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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이로스엘 May 20. 2022

드디어 '그곳'에 다녀오다

덕수궁 돌담길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다녀온 곳. 내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사랑하는 곳.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다. 덕수궁 돌담길에 대해서는 이미 예전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 말미에 날씨가 따뜻해지면 반드시 다시 갈 거라고 다짐했었다('그곳'에 가 볼 때가 되었구나 (brunch.co.kr)).


  사실 지난 달 토요일에도 가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시도한 적이 있었다는 것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에도 느꼈지만 광화문 일대는 주말에 차를 타고 갈 곳이 못 된다. 내가 갔던 토요일에는 길거리에서 시위도 많아 여기저기 차량 통제를 하고 있었다. 차로는 오도가도 할 수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야 했다.




  지난 5월 6일 금요일은 내가 한국어수업을 하는 초등학교의 재량휴업일이었다. 마침 남편 회사도 휴가였다. 그래서 남편과 둘이 덕수궁 돌담길 근처 식당에서 점심도 먹고 산책도 하며 데이트를 즐겼다.

  

  중학생 아들도 데려가고 싶었지만 아들의 학교는 정상 수업을 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같이 갈 수가 없었다(왠지 아들은 덕수궁 돌담길 같은 곳엔 별로 안 가고 싶어했을 것 같긴 하지만...).



 

  오랜만에 찾은 광화문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11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을 했는데 인근 회사에서 점심을 먹으러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과 재량휴업일을 맞아 가족 단위로 놀러 나온 사람들까지 더해져 평일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인파가 가득했다.


  불길했던 예감대로 우리가 가려고 했던 '덕수정'은 이미 긴 줄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지나가던 어떤 중년 남성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여기 왜 이렇게 줄이 길어?"

  "글쎄 말이야. 그냥 오징어볶음 팔고 하는 집인데."


  그 대화를 들으며 난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오징어볶음이 아닌데. 여기 오징어볶음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는 분들이구나......'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 긴 줄을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발걸음을 돌려 돌담길 초입에 있는 식당에서 낙지볶음으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오징어 대신 낙지를 먹게 된 것이다. 처음 가는 식당이었는데 기대를 안 해서 그랬는지 생각보다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


  낙지볶음으로 점심을 먹고 나서 바로 옆에 있는 '돌담콩'이라는 카페에서 음료를 테이크아웃했다. '돌담콩'은 '돌담에서 피어난 커피콩'의 줄임말이었다. 카페 주인은 어쩌면 이렇게 돌담의 감성을 제대로 살린 이름을 지었을까? 순전히  이름에 반해서 들어간 카페였다.



  남편은 초콜릿이 함유된 커피, '촉촉라떼'를 주문하고, 커피와 별로 안 친한 나는 '크림말차라떼'를 주문했다. 음료 이름도 뭔가 감성 있게 느껴졌다. 한참을 대기해서 겨우 음료를 받아들고 우리는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걷다 보니 돌담길을 타고 너무나도 감미로운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를 따라 가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그 바이올린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멈춘 곳은 돌담길 한 가운데였다. 한 젊은 연주자가 음악에 맞춰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많은 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연주를 감상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동영상을 찍기도 했다.



  남편과 나도 그 틈에 들어가 예상치 못했던 길거리 음악회의 관객이 되었는데 연주가 다 끝날 때까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연주자는 장한샘이라는 젊은 연주자로 이미 유튜브에선 꽤 유명한 듯 했다. 클래식은 물론 내가 좋아하는 디즈니 영화 곡 메들리, 케이팝까지 훌륭한 솜씨로 연주해냈다. 나는 원래 동영상 촬영 같은 건 안 하는데 나도 모르게 촬영을 하고 있었다.


  5월의 따뜻한 햇살, 달콤하게 살랑거리는 바람, 그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들의 초록 잎사귀들. 그리고 그 사이를 넘나들며 사람들의 귀를 기분좋게 간질이는 바이올린의 음색. 전통의 멋이 배인 고풍스러운 돌담길과 서양 악기인 바이올린의 조화가 이렇게 근사할 줄이야. 거기다 이 모든 걸 돈 한 푼 안 들이고 즐길 수 있다니...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열정이 담긴 그의 연주를 듣고 보고 있자니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뭐라 표현이 불가능하다)이 몽글몽글 끓어올랐다.  이것이 음악의 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벅찬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마지막 연주곡이었던 '아리랑'




  짧아서 아쉬웠던 길거리 연주회가 끝나고 다시 돌담길을 따라 걸을 때 또다시 작지만 큰 감동의 순간을 만났다. 어느 이름 모를 예술가의 작품인 듯 했는데 그것이 더 특별했던 건 첫 만남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작년 가을에 친구들과 왔을 때도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두었었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신기했다.



  다 타 버린 연탄재에 꽂혀 있는 빨간 장미 두 송이. 그리고 그 옆에 종이 박스부욱 찢어 만든 듯 보이는 작은 팻말이 놓여 있었다. 그 종이 팻말에는 춤 추는 것 같은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뜨거울 때 꽃이 핀다.'


 뜨거울 때 꽃이 핀다...? 입 속으로 되뇌일수록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었다. 가장 열정적일 때, 무언가에 대해 갈망하는 에너지가 뜨겁게 용솟음칠 때 비로소 꽃이 핀다는 의미인 건가?


  꽃은 여러 번 피고지고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내 인생에서는 지금까지 몇 번의 꽃이 피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은 어떤 상태일까도 궁금하고.


 사실 이건 그림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것이 어느 분야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말하기가 애매하다. 그러나 분명한 작품이다. 이름 모를 어느 예술가의 소박하지만 힘이 있는 작품.




  돌담길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담쟁이를 만났다. 난 담쟁이를 좋아한다. 담쟁이로 덮인 돌 벽을 보면 왠지 그곳에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 같다. 오랜 역사를 담은 특별한 기억들이 말이다. 내가 이곳에 왔다 갔던 흔적도 이 담쟁이 덩굴에 돌돌 감겨 계속 남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 덕수궁 돌담길은 늘 나에게 특별함을 선사한다. 수없이 많이 갔는데도 갈 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느낌과 감성을 느끼게 한다. 일상에 치여 지치고 감수성이 메말라갈 때쯤 힘을 얻기 위해 또 찾아가야 할 곳이다.

  


 브런치로부터 드디어! 점잖지만 뼈가 있는 알림을 받았다. 그 독촉(?)에 화들짝 놀라 얼른 완성한 글이다. 5월 6일에 다녀와서 찔끔찔끔 썼던 글을 퇴고도 제대로 못하고 이제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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