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S+F
익숙함과 낯섦
고정관념을 깨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 말. 아마 살면서 가장 자주 들어 본 조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영감이나 발상이 필요할 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기도 하다. 변화와 혁신에 대한 기대가 최고조인 요즘, 이러한 ‘고정관념’에 대한 새로운 고찰은 누구나 거쳐가야 할 필수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이미 굳어진 생각의 회로를 바꾸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말 그대로 ‘고정’된 관념이기에, 매번 같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고정관념들은 반드시 깨어져야만 한다. 반복되는 고질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종과 성별, 문화 등에 깊게 뿌리내린 부정적 고정관념들은 곧 편견으로 이어지며, 이는 곧 차별을 야기하게 된다. 평등의 저울은 균형을 잃고, 억울한 이들의 상처와 슬픔은 해결되지 못한 채 사회에 깊은 균열을 남긴다. 때문에 우리는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에서 현명하고 유연한 판단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
<AHL, Episode 1, #6 (2004)>
러시아의 아티스트 그룹인 AES+F는 이러한 고정관념들을 다루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신선한 시각으로 사회적, 정치적 이슈들은 물론 삶과 죽음, 폭력과 같은 인간 본성의 영역까지 아우르며 우리에게 강렬한 충격을 준다. 독특한 그룹명은 작가들의 이니셜을 조합한 것이다. 총 4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AES+F는 1987년, 건축을 전공한 타티아나 아르자마소바 Tatiana Arzamasova와 레프 예브조비치 Lev Evzovich, 그래픽 아트를 공부한 예브게니 스비야츠키 Evgeny Svyatsky가 AES란 이름으로 활동을 먼저 시작했으며, 이후 1995년 사진작가 블라디미르 프리드케스 Vladimir Fridkes가 합류하며 현재의 AES +(플러스) F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진리는 없다
여기, 같은 장소에 전시된 14명의 소녀의 초상들에 주목하자. 이들 중 7명은 실제 살인을 저질러 복역 중인 소녀범들이며, 나머지 7명은 범죄와 전혀 관련 없는 무고한 소녀들이다. 아무 단서 없이 무작위로 전시된 이들의 사진 속에서 과연 당신은 살인범을 구별해 낼 수 있을까? 또한 어떤 기준으로 이 선택을 진행할 것인가?
<Suspects: Seven Sinners and Seven Righteous, (1997)>
AES+F의 작품 <용의자들 Suspects: Seven Sinners and Seven Righteous, 1997>은 이와 같은 예상치 못한 컨셉으로 관객을 당황하게 만든다. 가족의 사랑 속에서, 미래의 꿈을 향한 열정이 가득 차 있어야 할 이들의 미소 뒤편에 끔찍한 본성을 감춰두고는 관객들에게 악랄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작품 앞에선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끝없는 의심을 품어야만 한다. 소녀와 범죄자라는 극단적인 위치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면서 말이다. 오직 스스로의 시선과 판단에 기대어 선악을 결정하고,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독특한 상황. 관객들은 이 생소한 선택의 기로 앞에서 주춤할 수밖에 없게 된다.
<Suspects: Seven Sinners and Seven Righteous, (1997)> (부분)
AES+F는 창작에 있어, 그룹이란 이점을 적극 활용한다. 하나의 아이디어에 각자의 기술력을 접목시켜 다양한 형태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패션과 비디오 게임, 영화와 같은 각종 현대 미디어의 요소들을 이용하는 것이 바로 그들만의 스타일이다.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최후의 반란 Last Riot, 2005-2007>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수천 장의 고해상도 사진을 이어 붙여 만든 영상 작업이다. 비디오 게임과 같은 현대 엔터테인먼트의 영역 안에서, 죄책감 없이 무자비하게 자행되는 폭력을 자신들이 설계한 가상의 세계 속에 넘치도록 담아낸 작품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전부 폭력의 위험 속에 놓여있지만, 피해자, 가해자 모두 이에 감흥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처럼 부자연스럽고 반복적인 동작을 취하며, 폭력의 행위를 마치 포즈처럼 취하고 있다. 긴장하거나, 흥분하거나, 고통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피도, 상처도 없는 장면들 속엔 폭력을 행하거나 당하는 상황 만이 있을 뿐이다. 헌데 이처럼 부정적인 요소들을 전부 제거한 폭력은 오히려 아름답고 스타일리시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들은 스스로를 ‘네오 바로크 neobaroque’라 칭할 정도로 화려하고 강렬한 묘사를 표방한다. 소년이 청년을 공격하고, 아이가 인형의 목을 조르는 생경한 행동들은 치밀한 미적 묘사에 가려져 기꺼이 용인된다. 또한 행위의 장소가 되는 눈 쌓인 산맥의 풍경 위에 현대 기술의 산물인 미사일과 회전목마, 중세시대의 성을 함께 위치시켜, 시간의 인지를 모호하게 함과 동시에 더욱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Last Riot 2, The Carrousel (2007)>
그들은 2015년작인 <뒤집힌 세계 Inverso Mundus, 2015> 속에서,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뒤집어진 상황을 보여준다. 청소부가 거리에 오물을 뿌리고, 돼지가 인간을 도살하며, 어린아이가 스승을 꾸짖는 말도 안 되는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노숙자가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당나귀를 등에 태운 인간이 무표정하게 거리를 횡단하기도 한다. 이들이 창조한 이 이상한 가상 세계엔 오직 전복된 관념들 만이 허용될 뿐이다.
<Inverso Mundus, Still #1-03 (2015)>
<Inverso Mundus, Still #1-01 (2015)>
이처럼 그들은 세상의 모든 가치와 고정관념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을 연속적으로 제기한다. 현실 속 우리들에겐 너무나 낯선 이런 상황들은 오히려 우리 세계에 뿌리 깊게 내린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부와 가난, 성역할, 강제적인 착취에서 벌어지는 문제적 상황들은 서로 뒤바뀐 입장으로 재현되어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작품 속에선 이러한 참혹한 상황들 마저도 철저한 계산을 통해 미화된다. 또한 평면의 하늘 위를 떠다니는 온갖 동물의 혼종들은 상상조차 어려운 기괴한 모습으로 이 세계의 가상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윤리와 상식, 익숙함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풍경들 앞에서 우린 결국, 종말이라는 결과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
<Inverso Mundus, Still #1-02 (2015)>
협업의 의미
AES+F는 다채로운 방식으로 작품을 점차 확장시켜 간다. 앞서 소개한 영상 매체는 물론, 그 영상을 이루는 장면들로부터 파생된 디지털 콜라주, 회화, 오브제 등 하나의 아이디어를 통해 여러 장르의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생산된다. 그리고 이 덕분에 더 풍성한 의미와 감상을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다방면적 작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역시, 4명의 작가가 각자의 본인의 개성을 살려 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협업은 그들에게 충돌과 갈등 대신 시너지를 극대화시키는 최선의 방식이다. 서로 경쟁하지 않고, 구성원 모두가 프로젝트에 관여할 수 있는 자유로운 관계 속에서 공통의 비전을 찾아가는 것. 이 이상적인 작업을 무사히 해낸 그들은 현재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작가 그룹이 되었다. 2021년엔 국내 아이웨어 브랜드인 <젠틀몬스터 Gentle Monster>와 함께한 나노 컬렉션 비디오 아트워크가 NFT 경매에 출품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Turandot. History of Harassment (2019)> (모든 작품 사진 출처: aesf.art)
미와 에로스 같이 역사적으로 꾸준히 다루어 온 주제들을 현대의 사회적, 정치적 정서와 연결시키는 것이 작업의 목표라 말하는 AES+F. 그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시대와 경계를 초월한, 최초의 광경을 대면하게 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저울 위에 올려둔 채 말이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 것인지는 오직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결코 잊지 않길 바란다.
필자: 주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