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을 그만두면서 내려놓았던 카메라를 다시 꺼냈다. 봄기운이 완연해질 무렵, 대청호 '호반낭만길'에 있는 '명상 정원'으로 향했다. 드라마 <슬픈 연가>를 비롯한 여러 영화가 촬영된 곳이다. 주차장에서 시작된 산책로가 겨울처럼 길었다. 마침내 연둣빛 물결 위로 윤슬이 반짝이는 호수가 보이자, 겨우내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활짝 펼 수 있었다. 겹겹이 두른 능선과 호수를 감싼 흙길이 옛 정취를 자아냈다.
하지만 셔터를 누르지 못하고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었다. 뷰파인더 속 어둠과 앵글 속 풍경이 벽처럼 다가왔다. 마치 모래사막에서 바늘구멍을 들여다보는 듯한 막막함이었다. 이번 출사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건물 답사가 아닌, 사진 동호인들과 함께하는 취미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건물 사진만 찍었던 내게 광활한 풍경이 렌즈에 담을 수 없는 텅 빈 벌판이 되었다. 결국 카메라를 내려놓고, 호숫가에 이는 빛과 바람에 기대어 앉았다.
건축학도 시절, 안동 하회마을에서 처음 카메라를 들었다. 집 안 곳곳에 풍경화를 걸어둔 듯했다. 경관의 일부만 보였지만, 그 단편이 전체의 아름다움을 함축하고 있었다. ‘차경(借景)’이라 부르는 조경 기법이었다. 차경은 '주변으로부터 경치를 빌린다'라는 뜻이다. 창문이나 문틀이 액자처럼 집 안팎의 모습을 담아내면 인위적으로 정원을 꾸미거나 멀리 나가지 않아도 집 안에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ㄱ, ㄴ, ㄷ, ㅁ 자음 모양을 닮은 한옥을 땅에 앉히고, 채를 나누는 담장에 묘수를 더하면 모음이 완성된다. 마당은 한옥의 모음과 같다. 자음과 모음이 결합하여 다양한 소리를 담아내듯, 마당에 드리운 빛과 한옥에 스며든 어둠은 태양의 변주에 따라 공간의 서사를 깊고 다채롭게 한다. 산자락과 나무 한 그루, 낮은 담장과 장독대, 마당 한 자락과 그림자, 옆 건물의 처마와 빗줄기, 어둠 속 창가에 깃든 모든 요소가 화목하다.
차경이 뷰파인더와 같은 역할을 해주어 사진 초보자였던 나도 자연스럽게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나 보다. 지금껏 내게 의미 있는 풍경은 차경 틀에서 작동했고, 건물의 배경으로만 존재했다. 자연, 그 자체는 관심 대상이 아니었기에 호수의 윤슬, 오리 떼의 유영이 평화롭고 아름다워도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차경이 자연을 빌려와 공간에 심미적 깊이를 더하듯 나도 내 안의 차경을 찾기 위해 일어섰다. 그때 저 멀리, '나 홀로 섬'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정자(亭子)가 눈에 들어왔다.
정자는 사랑채와 안채로 나뉘는 유교적 공간 질서에서 벗어나 있다. 게다가 가장의 전용 공간인 사랑채의 누마루에서 독립된 홀가분한 공간이다. 서원이나 관아, 궁궐의 누각처럼 사회적 권위도 내세우지 않는다. 기둥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형태로 자연을 마주한다. 계곡이나 강가에 자리 잡은 정자는 성리학의 가르침 대신 자연과의 소통을 노래한다.
조선 중기 문신, 송순(宋純)이 면앙정(俛仰亭: 1533)을 지으며 쓴 시에서 차경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곳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현존하는 면앙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무등산 자락에서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른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풍경으로 사시사철 변하는 열 폭 산수화를 두르고 있다. 풍월은 스스로 공간에 머무니, 자연이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세 칸 초가에 어우러진다.
면앙정의 차경은 쓰이지 않고, 다만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달은 이지러져도 어둠 속에서 한결같이 빛난다. 세상의 부침과 관계없이 자신의 빛을 잃지 않는 달처럼, 은둔자도 내면의 고결함을 밝힌다. 청풍은 다투지 않고 다만 흐른다. 맑고 건강한 바람이 드나드는 마루에서 은둔자는 달궈진 마음을 식힌다.
세상의 중심에서 물러난 이의 내면은 헛헛하다. 방 한 칸은 소유와 명리(名利)를 비워낸 그들의 내면을 닮았다. 당쟁과 사화로 흔들리던 시대에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으며 자기 내면을 응시하는 곳, 성찰의 장이자 해탈의 낙원이다. 그곳에서 송순은 시조의 엄격한 틀에서 벗어나 우리말의 호흡으로 <면앙정가>를 지어, 담양 가사(歌辭) 문학의 터전을 일구었다. 면앙정의 '달 한 칸', '청풍 한 칸'은 3년 뒤에 지어진 소쇄원의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으로 이어진다.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집에 머물며, 비 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상쾌한 바람으로 객을 맞는다. 송순은 ‘맑고 깨끗함’을 담아 소쇄(瀟灑)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다.
선뜻 바람이 분다. 손가락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봄빛 가득한 풍경을 둘러본다. 소유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보이지 않던 것이 하나둘 드러난다. 호숫가 둔덕에 자리 잡은 그루터기에서 연둣빛 새순들이 반짝인다. 상처 입은 채로 새로운 생명을 피워내고 있다. 차경은 내가 건축가로서 실현하고 싶은 가장 선명한 건축 어휘였다. 소유가 존재를 압도하는 시대에, 더 가지지 않아도 자기 안의 것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건물을 짓고 싶었다. 하지만 차경은 단순한 미학적 기법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건물로 세우지 않아도 되는, 어디든 둘러보면 되는, 이미 자연 속에 있는 가장 생생한 말이 되었다.
* 이 글은 <에세이문학> 2025년 여름호의 초회 추천작으로 발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