설치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은 창조적 사고의 산물이며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이정표가 될 것이다.
꼭 불만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후진국의 특성과 같은 ‘모방’에 지쳐서 하는 넋두리다.
7.
뙤약볕이 뜨거웠다. 나만 빼고 향숙, 미란, 상국 모두 햇빛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 더울 때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구나.
뉴욕에서 더운 날에도 좀체 모자를 쓰고 다니지 않았던 나는 서울에서 뜨거운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람들이 모자를 쓸 뿐 아니라 양산을 들고 다니는 풍경을 자주 본다.
그것도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풍경이다. 내가 어릴 때는 햇빛이 뜨겁다고 해서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햇빛과 비를 가리는 모자는 주로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나 썼었다. 특히 양산을 쓰고 다니는 것은, 미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뜨거운 햇빛을 피하려는 일부 도시 중산층 중년 여성들이나 하는 조금은 세련된 습관이었다. 우산은 비가 올 때 쓰고 양산은 맑은 날 중년 여성이 쓰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절대로 양산을 쓰지 않았다. 그런 것은 남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인식되었고 정말로 양산을 쓴다면 조금 이상하게 보았던 시절이었다. 양산은 오로지 여성 전유물이었다. 젊은 여성들 중에도 양산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양산을 쓴다. 물론 기후가 변했다고 하고 날이 너무 더워졌다고 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나라의 요즘 유행이다. 자외선과 무더위를 피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미백에 대한 관심은 더욱 뜨거워진 듯하다.
양산을 쓰지 않아도 얼굴과 목과 팔을 뭔가로 감싸서 최대한 햇빛을 피하는 것을 보면 그 이유는 더 뚜렷해 보인다. 챙이 넓은 모자, 검은 선글라스,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복면이나 마스크, 목 가림용 스카프, 기다란 팔토시와 장갑까지 햇빛이 닿는 것을 막기 위해 온몸을 중무장한 사람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런 것은, 내가 알기로는 오로지 한국, 특히 서울의 풍경이다.
무슬림 종파나 민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부 여성들은 거리에 나올 때 눈만 내놓고 온몸을 가리는 의상을 입는다. 그것은 햇빛을 가리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로지 남성의 탐욕적 시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전통의상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무더운 여름날 온몸을 가리는 부르카나 니캅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는 것은 나를 약간 슬프게 한다. 의상이 성적 차별을 내포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적은 다르지만 그와 비슷한 현상이 한국에서 기괴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만 같다. 나는 서울에서 그렇게 온몸을 가리고 다니는 사람을 볼 때마다 마치 저승사자를 보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어느새 그렇게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그들은 공공장소에 그렇게 의상을 갖춘고 나온다 해서 무슨 상관이냐고 당당하다.
나는 이런 일을 두고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 않다. 아무래도 내가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문화적 차이가 심해졌나 싶다. 다만, 그렇게 자신을 철저하게 가린 모습을 볼 때마다 답답해짐과 함께, 서울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일종의 아노미 현상을 겪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