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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은 Dec 05. 2023

당신의 애씀은 언제나 아름답고 가치 있다.

좋아하는 문장들을 모아#4

*순서에 의미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절들을 기록해두기 위한 글입니다.




86.


"내 우주선에는 여기로 오는 데 필요한 연료밖에 없어. 집으로 돌아갈 연료가 부족해. 조그만 탐사선들이 있어서 내가 발견한 내용을 가지고 지구로 돌아갈 거야. 하지만 나는 여기 남아."

"왜 그런 임무, 질문?"

"우리 행성에서 늦기 전에 만들 수 있는 연료가 이게 전부였거든."

"너 지구 떠날 때 알았음, 질문?"

"응"

"너 좋은 인간."

"고마워."


- 앤디 위어, <프로젝트 헤일메리> 中




87.


"이건 행복! 네 얼굴 구멍은 슬픈 형태. 왜, 질문?"

"긴 여행이 될 텐데, 나는 혼자일 테니까." 나는 아직 집으로 가는 길에 코마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할지 모른다. 완전한 고독과 아무 맛 없는, 코마 슬러리밖에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견디기가 너무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의 첫 부분만이라도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있을 계획이다.

"나를 그리워할 것임, 질문? 나는 너를 그리워할 것임. 너는 친구임."

"응. 나도 널 그리워할 거야." 나는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신다. "너는 내 친구야. 세상에, 넌 내 가장 친한 친구야. 그런데 좀 있으면 우린 영원히 작별하게 돼."


- 앤디 위어, <프로젝트 헤일메리> 中




88.


우주는 크다. 우주는 너무 너무 크다.

그러니까 겨우 2,000만 킬로미터만 찾아보면 된다니 나는 극도로 운이 좋은 것이다.

"흠." 나는 중얼거린다.

타우세티에서 이렇게 먼 곳까지 와 있으니 로키의 우주선은 타우빛을 별로 반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망원경으로 블립A를 발견할 가능성은 없다.

참고하자면, 나는 죽을 것이다.

"그만해." 내가 말한다. 코앞에 닥친 나 자신의 죽음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대신 로키를 생각한다. 지금도 로키는 절망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가고 있어, 친구.

"기다려…."

로키는 분명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오랫동안 맥이 빠진 채로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해결책을 알아내려 애쓰고 있을 것이다. 뭘 하려나? 로키의 종족 전체가 위태로운 상태인데, 로키는 내가 가고 있다는 걸 모른다. 그냥 자살하지는 않겠지? 로키는 생각나는 일은 뭐든 해볼 것이다. 성공할 확률이 아주 낮더라도.


- 앤디 위어, <프로젝트 헤일메리> 中




89.


"로키?"

"그레이스, 질문?"

"맞아!" 음정 몇 개를 듣고 이렇게 기뻤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 친구! 나야!"

"너 여기 있음, 질문?" 로키의 목소리가 너무 높아, 그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나는 에리디언의 말을 꽤 잘 이해한다.

"응! 나 여기 있어!"

"너는…." 그가 새된 소리를 낸다. "너…." 그가 다시 새된 소리를 낸다. "네가 여기 있어!"

"맞아! 에어로크 터널 좀 설치해 봐!"

"경고! 타우메바82.5가…."

"알아! 알고 있어. 제노나이트를 통과할 수 있지. 그래서 여기 온 거야. 네가 곤란한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너 나 구함!"

"응. 난 늦지 않게 타우메바를 잡았어. 난 아직 연료가 있어. 터널을 설치해. 내가 널 에리드로 데려다줄게."

"넌 나 구하고 에리드 구함!" 로키가 새된 소리로 외친다.

"아 진짜, 터널 좀 설치하라니까!"

"네 우주선으로 돌아가! 그러지 않으면 바깥에서 터널을 보게 될 거야."

"아, 맞네!"


- 앤디 위어, <프로젝트 헤일메리> 中




90.


이 능력은 또한 우리 존재의 정수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추론할 능력이 없다면 사랑도 그림책에서 오려낸 그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느끼는 마법이 없다면, 사랑이 다 무엇이겠는가? 마음이론은 두 사람이 무언가를 보고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환희의 순간이요, 상대방의 말을 내가 끝맺어줄 때 느끼는 편안함, 아무 말 없이 손을 맞잡고 있는 순간의 평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행복하다고 느낄 때 행복은 더 달콤한 것이 된다. 죽음으로 떠나보낸 누군가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리라 믿는다면 슬픔은 더 견딜 만한 것이 된다.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91.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92.


그때 제 나이가 겨우 만 스물여섯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볼 때는 그림처럼 완벽한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겉보기에 성공한 대부분이 결국엔 깨닫게 되지요. 성공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성공과 행복은 서로 다른 것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제가 인생을 능숙하게 살아나가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확실히 물질적으로나 직업적으로는 많은 것을 이룬 상태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3년 동안 여섯 개 나라를 돌면서 치열하게 일했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엄청난 의지력과 자제력을 발휘해서 겨우 버텨낸 거였죠. 저는 여전히 속내를 숨기고 재무 관리에 관심이 있는 척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진심이 아니더라도 열심히 흉내를 내면 생각보다 무척 오래 버틸 수 있거든요. 하지만 자제력만으로 더는 해낼 수 없는, 아니 해내고 싶지 않은 날이 옵니다. 한 사람의 일상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은 우리 존재의 더 깊은 부분에 자양분과 활력을 공급해야 합니다. 그런 유형의 자양분은 흔히 성공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느낌에서, 자신의 업무가 의미 있고 자기 재능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바뀌게 한다는 느낌에서 나오지요.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93.


우리는 누구나 생각을 내려놓을 능력이 있습니다. 관심을 어디로 돌릴지 또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얼마 동안 관심을 기울일지 선택할 능력도 있지요. 여러분에게도 당연히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약간의 연습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 잠재된 능력을 무시하거나 아예 잃어버린다면, 우리 삶은 여태까지 몸에 깊이 밴 행동과 관점에 좌우됩니다. 모든 결정을 습관적으로 내리게 되지요. 이를테면 과거에 목줄이 묶여 끌려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결국 우리는 같은 트랙을 계속해서 돌고 또 돌게 됩니다. 그런 삶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존엄도 품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목줄을 끊어내기가 쉬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94.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명쾌한 진실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95.


저는 여러분이 손을 조금 덜 세게 쥐고 더 활짝 편 상태로 살 수 있길 바랍니다. 조금 덜 통제하고 더 신뢰하길 바랍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조금 덜 느끼고, 삶을 있는 그대로 더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에게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되니까요.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을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자신을 원래보다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들 필요 또한 없지요.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96.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사찰에서 나던 향 냄새, 계곡의 이끼 냄새와 물 냄새, 숲 냄새, 항구를 걸어가며 맡았던 바다 냄새, 비가 내리던 날 공기 중에 퍼지던 먼지 냄새와 시장 골목에서 나던 과일이 썩어가는 냄새, 소나기가 지나간 뒤 한의원에서 약을 달이던 냄새…… 내게 희령은 언제나 여름으로 기억되는 도시였다.


- 최은영, <밝은 밤> 中




97.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 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식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최은영, <밝은 밤> 中




98.


자기가 한 밥을 먹고 맛있다고 말해준 사람도 증조모에게는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이었다. 증조모는 그 아이 같은 얼굴을 오래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증조모의 마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로 기울어서, 그곳으로 기쁨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모두 흘러갈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기운 마음으로 뒤뚱거리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증조모는 새비 아주머니를 잘 알지 못했던 그때부터도 새비 아주머니를 잃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언젠가 새비 아주머니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더이상 그 말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얼어붙은 얼굴로 자신에게 실망했다며 등을 돌린다면 숨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 최은영, <밝은 밤> 中




99.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뜨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


- 최은영, <밝은 밤> 中




100.


지우와는 대학교 천체연구 동아리에서 만났다. 대학 때 친하게 지내다 졸업하고 각자 다른 길로 가면서 조금 멀어졌고, 내가 결혼하고는 더 만나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가끔은 전화통화를 하고 만나기도 했는데, 내가 이혼 과정을 지나는 동안 지우가 나를 많이 도왔다.

'넌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어느 날 말을 이을 수 없어 눈물만 흘리던 내게 지우가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우를 보며 알았다.


- 최은영, <밝은 밤> 中




101.


이 이야기를 먼저 읽은 친한 지인이 말했다. 김성곤이 가진 초능력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시도하는 지점에 있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초능력이 숨어 있다고 믿는 편이다. 어차피 우린 자신만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면, 당신의 애씀은 언제나 아름답고 가치 있다.

나는 안주하지 않고 힘을 다하는 영혼들에게 멀리서나마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작가의 말을 빌려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을 깊이 응원한다, 라고.


- 손원평, <튜브> 작가의  말 中




102.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그리고 나서 남자는 화면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여자에게 하는 말이 너무 짧아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더 보탤 단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시공간 연속체 속에서 그 모든 일을 몇 번이고 다시 겪고 있는 중이었다.


-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中




103.


또 멋대로 랑의 영상을 본다. 또 과거를 재생산한다. 3년 전 랑이 떨어트린 망치에 맞은 이후로 기억장치가 멋대로 과거를 재생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오류.

지카에게 말하면 고쳐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류를 유지하고 싶다. 불현듯 재생되는 것은 마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와 인간을 마비시키는 그리움 같아서 나는 그것을 흉내 내고 싶다. 감정을 훔칠 수 없으니 베끼는 것이다.


-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 中




104.


"인간은 헛된 희망을 품는군."

"완벽한 희망을 품어야 하나?"

"……"

"그게 말이 되는 문장이기는 하고?"

순간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답할 수 있는 영역의 물음이 아니다. 나는 희망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어떤 것이 더 인간을 살게 하는지 알 수 없다.


-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 中




105.


그러니까 내게 감정을 판단하고 느낄 교감신경과 뇌가 없더라도 중요한 건 내가 그 감정을 학습하고 흉내 낸다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건 감정이다. 결과보다 행위가 중요하듯이. 감정을 느끼는 정확한 지점보다, 감정을 따라 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다. 어쩐지 '흥분'되는 것 같다. 그건 나는 할 수 없는 신경계의 변화이지만 흥분한 듯 주먹을 꽉 쥐고, 살리를 마주 보며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내가 느끼는 흥분의 감정일까. 나는 빠짐없이 랑의 감정을 느꼈던 걸까.

그렇다고 믿고 싶다.

믿고 싶다는 걸 믿고 싶다.


-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 中




106.


랑을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내가 만난 사막에 대해. 너를 만나기 위해 걸어온 나의 사막에 대해. 그렇게 늙어가는 랑의 곁에서, 조금씩 망가져 가는 내 몸으로 이야기하겠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로소 랑과 시간이 맞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이번에는 너와 함께 늙어갈 수 있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랑을 떠올리며, 더 깊은 어둠으로 내려간다.

간절하게.


-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 中




107.


즐거운 생각을 할까 해. 소용이 없더라도 말이야.

방법은 간단해.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는 거지. 몸이 함께 기억하는 순간들. 예를 들어볼까? 건전지가 방전돼 알람이 울리지 않았던 그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음에도 몸이 개운함을 느낀 순간 나를 덮쳤던 서늘함. 약속 장소로 전속력으로 달리던 때 폐부에 가득 들어차던 팽팽한 공기. 스피커를 통해 들리던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스타카토처럼 끼어든 참새의 울음, 코를 통해 온몸에 퍼지던 인공적인 풀 냄새. 신발로 땅을 툭툭 내리찍으며 나를 기다리던 너를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과 미약하게 떨리던 몸, 긴장한 듯 멈춘 숨. 뜬금없이 달려가 가 너를 와락 끌어안아버리고 싶던 충동, 그걸 억누르느라 꽉 쥐었던 주먹, 그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처음 자각한 순간이야.


- 천선란, <이끼숲> 中




108.


잘못 박은 철심에 단단했던 지반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고, 지하수가 흘러와 홍수가 난 적도 있었다. 설치해둔 전선에서 난데없이 스파크가 튀어 폭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삶을 확장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하겠다는 건 예측 불허의 위험이 가득한 어둠을 헤집는 일인 것이다. 하루에도 수차례 사고가 발생했다. 비록 사고는 숫자로 집계되지만, 그 숫자에도 이름과 얼굴이 있고 웃음과 내일이 있었다는 걸 사람들은 자주 잊지만 말이다.


- 천선란, <이끼숲> 中




109.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

내가 나중에 아주 희박해진다면

내가 나중에 아주 희미해진다면

화병에 단 한 번 꽃을 꽂아둘 수 있다면


- 성동혁, <리시안셔스> 中




110.


열리지 않는 댐을 상상하는 것. 그것만으로 고요하고 슬프다.

안개만으론 댐이 차오르지도 마르지도 않는데,

댐 주변엔 항상 안개투성이다.

하얗게 번지는 새벽은 어디까지인가.


'우는' 슬픔보다 '울지 않는' 슬픔이 더 슬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두 손으로 떠받고 있던 새벽은

언제 쏟아지는가.


- 성동혁, <울지 않는 사람>




111.


마음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에 붙여도 온통 세계가 되는 이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 성동혁,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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