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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반이 게임

나의 게임 일대기

by SinkiN Jan 01. 2025

 나의 30년 남짓의 인생에서 게임과 함께 한 시간은 대략 20년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초등학생 때 형을 따라간 PC방을 시작으로 32살 게임용 데스크톱을 처분하고 20만 원도 안 하는 알리발 미니 PC를 사기까지 게임은 내 인생의 일부분이었던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MS 윈도우가 보급되기 전 DOS에서 즐기던 미니게임이 있었다. 게임이 아니라 오락이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어를 모르던 어린 시절,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까. 좌표를 외우듯 아래로 세 칸, 엔터, 밑으로 네 칸, 엔터. 이런 식으로 오락을 즐길 수 있었더랬다. 그 기억이 컴퓨터로 게임을 한 첫 기억이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까. 그 당시 IT 광풍이 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저기 컴퓨터 학원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학교의 숙제는 '이메일 만들어 오기'일 정도였다. 웃긴 것은 도메인을 정해주고 아이디까지 정해서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 숙제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메일을 만들었으나 숙제검사 당시 알파벳을 잘못 써서 내가 만든 메일을 찾지를 못했다. 숙제를 안 한 것도 모자라 선생님을 속이기까지 했다고 오해를 사서 심한 강도의 체벌을 받았었다.


  그 당시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우리 집에도 컴퓨터가 생겼었다. 인터넷이 각 가정에 보급되던 시기였긴 했지만 우리는 인터넷은 고사하고 컴퓨터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아버지는 컴퓨터 학원에서 엑셀을 배우고 계셨는데 따라가서 디스켓에다가 포켓몬스터 게임을 담아 집에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플레이했었다.


 하지만 싱글게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던 중 PC방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퀴퀴한 담배연기가 자욱하던 그 어두침침한 곳. 형을 따라 간 PC방은 매우 무서운 곳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스타크래프트, 포트리스와 같은 대전 게임을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며 이따금 무서운 아저씨의 조용히 하라는 욕설이 오곤 했지만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문제는 재미는 이미 알아버렸는데 PC방을 갈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저금통을 몰래 갈라서 안의 돈을 빼서 즐겼으나 금방 동이 나 버렸다. 하지만 이 갈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혼나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나는 내 세뱃돈이 차곡차곡 모인 통장과 도장을 들고 은행으로 갔다. 종이에 인출금액 5,000원을 적고 행원 누나에게 건네니 5천 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은행을 나와 PC방으로 달려갔다.


 결국 세뱃돈 통장의 돈도 다 빼먹고 나는 더 이상 돈을 구할 곳이 없었다. 결국 부모님 지갑에 손을 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먼지 나게 맞았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부모님은 저금통과 세뱃돈 통장을 확인하시고는 체벌을 멈추셨다.


 그래도 PC방은 멈출 수 없었고 부모님께서는 이틀에 한번 꼴로 PC방을 갈 수 있도록 천 원을 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하건대 내가 부모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아마도 더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부모님 나름대로의 조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되고 우리 집에는 새로운 컴퓨터와 인터넷이 들어왔다. 그야말로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고 그때부터는 정말 게임만 보고 살았던 것 같다. 학업도 뒷전이며 학교에서는 하교 후 집에 가서 한정된 시간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냥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만 했다.


 참 많은 게임들을 했다. 디아블로, 라그나로크, 리니지, 바람의 나라, 일랜시아, 마비노기, 와우, 거상, 릴 온라인, 씰 온라인, 피파, 군주 등등... 그냥 찍어 먹어보기만 한 게임들도 많지만 나에게 게임은 일상이었다. 지금은 게임사들은 캐시템에서 수익을 얻지만 그 당시에는 월정액으로 정기권을 끊어야 했다.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20분을 달려서 학교에 갔다. 정기권을 끊기 위해.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1학년까지는 항상 야자를 도망치고 PC방을 갔다. 그때는 PC방이 성황 할 때라 서로 치킨게임이 많이 벌어졌다. 한 시간에 삼백 원했던 PC방도 있었다. 나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컵라면도 먹어가며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비록 내일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호되게 맞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2학년이 되었고 형은 군대에 갔다. 컴퓨터는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으나 하루는 부모님께서 나를 앉혀놓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딱 2년만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해보라 하셨다. 실패해도 좋으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보라고. 사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있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서 무엇이 될는지 최소한 일말의 양심으로 시험기간에 벼락치기로 하위권은 면하고 있다만 이 정도로 내 인생이 무난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신 부모님은 수학, 영어 그룹 스터디 학원을 등록해 주셨고 PMP를 사주셨다. 언어와 탐구영역은 EBS와 메가스터디 인터넷 강의를 PMP로 들었다. 오전 6시에 등교해서 영단어를 외우고 독서실에서는 자정에 나왔다. 그래도 일요일은 늦잠도 자고 게임도 했다. 물론 저녁에는 독서실로 갔다. 그렇게 2년 동안 나름 열심히 했다. 무언가 이렇다 할 계기는 없었다. 알게 모르게 쌓이고 쌓인 미래의 걱정들이 나를 순순히 공부의 길로 인도하지 않았을까.


 수능이 끝난 다음 날이었나. NC 소프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아이온'이 출시되었다. 형은 전역하고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고 그 덕에 나는 성인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밤새 형들과 함께 게임에 빠져 살았다. 2년간 옥죄고 있던 봉인이 풀리던 순간이었다. 정말 걱정 없이 게임을 했었다. 정시 3개가 다 떨어지기 전에는.


 우여곡절 끝에 나는 국립 4년제에 입학할 수 있었다. 수능을 생각보다 잘 봐서 정시를 상향지원했다가 입시를 말아먹는 바람에 말짱 도루묵이 되었지만 그래도 재수의 생각은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무조건 재수하라고 엄포를 놓았으나 나는 이 생활을 1년 더 할 자신이 없었고 부모님의 등골을 또 빼먹을 생각도 없었다. 정시에서도 나는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만 넣었고 추가모집 역시 그랬다. 나는 어렵게 추가모집에서 문을 닫고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학과 정원 52명 중 내가 52번째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공부할 때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었다. 무조건 타지에서 대학생활을 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루고야 말았다.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24시간 게임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대학교는 게임보다 재밌는 일들이 많았다. 친구들도 어울리는 것도 재밌었고 술자리며 MT, 체육대회 등 행사들을 즐기는 것도 재밌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고 행사들이 뜸해지니 결국 게임을 좋아하는 동기들끼리 다시 수렴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우리는 매일 PC방에 있었다.


 우리는 밤새 게임을 즐겼고 해가 뜨면 집에 들어갔다. 학사경고는 받지 말자는 서로의 다짐이 무색하게 출석을 하지 못하고 밤새 이겨온 잠을 해가 뜨고 나서야 청했다. 대학생활의 낭만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리출석으로 연명할 수 있었고 우리는 간신히 학사경고를 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게임이 '페이 투 윈'이지만 그때 당시 하던 게임들은 '플레이 투 윈'이 가능했다. 돈이 없더라도 시간을 쏟아부으면 충분히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새로운 콘텐츠를 제일 먼저 플레이할 수 있었고 점점 더 강해지는 내 분신을 보면서 상당히 흡족했다. 중, 고등학생 때는 시간의 제약에 의해 플레이가 한계가 있었지만 지금은 걸릴 것이 없다. 게임에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군대를 다녀오고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번에도 무언가 있었다. 내 전역날짜 이틀 뒤 '디아블로 3'이 출시되는 날이었다. 열심히 하는 자 하늘이 돕는다 했던가. 이번에도 게임에 매진하라고 이런 기가 막힌 일정을 선사해 주신 블리자드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콜라로 연명하며 게임을 했었다. 그래도 살아지더라.


 복학을 한 후에는 그래도 게임과 일상생활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다. 이제는 진짜 사회로 나가야 하니까. 조금 더 있으면 학생이 아니게 되니까. 그래도 게임은 내 생활비중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고 방학에 일정이 없으면 일주일 동안 밖에 안 나가고 게임만 했던 적도 있다.


 첫 직장에 취직해서는 게임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자는 것이 소원이었고 쉬는 것이 소원이었으니까. 정신은 피폐해졌고 몸이 힘드니 게임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컴퓨터에 앉아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만지는 것은 똑같은데 몸은 점점 망가져갔다. 일 대신 게임을 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첫 직장을 도망치듯 퇴사를 하고 배낭여행을 다녀오니 이번에는 블리자드에서 '오버워치'라는 게임이 출시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마다 인생 게임을 하나씩 배치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본가로 다시 들어온 나는 집에서 게임을 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PC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퇴직금은 아직 남았었고 오히려 PC방이 돈을 적게 쓰면서 놀 수 있는 장소였다.


 그 후 다시 취업을 했고 나는 본가를 나왔다. 받은 첫 월급으로 데스크톱 PC를 다시 장만했고 그렇게 다시 나만의 공간에서 자유로운 게임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게임을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의무감이 나를 갸웃하게 했다.


 그래도 게임은 계속했다. 왜냐하면 내가 즐길 수 있는 취미는 이것밖에 없으니까. 아침엔 당연히 출근을 해야 되듯이 퇴근하고 집에 오면 컴퓨터부터 켰다. 하지만 게임은 켜놓고 딴짓을 하기 부지기수였다. 마치 집중하기 위해 백색소음이 필요하듯 내가 집에 있기 위해 게임 사운드와 화면이 필요한 느낌이었다.


 알았다. 이것은 피곤함이었다. 회사에서 일하고 온 나는 게임까지 할 여력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몸도 많이 망가지기도 했고 피곤함은 금세 나를 잡아먹었다. 건강검진 상담 중 무조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심각한 이야기가 나를 탁구장으로 이끌었다.


 탁구를 치고 와서도 씻으러 들어가기 전에 항상 컴퓨터를 먼저 켰다. 그리고 의무적으로 게임을 한다. 그것은 마치 '숙제'였다. 일간 '숙제', 주간 '숙제'를 하기 위해 업무를 마치고, 운동을 하고 와서도 졸린 눈을 비비면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 시간에 접속해야지만 할 수 있는 '숙제'를 위해 나는 황금 같은 주말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모니터만 주야장천 보고 있는 것이다.


 회의감이 온몸을 감쌌다. 내가 이 것을 왜 하고 있나 싶었다. 그렇게 PC를 당근으로 처분했고 내가 키우던 캐릭터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른 것에 몰두하려고 애썼다. 습관이 되어버리고 숙제가 되어버린 내가 제일 좋아하던 게임이 다시 생각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게임을 정리하고 보니 시간이 굉장히 많이 생겼다. 하지만 그 시간들의 주인은 다시 채워졌다. 그 주인은 영화일 때도 있고 운동일 때도 있고 가족일 때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더 생산적인 일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순간에 정리가 가능했던 이유를 다시 곱씹어보자면 아마도 내가 질릴 말 큼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리고 피지컬적으로도 하자가 생기고 시간적인 여유가 없으니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플레이 투 윈'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일까.


 물론 미련은 있다. 나는 아직도 유튜브에서 게임 채널을 자주 본다. 특히 내가 했었던 게임들. 전성기를 지나 지금은 하는 사람만 하는 게임이 되어버린 옛날 나의 삶의 일부분이었던 게임들. 다시 해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지만 금방 생각을 다시 접는다. 이제는 해야 할 일들이 많거든.


 글 길이를 보니 아찔하다. 간단히 쓰려고 했는데 게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너무 신이 났었나 보다. 어쩌면 아직도 게임에 온 에너지를 쏟아붓고 싶은 마음이 한 구석에는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의 여유는 있지 않다. 게임이 떠난 내 삶의 빈 공간들은 다른 것들이 와서 이미 채워졌고 게임이 들어 올 공간은 남아있지 않다.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게임이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일부분이 되는 날이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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