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이로스엘 Mar 24. 2022

유혹을 이겨내는 용기

<빨강 연필>을 읽고

  <빨강 연필>이라는 장편 동화를 읽었다. 200페이지가 넘는 꽤 글밥이 있는 동화로, 2011년 황금도깨비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비록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화지만 어른들에게도 묵직한 울림이 있는 동화였다. 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부분들이 있었고, '유혹'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동화를 읽으면서 나는 과연 주인공 민호처럼 유혹을 이겨낼 용기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도 다이어트 중에 보이는 맛난 간식 따위와는(물론 이것도 나름 큰 유혹이지만...!) 비교도 되지 않을 강하고 짜릿한 유혹을 말이다.  


  우선 간단히 줄거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5학년인 주인공 민호는 공부도 운동도 특출 나게 잘하지 못하는 조용한 성격의 남자아이다. 3년 전 부모님의 부부싸움으로 아빠가 집을 나간 뒤에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엄마는 직장에 다니느라 저녁에야 집에 들어온다. 민호는 혼자 컵라면을 끓여 먹으며 외롭고도 심심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빨강 연필을 가지게 되면서 민호의 일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빨강 연필만 손에 쥐면 신들린 듯 멋진 글을 척척 쓰게 되면서 선생님의 칭찬과 반 친구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빨강 연필이 대신한 것이므로 민호는 점점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빨강 연필이 없으면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계속해서 거짓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어 어느새 글을 잘 쓰는 아이가 되어 버린 민호는 전국 백일장 대회에까지 나가게 된다.


  반에서 글쓰기든 공부든 운동이든 뭐든지 잘하던 재규라는 아이가 민호를 관찰하다 빨강 연필에 의심을 품게 되고 결국 질투심에 빨강 연필을 훔쳐 감춰 버린다. 백일장 대회 시작 전 민호는 재규와 주먹다짐까지 하며 빨강 연필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만 재규는 이미 빨강 연필을 학교 근처 소나무 숲에 버려서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빨강 연필 없이 백일장 대회에 참가하게 된 민호. 그런데 웬일인지 빨강 연필이 없어도 민호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오히려 두려움 없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스스럼없이 담은 글을 쓰게 된다. '행복'이라는 주제가 주어졌는데 민호가 쓴 글의 제목은 '고통'이었다. 그동안 비밀 일기장까지 만들어 거짓 일기를 써냈던 민호의 마음은 이를 통해 한결 가벼워진다.


  당연히 주제와도 완전히 다른 글을 써냈기 때문에 백일장에서 상도 못 받고 예전처럼 평범한 아이가 되어 버렸지만 민호는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솔직하게 쓴 덕분에 심사위원으로서 그 글을 눈여겨본 유명 동화 작가에 의해 특별 수업(일 년 동안 책을 읽고 토론하며 글을 쓰는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이 대목에서 얼마나 대리만족을 느꼈는지 모른다.).


  민호는 빨강 연필을 찾아 태워 버리고 3년 전 집을 나간 아빠에게 자신이 먼저 연락을 하는 용기를 낸다.




  만약 나에게 이런 마법의 빨강 연필이 생긴다면 어떨까? 머리 아프게 고민하면서 글을 쓸 필요없이 빨강 연필이 알아서 멋진 글을 써 준다면? 그 연필을 쥐고만 있으면 모두가 감탄할 만한 글이 저절로 술술 써진다면?


  물론 그렇게 쓰인 글은 '나의 글'이 아니다. 빨강 연필이 나의 손을 빌려 쓴 글일 뿐.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내가 쓴 글인 줄 알고 감탄하고 칭찬하고 난리가 나겠지. 자연스레 부와 명예도 함께 따라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과연 행복해질까?


  처음에는 당연히 엄청난 행복감을 느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나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행복감이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생겨나는 물질적이고 거짓된 행복감일 것이다. 그리고 거짓은 종국엔 반드시 내 안에 어두움을 몰고 와서 나 또한 민호와 마찬가지로 죄책감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결국엔 잠을 못 자는 지경에 이를 것 같다. 빨강 연필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늘 전전긍긍할 것이 뻔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빨강 연필을 태워버린 주인공 민호가 참으로 대단하고 훌륭하다.




  나는 책을 읽을 때 항상 프롤로그나 '작가의 말' 등도 관심 있게 읽는데, 이 동화를 쓴 작가는 초등학교 2학년인 조카의 일기 숙제를 도와주다가 이 동화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조카가 씁쓸한 표정으로 '일기는 읽는 사람을 의식해서 써야 한다'라고 말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이 동화에서도 주인공 민호가 3년 전에 부모님의 부부싸움에 대한 일기를 썼다가 엄마가 담임 선생님의 전화를 받는 내용이 나온다. 민호가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된 선생님이 엄마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엄마는 "넌 그런 걸 일기에 쓰면 어떡해."라며 민호를 야단치고 그때부터 민호는 일기를 쓸 때 '다른 사람이 봐도 괜찮을 내용'만 쓰게 되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왠지 마음이 뜨끔했다. 나 또한 '다른 사람이 봐도 괜찮을 내용'만 쓰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디선가 빨강 연필 같은 요술 연필이 뿅 하고 나타나 남들이 열광할 멋진 글을 써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제는 신현수 작가님의 동화창작교실 두 번째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정말 흥미롭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번 주의 숙제는 내가 쓰고 싶은 동화의 글감을 찾아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인데 정말이지 머릿속에 쥐가 나는 느낌이다. 바로 이럴 때 신통방통한 요술 연필이 떡 하니 나타난다면...?!? 고민 끝일 텐데...!!


  '에잇, 이런 얼토당토않는 생각을 할 시간에 좀 더 머릿속 안테나를 꼿꼿이 세우고 글감 찾기에 몰두해야지 뭘 하는 거야?'


  스스로를 점잖게(!?) 꾸짖으며 마음과 생각을 다잡아 본다. 그렇지만... (비현실적이긴 해도) 정말 그런 요술 연필이 나타나 반짝이는 붉은 자태로 유혹한다면 나는...?


  '아, 정말 어렵다, 어려워... 왜 절대 사용 안 할 거라고 딱 부러지게 말을 못 하니!!'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잘하는 것들에 대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